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페이지 경로
기능버튼모음
본문

규제혁신

제목
[문화재답사기] 법천사지 단상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06-12-06
조회수
3468
작성자 : 이양무님 [2006 문화유산 답사기 공모전 입선(11위) 수상작]

오월로 접어들자, 봄이란 놈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내 웃옷을 훌훌 벗고 싶은 생각이 문득문득 일어난다. 갑자기 실내에만 있다는 것이 갑갑하게만 느껴지는 순간 문득 작년가을에 가보았던 해거름의 폐사지가 떠올랐다. 일년에 한번씩은 꼭 가보았던 그곳. 특히 작년 저녁때에 그곳에 서서 느낀 감정이 너무도 인상깊게 마음에 와닿아 다음에 한번 꼭 다시 오리라 약속을 하고 떠났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벌써 삼년이란 세월동안 늘 지켜왔던 내개인적인 충동성 기행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나른한 시간에 그 폐사지의 광경이 머리에 불현듯 떠올랐던 것이다. 정말로 혼자 갖고 싶던 시간과 분위기, 훌훌 떠나 혼자가 되어 나를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 언제나 늘 그렇듯이 디카와 펜탁스 필름 카메라를 가방에 챙겨 넣고는 집을 바로 나선다. 달콤하고 상큼한 봄바람이 자동차 차창을 통해 은은히 내 전신을 휘돌아 싸고돈다. 시내를 벗어나자 국도길이 시원하게 뚫려있고 이내 도착한 문막을 지나자 목적지인 부론 법천사지 까지는 15Km. 일이십분 정도면 족히 도착하고도 남는 거리다. 시골 국도는 늘 내게 마음의 여유를 부여해준다. 고속도로의 성급함이나 불안감은 찾아 볼수가 없고 좌우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치는 길의 모든 것을 놓칠 일도 없는 그런 편안하고 기분 좋은 길이다. 우리 인생길도 이와 같이 단순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다소 실없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그러면 인생은 너무 무미건조 하겠지? 각종 봄 행사를 알리는 프랭카드가 어지럽게 여기저기 붙어 있는걸 보니 벌써 부론면 인가보다. 법천사지를 알리는 표지판을 기준으로 좌회전하여 몇분을 달리자 멀지 않은 거리에 큰 나무가 서있고 뒤쪽으로 법천사지가 위치한 작은 언덕이 보이기 시작한다. 실개천 다리를 지나자 수백년은 족히 되어보이는 우리나라 어느 마을이나 절터 입구에는 어김없이 서있음 직한 당산나무인 커다란 느티나무가 세월의 무상함을 보여주듯 속이 텅 비어있는 상태로 여기서 부터는 불국토 라고 외치는 듯 의연히 자태를 드러내고 서있다. 무엇에라도 의지하고픈 인간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가 아닐까? 그래서 이런 거목들을 상징적으로 입구에 배치하지 않았나 하고 개인적으로 추측해 본다. 좌측에는 지금도 발굴이 계속 진행 중임을 암시해주는 파란 비닐들이 다소 어지럽게 온통 뒤덮여 있고, 작년보다 그 범위가 많이 넓어진 것을 보면 아마도 더 광범위하게 발굴조사를 추진할 모양이다. 점심때가 되면서 한층 더 봄볕이 따갑게 느껴진다. 느티나무 아래 차를 세우고 잠시 숨을 고르며 무심코 하늘을 쳐다본다. 몇 점의 구름이 푸른 옥색 하늘과 신비한 조화를 이루면서 느린 걸음으로 머리 위를 지나간다. 오고 가는 이가 없는 한적한 곳. 상수리나무를 감싸고 스치는 바람소리와 이름 모를 새소리만 이따금씩 들려오는 무척이나 호젓한 곳. 이런 분위기가 좋아 난 이곳을 찾곤 한다. 법천사지 주위에는 나지막한 산들이 그림같이 둘러져 있는데, 저산들이 아마도 현계산 줄기 인가보다. 행정구역상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이곳 이름이 손곡리 인것은, 바로 조선시대 시인 손곡 이달의 호를 따서 지었기 때문이란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바로 그의 제자이기도 하다. 