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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재답사기] 천년의 뜨거운 숨결을 가진 경주를 다녀와서...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06-12-13
조회수
3650
작성자 : 최담원님 [2006 문화유산 답사기 공모전 입선(12위) 수상작]

한국전통문화학교 신입생으로써 가보는 첫 답사! 감회가 새로웠다.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답사라는 경험을 해보는 것이 설레 였다 그리고 선배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역시 한국전통문화학교는 학교 명칭에서부터 느껴지듯이 답사 전문가인 교수님이 많으시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답사 하면 떠오르는 책! 유홍준 현 문화재청장님께서 쓰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정말 좋아하는 나였고 몇 번을 거듭하여 읽어본 책이 여서 답사에 대한 기대를 더욱 키웠다.

답사지는 경주! 신라의 천년 수도였다. 나는 이전에 경상도 땅을 한 번도 밟아 보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경주는 아직 나에겐 신성한 신라의 역사와 문화가 서린 신비의 공간 이였다. 답사 전날 드디어 중간고사도 끝났고, 시간이 한가해 졌는데 앗! 내가 할 일이 있었다. 답사 사전자료조사를 석굴암 석굴에 관해서 했는데 내가 어쩌다 자료 발표라는 것을 자진해서? 한다고 해서 그것에 대한 준비를 해야 했다. 석굴암에 대한 자료가 뭐가 있을까? 생각 하다가 예전에 KBS 역사스페셜에서 방영했던 석굴암에 관한 영상을 두 편을 보았다. 모두 답사자료집에는 없는 내용이었고 흥미로웠기에 발표 자료로써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중간에 우리과인 전통미술공예학과 최공호 교수님께서 오셔서 석굴암의 석굴은 설명보다는 사람의 마음과 신라인들의 얼이 새겨져있는 석굴과의 교감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셔서 혼자 ‘어떻게 하면 석굴암 석굴에 관한 발표를 간결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거의 12시에 자긴 했지만 요즘 들어서 제일 일찍 자는 축에 들었기 때문에 다음날 일찍 일어날 수 있었다.

난 첫 답사라 이것저것 챙기지 않아도 될 물건들을 챙겨 큰 가방에 넣어 낑낑 거리며 운반을 했는데 친구들 모두 간편한 작은 가방에 물건들을 다 챙겨 가고 있었다. 역시 답사란 간편한 복장과 마음가짐이 좋은 것 같아 보였다. 속속 사람들이 약속장소인 곳에 모이기 시작했고, 곧 우리 학교버스인 일명 ‘문화버스’를 탔다. 예정대로 버스는 8시에 출발했다. 총 6개 학과 중 우리과인 전통미술공예학과와, 문화재 관리학과, 전통조경학과가 함께 경주행 버스 타고 따뜻한 봄 햇살을 받으며 신나게 달리기 시작 하였다. 버스 안에서 나른한 봄 햇살이라는 약에 취해서 몽롱한 꿈을 꾸며 시간을 보냈다. 간간히 눈을 뜨면 보이는 연분홍, 흰색, 연두색, 연 노란색등 푸른 봄빛의 향연이, 학교에서 그동안 무언가 꽁꽁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따뜻하게 열어 주었다. 버스는 우리 학교가 있는 부여를 벗어나 대전광역시쯤까지 가서 경부고속도로로, 동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약 두 시간 쯤 지나서 휴게소에 들렸을 뿐 우리의 문화학교 버스는 첫 답사일정의 목적지인 옥산서원으로 쉬지 않고 달렸다. 눈을 떴을 때 이미 도착해버린 그곳! 옥산서원으로 걸어가면서 계곡을 따라 연두색 빛 봄빛이 나뭇잎 사이사이에서 물결치고 있었다. 옥산서원은 조선 중종 때의 성리학자로서 “조선 5현”의 하나로 추앙받고 있는 회재 이언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라고 한다. 전통조경학과에 친구 한명이 앞에 나와서 간단하게 서원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조경학 적으로 옥산서원은 4개의 명산이 에워싼 명당에 자리 잡고 있고 5대(臺)로 불리는 반석이 계곡을 꾸미고 있는 4대 5산의 경승지라고 소개를 했다.

