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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문화재답사기 ] 성흥산성으로의 짧은 답사이야기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07-01-03
조회수
3788
작성자 : 김주영님 [ 2006 문화유산 답사기 공모전 입선(15위) 수상작 ]

4월 15일 아침 일찍부터 나는 친구들과 성흥산성으로의 답사를 준비 하였다. 주말, 달콤한 휴식을 버리고 선택한 나의 답사는 그렇게 시작 되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며 성흥산성으로 가는 길마다 있는 벚꽃들이 나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성흥산성이 자리 잡고 있는 임천면에 도착했다. 차가 올라 갈 수는 있지만 우리는 성흥산성으로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에는 여러 개의 비석과 안내문이 있었다. 그 위로 쭉 올라가는데 너무 경사가 너무 심해서 힘들었지만 노랗게 핀 개나리를 보면서 친구들과 서로 이야기를 하며 즐겁게 올라 갈 수 있었다. 올라가는 길에서 옆으로 난 길이 있는데 그 곳으로 꺾으면 대조사로 갈 수 있는 길이 있었는데 내려오면서 가는 게 낫겠다고 하여 대조사를 뒤로 하며 쭉 올라갔다. 위로 더 올라가면 성흥산성 이라고 알려주는 큰 안내문과 서동요를 찍은 촬영지라고 하는 플랜카드가 걸려있다. 사랑의 결실을 이룬 곳 이라 해서 왜 하필 사랑의 결실을 이룬 곳 인지 궁금해 했는데 알고 보니 선화공주가 서동을 도망 시킬 때 은장도를 들고 위협하던 그 장소였다. 텔레비전에서 볼 때는 성흥산성에서 촬영한 장면인지를 몰랐는데 그런 사실을 아니까 왠지 신기했다. 성흥산성은 백제 동성왕 23년에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과 사비성을 지키기 위해 금강 하류 부분에 쌓은 석축 산성이다. 백제 때 쌓은 성곽 가운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이고,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돌계단을 올라가면 잔디밭이 넓게 펼쳐지고 의자가 몇 개 놓여있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는 아주 큰 나무가 있다. 얼마나 오래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무가 아주 굵고 커서 세월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다. 멀리서 보니 빈 하늘에 나뭇가지가 펼쳐져 있는 그 경관은 정말 이루 말 할 수 없는 장관이다. 또 위에서 아래가 훤하게 내다보여서 그런지 어지러웠던 머리가 금세 맑아지는 것 같다. 위로 더 올라가니 우리가 찾고 있던 유금필 장군의 사당이 나왔다. 유금필 장군의 원래 고향은 평산 이며 고려의 무장으로 태조를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되었다. 고려에서 개국공신으로서 공을 세운 유금필 장군의 사당이 백제의 성흥산성에 있다는 점이 의아스러웠으나 안내문을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유금필 장군이 백제에 잠시 들려서 빈민을 구제해 준 것에 백성들이 감읍하여 세워 준 것 이었다. 사당 앞에서 안내문을 잠시 읽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양복을 입은 나이가 지긋하긴 분들이 많아서 사당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서있었다. 근처에 계시는 할머니의 말씀을 들어보니 그날에 있는 유금필 장군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후손들이 각지에서 모인 것 이었다. 할머니께서는 제사를 지내러 오신 그 집안의 며느리라고 하시며 신라의 공주라고도 하셔서 이야기를 듣던 우리를 즐겁게 해 주셨다. 할머니는 제사를 지낼 때 모든 음식을 생(生)으로 한다면서 밥도 그냥 생쌀로 놓고 고기도 그냥 그대로 놓으며 야채도 삶지 않는 다고 알려 주셨다. 할머니께서는 밑으로 내려갈수록 생으로 된 제사 음실을 가지고 제사를 지낸다고 하셨는데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잠시 당황 했었다. 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 사당 밖에 있다가 우리 과의 대표가 종친들께 사진을 찍고 사당을 잠시 둘러봐도 되냐고 여쭈어 보았다. 