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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 지정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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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원의 독음과 비교용례
작성자
원구단
작성일
2005-09-26
조회수
3532

원구단 지칭 중, 원의 독음에 대한 문화재 (명칭)변경지정예고에 따른 필자의 제기소견으로 제한된 분량을 감안, 별도 소견용으로 요약했습니다. 관련사진과 전문은 아래주소에 게재하여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宋東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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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圓地方' <원구단>과 무애유통 화폐
- '문화재 명칭 부여기준'을 위하여



「문화재청은 최근 사적 제157호 어떻게 표기해야 하나, "원구단"/"환구단"」이라며 문화재 변경지정을 예고했다. 변경예고 고시에 의하면, 『고종실록』에 전하는 바와 같이 “圜丘壇”으로 하고, 한글 표기는 『독립신문』에 따라 “환구단”으로 하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검토한 바, 각계의 의견을 듣고자 관보에 공고하여 예고하게 되었다 한다.

사안의 초점은 한글전용 <독립신문>에서의 '환구단'이라는 한글과 황제로서 고제를 지냈다는 <고종실록>을 예시하고 있다.



외형은 둥글고 가운데에는 네모의 구멍이 있는 모양을 탓하는 바는 제천의식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돌고 돈다는 돈에도 그 변용이 있어왔다. 이를테면 '돌고 도는 돈 이야기'는 한 때 유통한 圜이라던 화폐단위로의 지칭은 물론 그 모양에서도 '무애통화' 천원지방설이 어긋나지는 않는다. 원/환구단이든, 건원ㅁ상평통보로 흔히 상기할 수 있는 "엽전"에도 곧 둥글고 네모진 모양이 반영되어 있다. 대각국사 의천 역시 화폐유통을 건의하여 鑄錢官(주전관)이 설치(1097년)되나, '天圓地方'은 빠트리지 않은 듯 하다.



경성 전환국, 수입 일제동의 운송비 부담마저 절감하고자 인천으로 옮긴 인천 전환국 발행 코인, 이후 1901년 오사카 조페국 발행 코인들이 같은 가치ㅁ재질불문, 화폐단위는 [환/원]이고 한글 음가는 [원]이다. '환'과 '원'으로 화폐단위는 1905년 度支部 화폐단위 개혁으로나 환/원으로 거듭, 해방 후 화폐개혁에서도 화폐단위는 원과 환으로 체바퀴를 맴돈다.

고종 년간 1883년 경성 전환(원)국에서 발행한 화폐에는 圜이 [WARN] 이라는 영문과 일[원]이라 새김 단위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조폐공사 화폐박물관이 사이버상 제공하고 있는 1883년 주화에 보이는 문양은 꽃이 핀 '오얏나무'라 하고, 양가지가 동그랗게 원주 끝을 장식하는 가운데, 이례적인 문양도 돋보인다. 세로 '一圜'이라는 명문과 이를 원으로 감싼 내원이 접하고 있는 또다른 위의 작은 동심원의 묘사는 곧, 부각과 음각으로 음양과 각기 원으로는 흔히, 사상팔괘도를 설명하는 태극(圖說)이라 여겨진다.



더구나 동년은 乾坤坎離(건곤감리)ㅁ태극무늬를 국기로 정한 같은 해이기도 하여 더욱 이채롭다. 항간의 억측낭설, 이왕조 오얏나무 불문, 뒤집어 또다른 면을 확대하고 또한 거듭 돋보기로 보아도 어렴풋하여 확언할 순 없으나 두 쌍의 날짐승인양 하여 '쌍봉황문'인 듯 하며 원주에는 "大韓ㅁ(제조연도?)ㅁ원일(일원/한글) 1 WARN"이라 새겨진 글귀들은 선명해 보인다.

요컨대 대한제국으로 황제즉위와 더불어 재건되는 환/원구단이라는 점이며 이에, [환/원]에 대한 당대 한글새김이나 소리값을 명확히 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제천제단의 재건, <독립신문>의 '한글매체'에 의한 [환]이라 한 소리값에 앞서, 같은 자구에 대한 동시대에 어떻게 적기하고 있는 바가 시사된다. 한말 조선정부 경성 典圜局 발행의 주화에 의한 편년 또한 확인할 수 있는 한글명문으로 금석문이라 할까. 코인의 모양으로 보아 흔히 조선중기 이래 가장 오래도록 유통된 상평통보가 상기되는 가운데 네모진 方형은 사라졌다. 기존의 엽전 주조기법이 아니라 주조화폐에서 압인 화폐로의 변화양상이며 한글과 영문, 한문이 혼용되어 있다.



다시말해 <독립신문>에서의 [환]이라는 새김 값에 비해 [大韓○○○]의 명문과 동전에 보이는 한글[원]과 영문 [WARN]은 1883년 당시 새김으로 비교할 만 하다. 물론 이후 용산 전환국ㅁ인천 전환국ㅁ오사카 조폐국 코인에도 [원]이나 영문새김은 [WON]이다. 대한제국으로써의 광무원년 환구단에서의 의식과 개화파가 주도한 <독립신문>에서의 표식은 이로부터 10년 후에 도래된다.



한편 논외이긴 하나, 문화재 명칭에 관한 '생성초기'와 관련하여 부연해 두고자 하는 것은 통영과 미륵도는 뭍과 섬을 잇는 陸繫島로 현존 근대문화유산으로 '해저도로'가 그 대상였긴 하나, <통영지도>에서 보이는 '뚫을 착'(鑿) '착량교는 물론 동칭 '鑿梁廟'가 보인다. 물론 충무공 사당으로 임란 후의 지도이긴 하나, 이를 신뢰한다면 기왕의 해식동굴 상정이나 기왕의 갯가 사당으로서 전승가치는 충분한 고려대상이다. "통영해저터널"은 그 포괄성과 대표성을 지니기에도 여론수렴 이전 서둘러 진화한 감이 없지 않다.



요컨대 '환'이든 '원'이든 지정부여 문화재 명칭에 대한 '부여기준'에 대한 모호성은 '생성초기'인지 아님 항간의 통용/여론작명으로 비롯하여야 하는지, 그 일관성부터 선행되어야 할 일들이라 함께 부연해 보았다.



여론을 빙자하기에도 문화재 지정이나 심의는 보다 철들어야 할 환갑주년으로 보면, 문화재청은 변화하여 수용하는 추세는 인정될지라도 종래 '생성초기'라는 견해에 반해 본연의 원초적 진의나 도사리고 있는 원명을 도려내며 낙태시키는 산부인과일 순 없을 듯 하다.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듯이 지극히 그 연원이나 학술적 검증 그 객관성, 일관성부터 수렴하고 전제되어야 하며 보다 앞서는 단순 요지만으로 예고할 것이 아니라 보다 상세한 학술적 성과들이나 내력들로 보다 더 널리 이해되어졌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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