정말 그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서원 바로 앞에 있는 계곡의 물과 아름다운 바위들, 그리고 외다리와 폭포수가 어우러진 경관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우린 일단 서원 앞 계곡물을 바라보며 간단하게 도시락을 먹었다. 그 후 서원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문화재 관리학과 교수님께서 옥산서원에 대하여 설명과 함께 문화재 관리학적 측면에서의 서원건물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다. 특히 서원에 들어가자마자 심어놓은 나무들이 향나무인데 향나무를 심음으로서 향을 맡고 성스러운 기운을 본받고자 했다는 것과, 대원군의 사원 철폐 때도 47개 사원 중 하나로 살아남았다고 한다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한편 교수님께선 서원을 보수하면서 여러 군데에 시멘트를 발라서 처리를 했는데 그런 자국들이 문화재 보수 측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사원을 다 둘러본 후 서원 앞 계곡에 놓인 외나무다리를 건너서, 쭉 시원스럽게 펼쳐진 도로를 따라 걸었다. 좌우로 뻗어있는 투명하게 푸른 산들과 맑은 하늘, 눈이 부셔서 눈을 잠시 감아 공기를 한 사발 쭈욱 들이켰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독락당이란 곳이었다.

그곳 앞에서 조경학과 학생의 설명이 있었다. 독락당은 “혼자 즐겁다”라는 뜻을 가진 건물로서, 회재 이언적이 정치적 시련기에 운둔하며 지내던 폐쇄적이고 은밀한 공간이라고 했다. 또한 독락당은 터와 채를 낮춤으로서 폐쇠성과 은둔성을 지닌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집 구조와는 달리, 치열한 자기 성찰과 발전을 위한 공간이었다는 설명이다. 설명을 듣고 난 후 집을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대문간에서 시냇가로 나가는 길을 따라 걸어갔는데 담과 담 사이의 길 폭이 좁았다. 담장 끝에 다다르자 담장을 옆으로 시원스러운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때 한눈에 보이는 것은 이언적이 직접 지었다는 계정의 모습이었다.

아! 바로 이게 그 건물이었구나! 내가 몇 해 전에 처음 본 사진에 바로 계정 이었나보다. 그때 나는 이 한옥을 만든 사람과 그 곳에서 사는 사람이 참 부러웠다. 바로 자연과 벗하는 삶이 건축으로 나타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계정에서 발걸음을 띄기가 어려웠다. 그 덕에 정작 독락당의 모습을 잘 보진 못했지만 이언적이 단순히 독락당의 건물들을 폐쇠적으로 내밀하게 은둔하려고 지었다 기 보다는 오히려 자연을 가까이 하며 자신의 내면의 정신세계와 학문의 도를 잘 가꾸었을 것이라고 느껴진다. 독락당을 뒤로 하고 오늘 마지막 답사일정 목적지인 양동마을로 향했다.

약 30여분을 달려 우린 양동마을에 도착하였다. 입구 길에서부터 펼쳐진 초가지붕들과 기와지붕들이 야트막한 산 이곳저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꼭 영화의 세트장을 보는 느낌, 혹은 한국 민속촌에 와 있는 느낌이 너무 들었다. 주차장 앞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양동마을 지도를 보면서 양동마을에 조사자인 전통조경학과 학생의 설명을 들었다. 중요민속자료로써 한국 최대 규모의 대표적 조선시대 동성취락이라고 하는데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의 양 가문에 의해 이루어진 마을인데, 이언적을 배출하기도 한 마을이라고 한다. 또한 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하인들의 주택은 양반가옥을 에워싸고 있는 물(勿)자 형태의 마을을 형성한다고 설명하였다.