흔쾌히 승낙해 주셔서 우리는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가까이에 있는 왼쪽 문으로 들어갔는데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고 나갈 때는 왼쪽 문으로 나가라고 하셔서 친구들 모두 다시 나갔다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갔다. 돌계단을 올라 여러 종친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제사를 지내려고 준비하는 바쁜 와중에도 우리에게 여러 가지 자세한 설명을 해주셔서 너무 감사 했다. 우리는 일단 할머니께 들었던 생것을 쓰는 것에 대해서 여쭈어 보았다. 예전에도 각지에서 모여서 제사를 지냈는데 그때는 여성들이 참석 하지 않아서 조리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생(生)으로 된 것을 그냥 썼었다고 말씀해 주셨다. 또한 다른 분께서도 야외에서는 생으로 쓰는 것이 예법이라는 것도 더불어 말씀해 주셨다. 제사상을 자세히 보니 사과와 배 같은 과일도 칼 하나 대지 않은 채 그냥 그대로 올려놓았고 배추도 통으로 놓았다. 우리에게 이것저것 알려 주시던 분께서 일렬로 쭉 서서 인사라도 드리라고 말씀하셔서 우리 문관과 일동은 모두 일렬로 서서 모자도 벗고 공수를 한 뒤 두 번 인사를 드렸다. 원래 절을 해야 하는데 돗자리가 없다고 하시면서 고개만 숙여서 인사 하라고 하셨다. 그 분께서 ‘배(拜)’ 라고 하시면 고개를 숙여서 인사하고 ‘흥(興)’ 이라고 하시면 고개를 들었다. 인사를 하면서 사진도 예쁘고 선명하게 잘 오게 해달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두 번 인사를 하고 말씀해 주실 것이 있다는 분을 따라서 더 위로 올라갔다. 그 분께서는 유금필 장군의 32대 손으로 우리를 위쪽으로 데리고 가서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뒤 따라서 가보니 밑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조그마한 사당이 하나 더 있었다. 원래의 사당은 더 위에 있는 것이었으나 공간이 너무 작아서 종친회에서 따로 돈을 모아 밑에 있는 큰 사당을 지었다고 하셨다. 최근에 지은 밑에 있는 것과 다르게 아주 조그마했는데 그곳에 있던 목상을 얼마 전에 도둑맞았다고 우리에게 한탄을 하셨다. 문을 보니 뜯어서 가지고 간 흔적이 남아있어서 목상이 도난당했음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그 목상은 유금필 장군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방석위에 놓여있었다고 했다. 유금필 장군의 후손들은 우리가 답사를 갔던 그 날 제사를 지내러 와서야 비로소 목상이 사라진 것을 알았다고 했다. 제사를 지내러 왔다가 사라진 목상을 보고 후손들은 깜짝 놀라서 경찰에 재빨리 신고를 했으나 찾기 힘들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소중한 문화재가 도난당했다 말을 들은 우리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목상이 가볍고 이런 사당에 있으니까 사람들이 돈이라도 될까봐 훔쳐간 것 같다고 말씀하시던 32대손의 모습이 더욱 씁쓸해 보였다. 종친회 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8일 마다 제사를 지낸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간 날이 마침 그 날이어서 우연찮게 제사에 관련된 많은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유금필 장군의 후손들을 만나 우리가 몰랐던 많은 이야기도 듣고 맛있는 것도 먹고 너무 좋았다. 12시에 시제를 시작한다고 하여 30분 정도의 여유가 생겨 잠시 사당 뒤쪽에 있는 정자로 올라갔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까 너무 현대적으로 만든 흔적이 많아서 실망했다. 정자로 올라가는 계단도 시멘트로 발려져 있고 난간도 모두 철물로 되어있어서 뭔가 조화롭지 못하고 올라가보니 바닥도 대리석이어서 황당했었다. 시멘트로 된 계단과 예쁜 단청 문양이 그려져 있는 정자는 정말 어울리지 않아서 올라가는 친구들이 모두 한 마디씩 했던 기억이 난다. 만들어 놓을 거면 최대한 현대적이지 않게, 우리 정자의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 있게 만들어 놓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너무 많이 불고 시간도 어느 정도 됐기에 시제를 보러 내려갔다. 