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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어린이 문화재 박물관 ⑧] 들에서 노는 한 판 탈놀음, 야류와 오광대
등록일
2007-12-18
주관부서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1124
야류와 오광대는 영남 지방에서 놀던 탈춤입니다. 낙동강을 가운데에 두고서 동쪽인 부산 일대에서는 ‘야류’ 또는 ‘들놀음’이라고 부르고, 서쪽인 경상남도 일원에서는 ‘오광대’라고 불렀어요. 주로 정월 대보름 행사로, 정초에 각 지역 지신밟기, 동제 등과 함께 야류와 오광대를 즐겼지요. 탈춤은 장터, 마을의 절 마당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마을 구성원 전체가 참여하는 대동 놀이로 전해 내려왔어요. 그럼 우리도 탈춤판으로 들어가 볼까요?



닮은꼴 탈놀음



야류와 오광대는 서로 비슷한 점이 있어요. 다른 지방 탈놀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덧뵈기춤이 있다는 것이지요. 덧뵈기춤은 「양주 별산대놀이」나 「봉산탈춤」에서 선보이는 춤사위처럼 극적이지는 않지만 잔가락이 많아 무척 흥겨운 춤이에요. 반주는 꽹과리, 장구, 북, 징을 중심으로 한 타악기를 주로 사용하지요.

두 탈놀음은 내용도 비슷하게 짜여져 있는데, 말뚝이가 나와서 양반을 조롱하고 희롱하는 ‘양반장’, 무엇이든 잡아먹어 버리는 영노가 등장하는 ‘영노과장’, 온전치 못한 몸을 딛고 일어서서 해방의 춤을 추는 ‘문둥이과장’, 가정의 갈등을 그린 ‘영감, 할미과장’, 파계한 중을 조롱하는 ‘승무과장’, 그리고 ‘사자과장’과 ‘오방신장무’가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역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있어요.



푸지게 놀아 보자, 야류



야류는 우리말로 ‘들놀음’이라고 해요. 경상도 낙동강 동쪽에 속하는 부산광역시 동래, 수영, 부산진 등지에 전해 내려온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부산진의 들놀음은 없어졌고, 동래와 수영의 두 들놀음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하고 있습니다. 탈놀음 앞에 규모가 크고 화려한 길놀이가 있으며, 탈놀음 다음에는 다시 줄다리기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놀이판이 넓은 놀이랍니다.

「동래 야류」는 부산광역시 동래에 전해 오는 민속 탈춤이에요.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 앞뒤로 열리는데, 그 해에 풍년과 평안을 기원하는 놀이지요. 「동래 야류」는 정월 초순에 각 마을에서 꾸려진 농악대가 지신을 밟고 걸립을 해서 야류 공연에 쓰일 비용을 마련하면서 시작됩니다. 탈놀음은 해질 무렵 길놀이로 시작되는데, 이어서 학춤과 곱사등이춤 같은 갖가지 춤판이 벌어지지요. 이 때 구경꾼 누구나 탈을 쓰고 재주를 자랑할 수 있어요. 군무가 끝나는 새벽 1시쯤 본격적으로 탈놀음이 시작됩니다. 탈놀음은 ‘문둥이마당’, ‘양반마당’, ‘영노마당’, ‘할미마당’으로 짜여져 있으며, 여기에 쓰이는 가면은 대개 바가지로 만든답니다.

「수영 야류」는 낙동강 동쪽 지방에 전해 온 들놀음이에요. 정월 초순에 지신밟기를 해서 경비를 만들고, 보름날 낮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길놀이를 하면서 춤놀이를 펼치지요. 한밤중까지 신명나게 어울려 놀고 탈놀음을 한 뒤, 썼던 탈과 도구들을 모아 태우면서 고사를 지내요. 탈놀음에 쓰이는 탈은 주로 바가지, 마분지, 대소쿠리로 만듭니다.



양반을 꼬집는 오광대



경상남도 낙동강 서쪽 연안에 전해지는 탈놀이를 ‘오광대’ 또는 ‘오광대놀이’라고 해요. 오광대라는 이름은 ‘다섯 광대가 나와 오방의 잡귀를 물리치는 놀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하고, ‘다섯 마당으로 이루어진 놀이’라는 뜻이라고도 해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통영 오광대」, 「고성 오광대」, 「가산 오광대」랍니다.

「통영 오광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어요. 놀이를 시작한 시기를 1961년을 기준으로 70∼80년 전이라고 하는가 하면, 1900년경이라는 증언도 있어요. 또 전해진 경로에 대해서는, 창원에 사는 이군찬이라는 사람이 이화선 등과 더불어 「마산 오광대」를 놀았는데, 나중에 이화선이 통영으로 이사를 오면서 추게 되었다는 설, 1900년경에 이화선이 초계 밤마리에서 대광대패의 놀이를 보고 와서 전했다는 설, 통영 사람들이 마산에 가서 배워 왔다는 설 등 여러 가지랍니다. 탈은 바가지, 나무, 대나무 등으로 만들었는데, 요즘은 대부분 바가지탈을 씁니다.

