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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궁궐의 현판과 주련-경희궁]
등록일
2011-03-14
주관부서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1723

 

 

 

 

경희궁慶熙宮, 지금에 이르기 까지

 

 

경희궁은 종로구 신문로에 자리한 이궁(離宮)이다. 서궐(西闕)·새문동(塞門洞) 대궐·새문안 대궐·야주개(夜珠峴) 대궐로도 불렀다. 원래는 인조(仁祖, 1595~1649년)의 생부 정원군(定遠君) 이부(1580~1619년)의 개인 주택이었으나, 이 곳에 왕기(王氣)가 서린다는 말을 들은 광해군이 그 기운을 누르려 1616(광해군 8)년 6월에 경덕궁(慶德宮)을 지었다. 인조반정(1623년) 이후 광해군 대에 지은 여러 궁궐들이 여럿 헐렸지만, 이 곳은 인조의 부친이 살았던 곳이라 헐지 않았다. 또한 이후 많은 임금들이 이 곳에 머물며 정사를 보았고, 특히 경종, 정조, 헌종등은 여기서 즉위식을 가졌다.
1760(영조 36)년에 경희궁(慶熙宮)으로 궁호를 바꾸는데, 이는 '경덕(敬德)'이 원종의 시호인 ‘공량경덕 인헌정목 장효대왕(恭良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의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1829(순조 29)년 10월 화재로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1831 (순조31)년 에 다시 중건하였고, 1859(철종 10)년부터 11년에 걸쳐 보수 공사를 진행했다.
원래 경희궁에는 정전(正殿)인 숭정전(崇政殿)을 비롯하여 많은 건물들이 있었으나, 이 가운데 융복전과 집경당은 먼저 없어졌고, 국권 피탈 무렵에는 숭정전(崇政殿), 회상전(會祥殿), 흥정당(興政堂), 흥화문(興化門), 황학정(黃鶴亭)만이 남아 있었다. 이 또한 일제에 의해 차례로 철거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 지어지면서 경희궁은 그 본래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황학정(黃鶴亭)은 1923년 사직단 뒤 활터로 옮겼고, 숭정전(崇政殿)은 1926년 남산 기슭의 일본인 사찰 조계사(曹谿寺) 본당으로, 흥정당(興政堂)은 1928년 광운사(光雲寺)로, 흥화문(興化門)은 1932년 남산 기슭의 박문사(博文寺)의 정문으로 각각 자리를 옮겼다.
일제는 1907년 궁의 서편에 통감부 중학을 세웠고, 1910년 이후 궁이 국유로 편입되자 1915년 경희궁 터에 경성중학교를 세우고 일본인 관리 자녀들을 교육시켰다. 광복 후에는 서울중고등학교가 자리 잡았으며, 1980년 서울중고등학교가 서초동으로 이전하자 현대건설이 다시 그 부지를 매입해 사용했다. 이후 서울시가 이를 인수, 1985년에 사적지로 지정하고 1988년부터 복원 작업을 시작했다. 『서궐도안(西闕圖案)』을 참고하고 예전의 기단을 이용해 숭정전·자정전·태녕전 등을 우선 복원했다.

 

 

 

 

 

경희慶熙의 뜻 풀이

 

‘경희(慶熙)’는 ‘경사스럽고 화락하다’는 의미이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궁궐의 현판과 주련 3]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 사진과 글의 무단 전재나 복사를 금합니다.
* 문의_문화재청 대변인실 (042-481-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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