마을 사이사이에 난 오솔길, 산길, 밭길, 담장 길을 따라서 걸었다. 우리가 한복만 입고 있었다면, 길 중간 중간에 보이는 차와 전봇대만 없었다면 우리는 조선시대 그 시절로 돌아갈 것만 같은 느낌이 났다. 몇몇 가옥을 제외한 대부분의 가옥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 내 꿈은 언젠가 커서 꼭 한옥의 집에서 사는 것이었다. 그래서 양동마을에서 한옥을 갖고 사시는 분들이 부러웠는데, 한편 한옥이 주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한옥을 지키고 사시는 분들의 마음도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집은 집이 아니라는 말이 생각났다. 집안에 사람의 손길이 닿았을 때 그때야 비로소 집의 느낌이 살아난다는 것. 양동마을 안에서도 사람이 사는 집과 사람의 살지 않은 집은 느낌이 달랐는데 사람이 사는 집은 꼭 집 자체에 따뜻한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나와 몇몇 친구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기와집에 들어갔다. 따뜻한 날씨에 하늘 바람이 부는 오후,,, 나른한 몸을 뉘이고 싶었다. 신발을 벗고 대청마루에 누웠다. 꼭 보이지 않는 손이 내 눈꺼풀을 눈에 덮으려고 하는 것처럼 잠이 들었다. 한 20여분을 모두 천장을 보면서 아지랑이가 꼬물거리는 봄기운을 이불삼아 마루위에 대(大)자로 누웠다. 자연그대로 휘어진 소나무의 모양을 살린 기둥들과 대들보가 조선시대에 지어져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것이 신기하였다. 오늘날 많은 건축물들이 과학적으로 지어졌다지만 겨우 20년도 못 넘기고 철거되는 현실을 보았을 때 조상들의 ‘자연과 어우러진 과학’의 지혜는 우리의 지식으로 따라갈 수 없는 참 지혜였다.

아기자기하게 연한 빛깔의 들꽃들이 피어있는 길섶을 따라서 난 길 위에서 수면제 같은 공기를 마시며 양동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어느 초가집에 들어가 할머니께서 직접 만드셨다는 약과도 사서 먹었다. 달지 않으면서도 은은히 느껴지는 쌀엿의 맛을, 보이는 것이라곤 초가지붕의 누런 볏짚과 기와지붕의 부드러운 곡선뿐인 이곳에서 약과를 먹는 기분! 조선시대에 살았다는 선조들도 지금 나와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화장실이 있어서 들어갔는데 ‘푸세식’이었다. 냄새가 나지 않을까 했었는데 나무로 지어지고 바람도 잘 들어와서 꽉 막힌 현대식 화장실 보다 더 좋았다.

우리 일행이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회재 이언적이 경상감사로 있을 때 중종이 지어 줬다는 향단이라는 한옥건물이었다. 이 건물 안의 구조가 정말 독특했는데 그 건물구조에 대하여 왜 그렇게 만들어 졌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다룬 다큐멘터리로 본 기억이 났다, 그 내용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독특한 구조 속에서도 공간을 활용하는 조상들의 지혜에 감탄했던 일이 있었다. 양동마을을 크게 한 바퀴 돌면서 가옥의 구조는 초가집이나 기와집이나 거의 비슷하다라고 생각했는데 향단의 개성적인 가옥구조를 보고 내 편견이 깨끗이 사라졌다. 만약 향단이란 가옥을 마지막으로 들려보지 않았다면 정말 후회할 뻔 했다는 생각을 혼자 해보았다.

드디어 첫 답사 첫날 일정을 모두 마친 우리 전통문화학교 학생들은 보문단지 안에 있는 콘도에서 짐을 풀었다. 처음 와보는 경주에서의 첫밤! 다른 친구들은 그전에 수학여행으로 여러 번 와본 적이 있었다지만 나는 아직도 여기가 신라의 천년도읍 경주가 맞는지 믿기지 않았다. 첫날 답사 일정이 모두 즐겁고 알차게 끝난 것 같아 너무 뿌듯했다. 둘째 날 일정표대로 7시까지 일어나서 모두 아침을 먹고 첫 번째로 향한 곳은 괘릉 이였다. 신라 38대왕인 원성 왕릉을 다른 말로 괘릉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가 무덤 지는 명당이었지만 원래 연못이 있던 자리였기 때문에 습기가 많아 그냥 묻을 수 없어서 관을 걸었다고 한다. 그래서 걸 괘(掛)자를 써서 괘릉이라고 부른다라고 한다는 것이 자료를 조사해 온 전통조경학과친구의 설명이었다.