마침 시제를 시작하려고 옷도 갈아입고 전국에서 모여든 많은 후손들의 이름을 호명하고 있었다. 제사 준비를 하시는 후손들의 배려로 우리는 사당으로 들어가서 시제를 볼 수 있었다. 여러 까다로운 절차로 시제가 시작되었고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무엇을 할지 제주가 정해주었다. 텔레비전에서 봤을 때는 격식을 엄격히 갖추어서 한 것 같았는데 우리가 본 시제는 격식이 그리 엄격하지 않았다. 모두 공수를 하고 있었는데 유난히 혼자 뒷짐을 지고 계시던 분을 보며 미소 지었던 기억이 난다. 또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안의 여성들이 밑에 자리를 깔고 앉아 있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지 아직도 내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다. 여성을 많이 위한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우리의 바탕에 깔려있는 고정관념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 같다. 후손들을 한명 한명씩 호명하고 순서를 정해 주는 것도 시간이 의외로 많이 걸렸다. 우리는 시간상 조금만 보고 폐가 되지 않게 조용히 사당에서 나왔다. 내려와서 넓게 펼쳐진 경관을 보면서 미리 싸온 김밥을 먹은 뒤에 정리를 하고 내려갔다. 대조사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은 올라갈 때 보다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내려가자 탐스럽게 핀 벚꽃이 제일 먼저 우리를 반겨 주었다. 벚꽃나무 바로 밑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천주교의 신부님의 수맥을 찾아주셔서 만든 우물이라고 한다. 불교사찰에 천주교의 신부님 수맥을 찾아 주었다는 것이 신기해서 자꾸 쳐다보게 되었다. 대조사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작고 아담한 절이었다. 몇 그루 있는 벚꽃나무가 아담한 절의 분위기를 잘 살려주어 조용한 산사의 고즈넉한 멋을 마음껏 느낄 수 있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보러 가기위해 올라가는 길에 큰 개가 한 마리 누워있었다. 어찌나 귀엽던지 우리 집에 있는 강아지 아롱이 생각이 나서 만져보고 싶었는데 의외로 무관심하고 경계심도 강해서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머리 위에는 네모난 관을 쓰고 있었는데 각 모서리마다 풍경이 달려 있었다. 연꽃 가지를 잡고 있는 오른손의 손가락이 두개 밖에 없어 보여서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도 컸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더 커서 깜짝 놀랐다. 하지만 커서 그런지 섬세한 면도 떨어지고 세부적인 묘사도 없어서 뭉툭하고 투박스러웠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자세히 보니 직접 가서 본 적은 없지만 교과서에서 여러 번 본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이 생각나서 서로 대조 해보기도 하였다. 안쪽으로 들어가서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석조미륵보살입상과는 다른 섬세함에 감탄했다. 우리의 답사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을 끝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대학교를 와서 처음으로 간 우리의 답사는 우리 스스로 계획하였다는 것이 뜻 깊었고 날을 잘 잡아서 특별한 경험도 해 볼 수 있어서 아주 좋았다. 또, 과제로 내주지 않았다면 찾아가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성흥산성에도 한 번 가보고 유금필 장군의 사당과 고즈넉한 산사의 아름다움을 맛 볼 수 있었다는 것에 토요일 하루의 시간을 보낸 것이 의미가 있었다. 비록 교통편도 복잡하고 올라가는 길도 힘들었지만 의미 있는 하루가 되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자주 있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여러 경험을 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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