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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재답사기] 통영답사기행-청마문학관과 세병관을 찾아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06-12-18
조회수
4230
작성자 : 최담원님 [2006 문화유산 답사기 공모전 입선(13위) 수상작]

버스에서 내리니 짜고 비린 냄새가 확 코에 덮친다. 일행들은 바다냄새라며 좋아하는데 바닷가의 신선한 갯내음에다 생선가게에서 나는 비릿함이 섞인 냄새이다. 눈앞에는 고기저장용으로 쓰일 얼음을 만드는지 얼음공장이 다가서 있어 이색적이다.

청마문학관은 망일봉 언덕에 통영항을 내려다보며 앉아 있다. 오르막으로 몇 발짝 옮기는 동안 고등학교 시절 외었던 청마 유치환의 깃발이란 시가 떠오른다.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이란 구절이 특히 마음에 들었었는데 이곳에 와보니 그냥 이곳을 묘사하노라면 그런 시가 되겠구나 싶다. 그럴 정도로 시의 정서와 통영항의 모습은 닮아있다. 아니면 답사여행에 나선 내 마음의 설렘이 청마의 ‘깃발’이란 시를 쓸 때의 마음일랑 같아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청마문학관 해설사가 우리 일행을 맞이하여 문학관 들머리의 통영항 그림과 그 위의 빛바랜 사진 한 장에서부터 청마문학의 배경으로서 통영의 예술적 환경에 대하여 설명해 준다. 동양의 나폴리란 애칭으로 불리는 통영항. 예향이란 바로 통영의 이칭일 정도로 문화예술인을 많이 배출한 것을 자랑으로 삼는 따뜻한 남쪽의 항구도시이자 한려수도(閑麗水道)의 수도(首都)이다. 해설사가 가리키는 사진은 해방직후 통영의 젊은 문예인들이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하여 찍은 사진이다. 1945년의 사진이라 얼굴의 형체도 구별하기 힘든 한 장의 커다란 퍼즐과 같은 모습이다. 그래도 그 사진 속에 청마와 김춘수 시인과 윤이상 작곡가 전혁림 화백 들이 있으니 얼마나 귀중한 자료인가? 모두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어 전국적으로 나아가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인물들이다. 해설사는 지역인구 대비 문화예술인의 구성비가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자랑이다.

청마문학관은 청마의 생애와 문학에 대한 해설, 그리고 원고와 편지문 등 자료를 전시하여 청마문학에 대해 생생한 이해와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청마의 생애와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이 등장하는 게 이영도시인에게 보냈던 청마의 연서 이야기다. 흔히들 플라토닉러브의 전형이라고도 말하는 청마의 이영도시인에 대한 5,000통이 넘는 연애편지 사건. 무엇이든 넘치면 모자람만 못하고 어떤 것이 아름다우려면 제 자리에 온당한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 법인데 상실과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강건한 한 시인의 특별한 연모의 정을 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 일행 중의 여성분들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아무리 문학인이라 하지만 자기 부인을 두고 다른 여인에게 15년 동안 연서를 보냈다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같은 여성인 해설사는 그런 질문이 있을 걸 예상이라도 했던듯 태연하게 받아넘긴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면도 있겠지만 청마선생님은 한번도 도덕적 선을 넘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예술혼의 갈증이란 면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부인께서도 이런 사정을 이해하여 이영도시인을 초대하여 세 분이서 함께 식사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청마에겐 이영도에 대한 연모가 자신의 필연적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청마의 부인이 이것을 용납했다는 것은 지금의 기준으론 잘 이해하기 힘들다. 이것의 이해를 위해서는 여성들의 이혼과 이혼 후 생활이 힘들었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도 감안해야 할 수도 있다. 어쨌든 부인을 두고서 다른 여자에게 15년 동안이나 연서를 날렸던 것은 청마의 선택이고 그런 청마를 떠나보내지 않고 안아 주었던 것은 청마 부인의 선택이었다.