괘릉 앞에는 석사자 2쌍과 문인석, 무인석 각 1쌍이 대칭으로 배치되어있는데 그 개성적인 균형감과 독특한 동작들이 인상 깊었다. 우리과인 전통미술공예학과의 조각 전공교수님이신 김준교수님께서 각 석조물 앞에 서서 그 모양의 특징과 조각적 예술성에 대하여 설명해 주셨다. 교수님께서는 무인석에서 보이는 서역인의 얼굴과 복장, 그 허리의 독특한 균형감, 일명 S라인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게 표현되었다고 하셨다. 문인석에서는 중국 당나라 사람이라는 것이 얼굴 형태와 수염, 그리고 복장에서 느껴진다고 하셨다. 또한 석사자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굵고 힘찬 생동감과 힘, 한 쌍은 앞에서 고개를 45°각도로 돌리고 있는 천진스러움이 모두 조화를 이루어 신라 예술의 독창적인 면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괘릉 무덤 가까이로 가보니 봉토 주변으로 둘레돌을 둘렀는데 자세히 보니 십이지신상이 부조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묘를 한 바퀴 돌면서 열두 동물을 모두 볼 수 있었는데 모두 무인의 복장을 했지만 동물 각자의 개성 있는 얼굴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었다. 난 그중에서 나와 우리 가족의 띠인 토끼, 돼지, 용을 찍었다. 괘릉을 떠나서 우리가 향한 곳은 안압지였다. 한국 조경사에서 통일신라시대 원지(園池)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그곳. 신라의 역사를 배울 때 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그곳. 들어가기도 전부터 마음이 들떠있었다. 도로에 핀 노오란 유채꽃이 하늘거리는 거리 옆으로 안압지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안압지 소개 표지판 앞에 서서 조경과가 준비한 마지막 발표인 안압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문무왕 때 못 서편에 동궁(東宮)이 건립되었는데 안압지는 동궁에 속해 있던 못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은 나라의 경사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연회를 베풀었던 곳이라고 한다. 친구의 설명이 끝나고 우린 안압지내 관광안내인을 따라 안압지로 물을 공급했다는 통로였던 정화조로 갔다. 그곳에서 안압지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안내인의 설명이 끝난 후 친구들과 함께 안압지 호수 주변으로 난 길을 걸었다. 아름답게 꾸며놓은 나무들과 호수, 건물의 배치가 자연과 조화를 깨지 않으면서도 과학적인 원리로 지어져 있는 신라시대 조경이 어땠는지 지금 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바람이 한들거리고 모든 봄의 꽃들이 화사하게 만개를 하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날. 언어라는 것으로 우린 생각하고 말하지만 이런 날씨를 그냥 “날씨 좋다.”라고 할 수밖에 없음이 안타까웠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이 기분. 첫 답사가 어떨까 많이 기대했었지만 정말 날씨부터 해서 모든 것이 완벽 하리만큼 좋았다. 안압지의 그림 같은 경치를 뒤로 하고 우리가 간곳은 경주 박물관이었다. 정문을 통과하고 제일 처음 본 것은 성덕대왕신종이었다. 그동안 숱하게 많이 들었던 종에 얽힌 전설과 에밀레종이라고 불리게 된 유래들 등... 성덕대왕신종을 보고 있다는게 정말 영광스러웠다. 종에 새겨져 있는 비천상의 가녀린 몸이 꼭 금방 하늘에 올라갈 것만 같은 모습으로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모두들 경주 박물관 앞에서 모여 문화재관리학과 학생이 준비해온 간략한 박물관 소개를 들은 후 각자 흩어져 본격적으로 박물관 내를 둘러보았다. 처음으로 안압지관을 택해 들어갔다. 안압지관은 안압지와 그 서 · 남쪽 건물터를 발굴하여 수습한 3만 여점의 유물 가운데서 예술성이 뛰어난 명품 700여점을 선별하여 전시해 놓은 곳이었다. 특히 전시물들은 고분출토품과는 달리 통일신라시대의 왕실과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실생활 용품들 이었다. 전시실의 유물들은 어디서 많이 보았음직한 유명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전시물들도 많았다. 특히 그중에서도 14면짜리 주사위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사진으로도 찍어서 가지고 있는데 14면 각각 면에 벌칙을 새겨서 주사위를 던지면서 유희를 즐길 수 있게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얼굴 간지럽혀도 꼼짝 않기, 술을 다 마시고 크게 웃기, 스스로 노래 부르고 스스로 마시기 등, 요즘과 비슷한? 방식으로 놀이문화를 즐기고 있었다. 1층에는 조심스레 맞추어진 나무배가 전시실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난 그 배가 안압지 호수에서 물위에 띄워진 모습을 상상하며 보았는데 신라인들의 풍류가 얼마나 화려했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다음으로 간 곳은 특별 전시실이었는데 ‘신라의 사자’라는 주제로 전시를 하고 있었다. 나에게 사자는 난폭하고 잔인하게 동물들을 죽이고 초원의 왕으로 군림하는 육식동물이란 편견이 있었다. 하지만 신라시대에 사람들은 사자가 친근하고 사람과 가까운 존재로 여겼나보다. 사자 모양의 석조물이나 부조, 그림들, 사자가 새겨져 있는 공예품들을 보면 사자들이 어딘지 모르게 어리숙하고 천진난만하게 보인다. 꼭 18세기경 조선민화에 나오는 호랑이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고고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유물이 있다면 역시 신라 금관과 금제 장식, 그리고 수많은 토우들이었다. 내가 실기시간에 신라 토우를 이용한 도자기를 만든 적이 있는데 그때 생각했던 토우들의 모습보다 더욱 다양한 모습을 한 토우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동작들도 표정들도 모두 자유스러웠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또한, 1500년 된 닭 알을 보았을 때는 거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경주 박물관에서 시간에 쫓겨 천천히 음미하고 보지 못한 많은 전시품들은 다음기회를 기약하였다.