기생의 몸에서 태어난 손곡 이달은 서출의 몸으로 권력지향의 벼슬길을 포기하고 이곳에서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사상적 영향이 바로 허균의 저술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충남 홍성 출신인 이달이 왜 타지인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는지는 알 길이 없고, 근처에는 그가 시골의 아낙네의 생활상을 그린 시비가 남아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골 밭집 젊은 아낙네 저녁거리 떨어져서 비 맞으며 보리베어 숲속으로 돌아오며 생나무에 습기 짙어 불길마저 꺼지도다 문에 들자 어린아이들 옷자락 잡으며 울부짖네.... 예나 지금이나 가난은 우리 모두를 아프게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름다운 좁은 오솔길을 따라 언덕길을 조금 오르니 앞쪽으로 폐사지가 몸을 숨기고 있었고, 여기저기 널려있는 석재들과 큰 탑비가 숲을 배경으로 홀로 찾은 낯선 이를 반겨주고 있었다. 주변의 나무숲에서 다시 쏴하는 소리와 함께 새들이 일제히 우는소리가 귓전을 맴돌다간 이내 돌아 나간다. 언제나 찾아오면 쓸쓸함이 느껴지는 곳. 태초의 침묵이 있는 곳. 화무십일홍의 교훈이 생각나는 곳. 인생의 허무와 덧없음을 배울 수 있는 곳. 적막, 처량, 고요, 황량, 쓸쓸... 이런 어휘로 밖에는 이곳의 느낌을 달리 표현할 능력이 나에겐 없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하지만 이런 점들이 어쩌면 내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돈사지와 함께 이곳을 찾게하고 좋아하게 하고 느끼게 하고 또 연민의 정을 함께 하게끔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곳 법천사지는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이년동안 네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건물지 19동, 우물지 3개소, 석축과 담장유구, 계단지, 연화대석 외 각종 기와등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유물이 많이 출토 되기도 했지만, 아직도 제대로 발굴을 하려면 십년정도는 더 소요 돼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이곳의 유명한 문화재로 지광국사 현묘탑비가 있는데, 묘탑 중에 걸작인 이 탑비는 중국에 더 많이 알려져 비석 탁본 의뢰가 계속 꾾이지 않고 있다고 하며, 또한 원래 이 탑비 옆에 있던 지광국사 탑은 한때 일본에 의해 반출되었다가 다시 국내로 돌아오는 어수선한 과정에서 지금은 제자리를 떠나 외지인 서울 경복궁에 자리 잡고 있다. 얼마 전에 원주시는 외지로 나간 문화재에 대한 반환 운동을 벌린 적이 있는데 그중에 이 탑도 포함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소승불교의 진리와 계율을 상징하는 탑은 우여곡절 속에 원위치를 떠나 멀리 타향에서 원래의 위치로 돌아 올 날만을 학수고대 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문화재는 본래 있던 제자리를 찾아 복원 하는 것이 백번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지광국사 현묘탑비는 고려 선종 때 세워진 4.5m정도의 석비로서 특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걸작인데, 귀부는 넓은 지대석 위에 놓였고 용머리를 형상화한 거북머리에다가 목에는 물고기 비늘을 표현했고 지고 있는 비에는 여의주를 희롱하는 쌍용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비의 상부에는 보주를 얹어 흡사 모자를 쓴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비문은 정유선이 짓고 안민후가 썼다 하는데 군데군데 후대사람들의 낙서인 듯한 흔적과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갈라진 부분도 일부 눈에 뜨인다. 