청마문학관에는 청마선생의 실형인 극작가 동랑 유치진 선생에 대한 자료도 일부 보인다. 현대문학의 도입기에 한 분은 시로 한 분은 극작가로서 우리 문학의 밭을 일구었으니 그 기여와 영광이 크다. 하지만 근래 두 분 다 친일문학의 혐의를 받았고 동랑은 끝내 친일문학인으로 낙인 찍혀 그 후손들이 통영땅을 떠나고는 다시 뒤돌아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해설사가 청마선생의 팬이어서인지 청마선생이 친일문학이란 혐의를 받은 것만으로도 분개하여 그 해명에 열심이다. 청마가 만주에 있을 때 쓴 시중에 “비적의 머리 둘이 걸려 있다”라는 싯귀가 문제가 되었는데 이는 진짜 만주 비적을 말하는 것이지 조선독립군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어보니 과연 청마에 대한 친일문학의 혐의는 근거가 약하다.

과거지사는 오늘 반성의 거울로 삼을 뿐 그로 인해 또 다른 원한을 만들지 않도록 신중하고 정확하게 진행되었으면 좋겠다. 또 이런저런 오늘의 사정에 빗대어 과거 청산작업과 친일문학 규명을 백안시하는 태도도 편협하다. 친일문학 규명을 위해 노력하는 분들과 친일문학 혐의 당사자 및 그 유족들에게 함께 권하고 싶은 말이다.

청마문학관 바로 위 언덕에 청마 생가인 유약국을 복원해 놓았다. 초가지붕에다 나무와 황토로 지은 초가집 두 채인데 사람들이 놀란다. “약국집이라면 부자였을 텐데 이것밖에 안돼?” 하며. 그래도 곰곰이 뜯어보면 옛 모습을 잘 재현해 놓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우리땅 어디에 갖다 놓아도 잘 어울릴 초가집이면서 내부의 개화기 약국 정경이 잘 나타나 있다. 원래 생가는 시내 태평동인데 복원할 공간이 없어 문학관과 함께 이 곳에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옹기종기 떠있는 섬들로 둘러싸여 호수같은 통영 내해에 배들이 어우러져 초등학교 운동회를 하는 듯하고 밝은 햇살 아래 푸른 바다빛이 나그네 눈길 아래로 부서진다. 버스는 청마문학관을 나와 청마가 있던 이문당 서점 건물과 그 뒤로 청마가 영도에게 엽서를 보냈던 우체국 앞을 지나 세병관으로 향한다. 우체국 앞의 거리를 청마로라 한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하늘이 환히 내려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청마 시 <행복> 중에서-

청마와 우체국은 그 때나 지금이나 이렇게 행복한 관계를 맺고 있구나.

청마거리를 옆으로 하며 세병관으로 가는 도중 해설사는 대로에서 골목으로 들어간 기와집을 가리키며 얼마 전에 작고한 국민애송시 ‘꽃’의 시인 김춘수의 생가라고 한다. 통영시 또한 시대의 변화와 함께 새 건물들이 들어서며 꾸준히 바뀌고 있지만 그래도 옛날 식 건물의 모습과 골목 흔적이 많아 남아 있어 여느 지방도시와는 다른 정감과 격조를 풍기고 있다. 이런 도시 전체의 모습과 분위기가 개개의 문화재를 뛰어넘는 더 중요한 살아있는 문화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병관은 통영시 문화동 여황산 자락 언덕 위에서 통영 앞바다를 두 팔로 안듯이 지키며 장중한 모습으로 서있다. 근래에 지어진 망일루(望日樓)와 잘 정비된 석조 계단을 오르다보면 오른쪽으로 세병관 안내판이 서있다. 어딜 가나 느끼는 거지만 안내판을 보다보면 일행보다 뒤처지기 일쑤이다. 오늘이야 단체답사라 문화유산해설사가 안내를 해주니 안내판을 굳이 볼 필요는 없으나 그래도 안내판은 안내판대로 읽을 의미가 적지 않은 법이니 함께 읽어보는 답사의 모습으로 발전하길 기대해 본다.