답사 두 번째 날 마지막 코스는 남산등반! 답사 오기 전부터 이번 답사의 최대의 난코스라는 소문에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포기를 선언한 친구들도 있었다. 일단 우리과 친구들이 남산 곳곳에 있는 불상들에 대한 설명을 담당했다. 그래서 우리는 설명하는 사람들과 함께 등반하며 산길을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코스는 삼릉을 지나 마지막을 배리 석불 입상으로 장식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남산에서 처음으로 본 불상은 석조여래좌상이었다. 머리가 없는 상태의 불상이었다. 법의의 주름과 매듭이 몸통에 새겨져 있는데, 특히 매듭은 우리나라만의 특징적 장식품으로써 신라시대부터 매듭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된다고 한다. 그 뒤로 자연석의 색으로 인해 붉은 입술이 있는 마애관음보살상, 선각을 이용해서 꼭 바위에 힘찬 그림을 그린 것 같은 선각육존불, 얼굴이 반 정도 잘린 상태에서 시멘트로 잔인하게 복원해버린 삼릉계석불좌상, 남산에 있는 거의 유일한 고려시대의 작품인 선각여래좌상, 힘든 산행의 마지막을 장식해준 마애석가여래좌상은 난코스를 해치고 올라온 보람이 있었을 만큼 그 조각적 예술적 감각기 뛰어난 작품이었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들른 배리 석불 입상은 원래 같이 붙어 있던 삼존불이라고 하기엔 한눈에 공감이 안 갔지만 각자 나름의 섬세한 미를 볼 수 있었다. 산 하나 자체가 박물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라인들에게 과연 불상을 만드는 것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해 볼 수 있는 뜻 깊은 산행이었다.