탑비 옆으로 절 건물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 되는 곳에는 65년도에 발굴 출토된 배례석, 광대, 불두, 파불, 연화문대석, 용두등이 자연스런 상태로 배치되어 폐사지의 전체구조와 묘한 조화를 이루어 내고 있다. 고즈넉한 폐사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파란 비닐천 으로 덮여있는 발굴중인 곳 너머로 이십여호 정도 되는 마을의 스레트 지붕이 확 트인 전망과 함께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이 강산에 있는 절터치고 명당 아닌 곳이 어디 있겠냐만 아마도 예전 그 당시에는 저 마을도 절터 였으리라. 그 마을 한가운데 지금도 당간지주가 있으니 말이다. 입구에서부터 저 마을까지가 다 절터라고 생각하니 그 규모를 대충 상상해 보면 번창 당시의 절 규모는 상당히 크고 웅장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으로 이 법천사가 전소되기 전에는 조선초 내노라 하는 학자들인 권람, 한명회, 서거정 등이 이곳에 모여 시를 읇고 시문을 남겼다고 한다. 주변을 돌아보니 폐사지 주변에는 무수한 잡초들이 많이 자라 있는데 그중 야생화인 할미꽃이 군데군데 피어 있는 것이 무척이나 이채로워 바로 눈에 들어온다. 그나마 그 숫자가 작년보다 많이 줄어든 것 같아 마음이 안타깝다. 아직 철이 일러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이곳의 꽃도 속세의 인간들의 의해 무자비하게 채취 당해 그런 것일까?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예전에도 봄이 되면 꽃이 피고 또 지기를 계속 반복 했을텐데 그때 내 눈에는 이러한 꽃들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왜 그땐 안 보였을까? 이젠 세월 가는 것을 마음에 담을수 있는 그런 때가 된 탓일까? 어떤 이 들은 나에게 이렇게들 묻곤 한다. “아무것도 볼 것이 없는 폐사지엔 왜 가느냐고” 나는 사실 폐사지에 무엇을 보러 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눈으로 보는 것만이 과연 전부일까? 하는 의문 속에 나는 이곳에 와서 그저 생각하고, 느끼고, 잊고 싶어서 혼자서 이곳을 찾곤 하는 것이다. 항상 사람 없는 이런 폐사지를 찾는 내가 가끔씩은 정신적으로 사치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종종 있다. 시끄럽고 사람들이 많이 몰려가는 관광지를 애써 피하는 나 같은 사람 말고 우리 주변에는 그 시끄럽고 번잡한 곳에도 못가서 속상한 사람들도 많으니 말이다. 세상엔 영원한 것이란 없는 것이고, 영원하게 지속 되는 것도 없다. 한때는 크고 화려 했던 법천사가 지금은 이러한 황량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서있는 것처럼 세상사 모든 일이 한줌 흙으로 흩어지는 무상한 것이며, 이런 곳에서는 지난 세월들이 나를 뒤 돌아 보게도 하고 또 돌아보는 것으로 앞으로 다가올 그 무엇을 제시 하게도 하지만 뒤에 남기고 온 무엇들을 찾는 것 또한 필요할 것이다. 폐사지는 또 우리에게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부질없고 허망한 것인가도 보여준다. 온갖 풍상과 사연을 겪고도 그 세월을 이겨내고 의연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라. 그저 그렇게 그 자리에서 우리를 반기고 보내고 굽어보질 않는가? 영광이 있으면 퇴락이 있고, 또 이렇게 쓸쓸한 폐사지에도 꽃은 피고 찾아오는 이도 있고 새로이 일어서고 이루어질 날도 있으리라고. 우리가 잊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이제 또 이곳을 떠나면 한동안은 잊고 살리라. 이제 짐을 내려놓고 살아보자. 그동안 나는 너무 담으려고만 했으니까. 모든 것을 품에 안고만 가려 한다면 너무 무겁고 그리고 힘도 들것이다. 되돌아가 다시 현실로 돌아가자. 그래야 떠남이 있고 또 되돌아 옴이 있다는 것을 알수있으니...
첨부파일
  • 등록된 파일이 없습니다.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법무감사담당관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