「고성 오광대」의 시작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장이 있지요. 하나는 조선 말기 고성읍에 사는 가난한 선비와 서민층인 남촌파가 시조창과 농악을 즐겼는데, 1900년경 고성의 관속인 이순오가 사람들에게 탈놀음을 전했다는 설이에요. 다른 하나는 조선 말기 고성에는 이미 관아의 하인들이 놀던 탈놀음이 있었는데, 19세기 말에 남촌파들이 「마산 오광대」를 전수받아 「고성 오광대」를 완성시켰다는 주장이지요. 조선 말기에 사용하던 탈은 목수 김인찬이 만든 나무탈이었는데,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절망감에 바다에 던져 버렸다고 전합니다. 그 뒤로 물에 불린 마분지를 이겨 만든 종이탈을 쓰지요.

「가산 오광대」는 경상남도 사천시 죽동면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놀던 놀이예요. 조선 말기까지 조창이 있었던 곳이라고 해서 이 놀이를 「조창 오광대」라고 부르기도 했대요. 탈은 두꺼운 마분지나 창호지, 대소쿠리, 바가지 등으로 만듭니다.





「수영 야류」와 「고성 오광대」의 변천사

「수영 야류」는 수영 지역이 도시화되고 주민들의 지역 공동체 의식이 줄어들면서부터 변화를 겪었다. 이에 따라 음력 정월 보름날마다 하던 놀이를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하게 되었다. 또한 옛날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터에서 놀이를 펼치고 마을을 돌며 길놀이를 하곤 했지만, 상가가 빽빽이 들어서고 들판이 모두 주택가가 되면서 학교 운동장에서 놀이판을 벌이거나 길놀이를 빼게 되었다. 때문에 앞뒤 놀이는 생략하고 탈놀음만으로 공연을 하게 되는 일이 많아졌다.

창과 춤 또한 바뀌고 있다. 탈놀음에서 등장인물들은 본래 길게 읊조리듯이 말하는데, 요즈음은 평상시에 말하는 것처럼 한다. 이것은 놀이꾼들이 시조창이나 한시를 읊조린 경험이 없고 연희 시간이 짧아졌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 놀이꾼들이 몸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우면서 멋이 있는 춤을 추었던 반면, 요즈음은 놀이꾼들이 춤을 배워서 추기 때문에 딱딱한 느낌이 있다. 그러나 젊은 놀이꾼들이 「수영 야류」의 옛 모습을 지키고 지역 축제의 기능을 회복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은 높이 살 만하다.

「고성 오광대」의 탈은 세 번 바뀌었다. 「고성 오광대」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1960년에는 닥나무로 만든 종이탈이었다. 그러다가 오동나무로 만든 나무탈로 바뀌었고, 다시 종이탈을 쓰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무탈과 종이탈을 모두 쓴다.

춤은 처음에는 원양반과 말뚝이가 하는 춤 정도만 정해져 있었다. 그 밖에는 풍물을 들으면서 그때 그때의 느낌과 춤추는 사람의 재주에 따라 추었다. 지금의 「고성 오광대」 춤은 1960년대 중반 이후에 허종복이라는 사람이 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새롭게 정리한 것이다. 허종복은 종이탈을 나무탈로 새롭게 만드는 데 힘쓴 사람이기도 하다.



잔가락 | 노래의 짧고 급한 가락.

길놀이 | 본마당에 들어가기 전에 탈춤을 놀 곳까지 풍악을 울리면서 가는 행렬.

군무 | 여러 사람이 무리지어 춤을 추는 것. 또는 그 춤.

지신밟기 | 마을 사람들이 농악대를 앞세우고 집집마다 돌며 신령을 달래어 무사 안녕을 빌고, 집주인은 음식, 곡식, 돈 등으로 대접을 한다.

마분지 | 종이의 하나. 주로 짚을 원료로 만드는데, 빛이 누렇고 질이 떨어진다.

관속 | 지방 관아의 아전과 하인을 통틀어 이르던 말.

조창 | 세금으로 거둔 곡식의 수송과 보급을 위해 강가나 바닷가에 지어 놓은 곳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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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계절출판사에서 발간한 [어린이 문화재 박물관②]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과 사계절 출판사에 있습니다.

* 사진과 글의 무단 전재나 복사를 금합니다.

* 문의_문화재청 홍보담당관실 (042.481.4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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