세병관은 객사건물이다. 조선시대에는 어느 지역이나 중앙관이 파견되어 통치하는 곳에는 객사건물이 있었다. 오늘 통영이란 이름은 조선시대의 통영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영이란 뜻의 통영이 바로 이 바닷가 지역이었던 것이고 통영의 주권이 나라님인 임금에게 있음을 밝히는 건물이 객사이다. 객사에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그곳 관장에 의해 임금에 대한 망궐례가 이루어지고 관의 행사와 손님맞이가 이루어졌다. 특히 세병관은 통영의 객사라 세병관 아래에서 열병과 같은 대규모 군사행사도 열렸다고 한다. 객사의 건물이름은 대체로 그 지역의 옛 이름을 따 짓는 경우가 많았으나 세병관은 좀 예외적인 경우이다. 세병관(洗兵館)이란 이름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세병마행(洗兵馬行)’에서 따왔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 병기와 말을 씻는다란 뜻이니 오랜 왜란 후 평화를 갈망하던 당시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이름이다. 세병관 정문 또한 지과문(止戈門)으로 창들기를 멈춘다란 같은 뜻의 이름이다.

세병관 건물은 건물 자체로도 가치가 높다. 경복궁 경회루, 여수의 진남루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 중 하나이다. 특히 여수 진남관과는 쌍둥이처럼 비슷하다. 국보 304호인 여수 진남관은 건물 기둥이 68개로서 통영의 국보 305호 세병관보다 규모에서 더 크다.(세병관의 건물 기둥수는 50개) 그러나 세병관은 제6대 수군통제사이던 이경준이(이순신 장군이 초대 삼도수군통제사) 1604년에 통제영을 이곳 두룡포로 옮기며 지은 것으로 더 오래된 건물로서 가치가 있다.

평화는 나에게 힘이 있고 국방에 대한 잘 준비가 되었을 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건물을 보면 그런 의지가 드러난다. 건물의 규모를 단순하고 크게 한 것에서 엄숙함과 위엄을 느끼고 분발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건물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면 통영 앞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어떤 바다에서의 움직임도 이곳에서의 관찰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러면서 세병관은 조선의 수군과 백성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수군은 수군대로 세병관으로 상징되는 통제영의 기세를 업고 불퇴전의 국방의지와 사기를 얻었을 것이며 백성들은 그런 수군의 태세에 믿음을 주고 안심을 얻었을 것이다.

답사여행에서 상상의 몫은 크다. 상상하는 답사를 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나는 세병관 마루에 앉아 통영 앞 바다를 바라보며 사백년전의 통영 모습을 그려본다. 이순신장군과 그의 수군이 지켰던 바다! 그 바다를 다시는 넘보지 않게 하기 위하여 민관이 하나로 뭉쳤을 그날의 통영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다. 때마침 오월의 따가운 햇살을 식혀주는 세병관 큰 현판 글씨처럼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통제영, 즉 통영은 군사조직이면서 동시에 직할 지역의 행정까지도 맡았기에 통제영 아래에는 6방으로 나누어진 관헌 조직과 13공방이란 물자를 생산하고 공급하는 조직이 있었다. 통영이 가지고 있던 수많은 공방과 장인의 맥이 이어져 오늘날에도 갓, 나전칠기, 소목장 등은 통영의 것을 제일로 치게 되었다 한다. 유명한 통영자개장이 그저 생긴 것이 아님을 통영땅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답사여행은 이후 문화동 벅수도 만나고 통영대교를 지나 미륵도를 일주하며 한나절 이루어졌다. 짧은 하루의 답사여행이라 많은 걸 볼 순 없었지만 통영의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그 속에 배어있는 깊은 역사의 향기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주어진 시간이 짧은 걸 원망하며 다음엔 충분한 시간을 갖고 오기를 기약할 밖에.

오늘 답사에서는 특히 오래된 문화재 뿐 아니라 청마문학관과 같은 가까운 과거를 온전히 안아 본다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는다. 통영에는 이미 윤이상 음악관이나 전혁림 미술관, 남망산의 국제조각공원과 같은 훌륭한 문화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한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후대의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남게 될 것이다. 가까운 역사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가 이를 잘 보존할 수 있을 때 세월을 뛰어넘어 통제영 시절의 세병관과 충열사, 한산도와 같은 역사유적지가 과거가 아닌 현실 감각을 지닌 채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

옛 이름을 찾은 통영. 통영은 섬들로 인해 행복하고 섬은 낳아준 바다로 인해 구원받았다. 통영을 찾은 나그네도 통영 앞 바다의 한 개 섬이고 싶다. 혼자 살아도 호젓하게 넉넉한 섬이 되어 어머니인 바다에 보답하고 벗들과는 내 것 네 것으로 다투지 않으며 무시로 어울려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으로 영원히 남을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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