둘째 날은 불국사 바로 앞의 유스텔에 묵게 되었다. 친한 친구와 함께 밤에 산책을 하는데 곧 부처님 오신날 이어서 그런지 형형색색의 오색 연등이 거리를 빙 둘러 켜져 있었다. 동화의 세계에 빠져 꿈꾸는 것이란 착각이 들만큼 연등들은 하늘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다음날 답사 세부일정표를 보니 석굴암을 5시에 출발하여 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친구들은 모두 서둘러 자는데 나는 석굴암의 설명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자료집을 토대로 해서 내일 발표할 내용을 요약했다. 따르릉― 하는 핸드폰벨 소리에 일어나 보니 시간은 5시 8분. 내가 늦잠을 자버린 것이다. 바로 일어나 부리나케 준비해서 버스로 뛰어가는 데는 거의 2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로 인해 모든 학생들이 이동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미안하였다. 새벽공기를 가르며 우린 석굴암 주차장에 도착했고, 그곳부터 석굴암까지 일출이 막 되기 전의 하늘과 조용하게 흔들거리는 나무들을 보면서 천천히 걸었다. 석굴암에 도착해서 내가 먼저 석굴암의 역사와 석굴내의 42명의 부조와 불상들에 대하여 간략한 소개를 했다. 그 후 우린 관리인의 지도하에 유리문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석굴암에 대한 그동안에 들어왔던 수많은 찬사들과 미사여구들, 그 수많은 형용사들이 무색할 만큼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말뜻이 절실히 다가왔다. 가슴이 찡한 것도 같고 숨이 멈출 것도 같이 떨리기도 했다. 석굴암의 감동을 가지고 석굴을 나온 학생들에게 다시 한번 석굴암에 대한 보충설명을 하였다. 특히 석굴암 석굴이 일제에 의해 완전 해체 되었던 일과 본존불이 바라보고 있는 곳이 동지 날 일출하는 곳이라는 것도 말해주었다.

석굴암을 떠나 답사 마지막 일정인 불국사를 도착하였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모두가 아름답다고 인정하는 그곳. 들어가자 마지 느낀 것은 불국사엔 정말 청운교,백운교, 다보탑, 석가탑만 달랑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 외에도 국보 제 26호인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국보 제 27호인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이 있고 불국사는 정말 크고 웅장한 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조경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역시 진짜 공부는 현장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번 답사를 통해 절실히 깨달았다. 내가 지금까지 내가 수없이 들었던 불국사에 대한 이야기들로 인해서 안 가 봐도 다 안다는 그런 마음을 들게 했지만, 불국사를 직접 보고 그 사찰 내를 거닐면서 느낀 감회는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었던 불국사의 느낌과는 360° 다른 것이었다.

불국사를 떠나 학교가 있는 부여에 돌아오면서, 눈을 감고 2박 3일에 짧았지만 그 깊이만은 결코 2박 3일의 시간으로만 설명되지 않은 첫 답사를 떠올려 보았다. 경주의 문화재와 답사지에 대해서 그동안 배웠다고 느꼈던 이야기들, 충분히 알고 있다고 느꼈던 설명들,,, 물론 충분히 사전자료를 찾고 원래 갖고 있던 지식들은 답사를 하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답사를 통해 깨달은 중요한 교훈이 한 가지 있다. 진짜, 단순히 시험을 위해, 공부를 위해 외우고 익혔던 책속의 유물들은 지겨운 역사책에 죽어 있는 조형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곳 경주에는 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차갑게만 느껴지는 돌과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고 따뜻한 숨결을 만든 조상들의 혼이 살아있었다.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삶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그 시대 예술가들의 작품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있었다. 또한 조상들의 지혜와 슬기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우리 한국전통문화학교 학생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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