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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선후기 최고의 북 마케터 조신선
작성일
2008-10-3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5295



세상에 있는 책이 모두 자기 책이요, 책을 아는 이 또한 자신뿐이라며 호언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영·정조 대에 ‘조신선曹神仙’으로 널리 알려진 책쾌(다른 말로 서쾌, 책거간) ‘조생曹生’이 바로 그런 위인이다. 유만주(兪晩柱, 1755~1788)의 일기 『흠영欽英』은 물론, 정약용(1762~1836)의 「조신선전曹神仙傳」, 조수삼(1762~1849)의 「죽서조생전」, 조희룡(1789~1866)의 「조신선전曹神仙傳」, 서유영(徐有英, 1801~1874)이 쓴 『금계필담錦溪筆談』, 그리고 장지연의 「조생曹生」과 강효석이 편집한 『대동기문大東奇聞』, 유재건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등 여러 문헌에서 거듭 조선 후기 최고의 책장수이자 북 마케터였던 조신선의 개인적 행적과 책쾌의 모습을 생생하게 적어놓을 만큼 그의 명성은 자자했다. 한양서 책쾌 ‘조신선’을 모르면 간첩

조신선曹神仙이라는 자는 책을 파는 아쾌로 붉은 수염에 우스갯소리를 잘하였는데, 눈에는 번쩍번쩍 신광神光이 있었다. 모든 구류九流·백가百家의 서책에 대해 문목門目과 의례義例를 모르는 것이 없어, 술술 이야기하는 품이 마치 박아한 군자博雅君子와 같았다. (정약용, 「조신선전曹神仙傳」, 『국역 다산 시문집』 7) “박식한 군자君子와 같다.”고 할 만큼 조신선은 지식과 학식을 갖춘 인물이었다. 책쾌 노릇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문자를 깨치고 교양과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했는데, 조신선은 책쾌 중에서도 책을 보는 안목이 뛰어났던 위인이었다. 그는 한양 곳곳, 즉, 시장이나 관청, 의원집, 양반집 등을 막론하고 책을 원하는 이가 있는 곳이라면 고위 여하를 막론하고 달려갔다. 책쾌 중에는 한양에서만 활동하던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전국을 무대로 지방과 한양을 오가며 서적을 팔던 이들이 있었는데, 조신선은 한양을 거점으로 활동했다. 한양에서 그것도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기 위해선 책을 옷소매에 잔뜩 넣어 가지고 다니는 게 상책이었다. 그래서 오죽하면 『금계필담』에서는 『강목(綱目)』 한 질帙을 늘 몸에 지니고 다니다가 혹 그것을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즉시 품속에서 꺼내 방안에 수북이 쌓아 놓을 정도였다고 했을까? 장서가 유만주는 그의 단골 고객

조신선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거래처를 뚫던, 오늘날의 서적외판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일단 인사를 나누고 안면을 익힌 뒤 고객이 서책 매매에 관심이 생기면 실제로 필요한 서책을 구해 와 첫 거래를 성공시킨 뒤 단골 고객으로 만들어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방법을 썼다. 이때 그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상대하던 고객은 주로 사대부 남성들이었다. 특히 장서가들이 조신선의 주요 고객이었다. 대를 이어 거래할 만큼 신용에 기초한 관계를 돈독히 유지해 나갔다. “책보기를 혹독하게 즐기는 건 벽(癖,=버릇)의 하나다.”라고 말할 정도로 책에 깊이 빠져 지냈던 유만주와 같은 장서가야말로 책쾌들이 쾌재를 부르며 모여들던 단골 고객 중의 한 사람이었다. 아니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그럴듯한 서점 하나 없던 시기에, 책 거래마저 부정시 하던 조선사회에서 유만주 같은 애서가들에게, 필요한 책을 필요할 때마다 구해다 주던 조신선 같은 북 마케터가 오히려 고맙고 소중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으리라.

