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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문화유산 여행길_금강을 따라 떠나는 예학스터디 1]
등록일
2011-12-19
주관부서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1446

 

 

 

 

- 금강을 따라 떠나는 예학스터디

 

 

 

 

: 문화생명 줄기 '금강' :

 

 

금강은 전북 장수군 장수읍에서 발원하여 충청남북도를 고루 지나며 군산만을 거쳐 서해로 흘러간다. 길이가 394.79km, 유역면적이 9,912.15㎢에 달하는 거대한 물줄기는 굽이치며 흐르는 물결이 비단결 같다고 하여 금강(錦江)이라 불리운다. 백제의 멸망과 삼천궁녀의 비밀을 간직한 백마강은 금강의 일부분으로 부여읍 정동리 앞 범바위에서부터 낙화암과 조룡대를 거쳐 부여읍 현북리 파진산 부근까지 이르는 하류 구간(약 16㎞)의 별칭이다.

 

 

금강은 우리나라 강중에는 유일하게 북쪽으로 흐르다가 연기군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공주를 거쳐 부여와 논산, 강경으로 이어진다. 폭이 깊고 넓은 하구를 중심으로 수상교통이 발달하여 삼국시대 이후 문화교류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고, 물길을 따라 흐르는 문화의 유입은 조선시대 사상과 학문의 꽃을 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민초들에게는 생명의 젖줄로 삶을 지탱해 주었다.

 

한때 강경포구는 원산포구와 함께 전국 2대 포구로 유명했었다. 강경시장은 평양시장, 대구시장과 더불어 전국 3대 시장으로 번성했으며 서해안의 각종 수산물이 거래되던 곳이었다. 당시 새우, 황석어 등의 어물을 염장, 발효시켜 젓갈로 만들어 판매하면서 강경젓갈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현재 130여 개의 대형 젓갈상점이 성업 중이며 강경젓갈시장의 젓갈 생산·판매량은전국의60%를 상회한다고한다.

 

 

 

 

: 예학의 족보와 조선의 정치 :

 

 

동양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유학(儒學)은 공자(孔子)로부터 출발해 주자(朱子)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고 본다. 주자가 정리하여 철학적 체계를 세운 것을 주자학 또는 성리학(性理學)이라하며 고려 말에 주자가 저술한『주자가례』가 도입되고 성리학이 조선의 지배이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예학(禮學)'이라는 민족 고유의 사상으로 발전되어 왔다. 하지만 '예'의 해석과 실천에 있어서 학문적, 정치적 공방이 끊이지 않았다.

 

예학의 흐름은 율곡의 학문을 이어받은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을 필두로 그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 1574~1656),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1607~1689), 동춘당 송준길(東春堂 宋浚吉, 1606~1672), 팔송 윤황(八松 尹煌,1572~1639), 미촌 윤선거(米村 尹宣擧, 1610~1669), 명재 윤증(明齋 尹拯, 1629~1714) 등 기라성 같은 조선성리학의 거목들을 거치며 사상의 정립을 이루어갔다.

 

조선의 정당정치는 많은 경우 학맥을 통해 나누어졌는데 크게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들로 구성된 동인(東人)과 이이(李珥)와 정철(鄭澈)로 이어지는 서인(西人)으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동인은 이황의 문인들로 구성된 남인(南人)과 조식의 문인들이 주축이 된 북인(北人)으로 나뉘었고, 서인은 송시열을 따르는 노론(老論)과 윤증을 지지하는 소론(小論)으로 분당되며 사색당파를 형성했다. 흔히 '사색당쟁(四色黨爭)'을 대립과 갈등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붕당의 형성과 논쟁의 기본이 사사로운 이익의 문제가 아닌 성리학의 이해와 실현에서 발생하는 예학(禮學)의 해석적 차이에 있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 사진과 글의 무단 전재나 복사를 금합니다.
* 문의_문화재청 대변인실 (042-481-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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