책쾌 조씨가 왔다. 『통감집람通鑑輯覽』과 『한위총서漢魏叢書』를 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명사明史』는 결국 선본善本이 없고, 『경산사강瓊山史綱』 역시 구하기 어렵다고 했다. 듣자니 『정씨전사鄭氏全史』는 춘방春坊에서 새로 구입했고, 『김씨전서金氏全書』는 일찍이 서각徐閣의 소유였는데 그것의 값이 모두 합해 사만 여 문이나 된다고 했다. 그 밖에 『절강서목浙江書目』을 구했다. 『합강合綱』을 내어서 보여 주며 돋보기를 대고 글자 모양과 크기를 들여다보니 마치 사정전思政殿의 각본刻本 같았다. 그래서 이와 같은 판본이면 경사經史와 제자서諸子書·잡기雜記·소설小說을 막론하고 한 책이든, 열 책이든, 백 책이든 구애받지 말고 다만 힘써 구해오기만 하라고 했다. (『흠영』, 1784년 11월 9일자) 유만주의 일기 속에 포착된 책쾌 조씨(조신선)와 유만주의 대화 장면을 보라. 이것이야말로 중국을 넘나드는 동아시아 지식의 확산과 정보 교환의 원천임을 감지할 수 있다. 사회 전반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던 조선의 유리창이었다고나 할까. 여기서 우리는 책에 대한 당대 지식인의 관심과 서적 구입에 대한 열의, 책쾌들의 서지 정보에 대한 박학 정도가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실제 유만주는 조신선으로부터 중국 총서나 문집·전기·소설 뿐 아니라 『사변록思辨錄』·『구운몽九雲夢』 등의 조선의 유교사상서와 소설책을 구해보고자 했다. 프로 정신과 자부심 하나로 천하를 소유하다

이처럼 다양한 종류의 책을, 그것도 신속하게 고객에게 공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책 거래에 관한 한 최고라는 그들만의 프로 정신과 자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하기에 수백 명의 책쾌들이 체포되어 참수당하거나 유배당하고, 또는 노비로 전락하는 ‘명기집략明紀輯略’ 사건이 영조 대에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졌을 때도 조신선을 비롯한 책쾌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서 잠시 피했다가 이내 다시 책을 들고 고객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특히나 불행을 미리 알고 피할 수 있었던 조신선의 예지력에 대해 사람들은 그를 가히 ‘신선神仙’이라 부를 만하다고 감탄했다. 거기에다 세월을 먹지 않는 그의 외모, 귀천貴賤과 현우賢愚에 관계없이 모두 그를 알아볼 정도로 평생 수많은 문사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왕성한 북 마케팅을 편 그를 신비스런 인물로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조신선에 대해 조희룡은 책쾌 노릇을 좋아해 평생 책과 함께 동거동락하다 보니 문자선文字仙의 경지에 이른 데 있지 않겠느냐며 그의 신비한 면모를 칭송해 마지않았다. 책이 팔리면 그는 그 돈으로 술을 마시는 데 썼다. 재물에 집착하지 않고 그저 술을 마시며 삶을 즐기고자 했던 신선, 그 자체였다고 할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조신선은 책 거래에 관한 한 당대를 대표하던 최고 명인이었다. 책의 내용은 잘 몰라도, 책의 저자가 누구며, 주석을 단 이가 누구며, 몇 권 몇 책인지, 또한 문목門目과 의례義例에 관한 서지정보는 물론, 누가 책을 소장하고 있으며 얼마 동안 어떤 책을 소장하고 있었는지까지 환히 다 꿰뚫고 있었다. 그렇기에 “천하의 책이 모두 내 책이요, 이 세상에서 책을 아는 이는 오직 나뿐”이라는 자부심 하나만으로도 천하를 소유하고 자신의 직업에 당당할 수 있었던 위인이었다. “내 비록 책은 없지만, 아무개가 어떠어떠한 책을 몇 년 소장하고 있다가 그 중 어떤 책 일부를 나를 통해 팔았소. 그 때문에 책의 내용은 모르지만 어떤 책을 누가 지었으며, 누가 주석을 달았고, 몇 권 몇 책인지 까지 다 알 수 있다오. 그런즉 세상의 책이란 책은 다 내 책이요, 세상에 책을 아는 사람도 나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오. 세상에 책이 없어진다면 나는 달리지 않을 것이요, 세상 사람이 책을 사지 않는다면 내가 날마다 마시고 취할 수도 없을 것이오. 이는 하늘이 세상의 책으로 나에게 명한 바이오. 그러니 나는 내 생애를 책으로 마칠까 하오.” (유재건, 「조생」,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글·사진_ 이민희 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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