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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흥정을 붙이고 여리餘利를 챙기는 여리꾼
작성일
2015-03-09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8741

흥정을 붙이고 여리餘利를 챙기는 여리꾼.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상품을 탐색하고 흥정하는 과정을 거쳐 구입을 결정한다. 여리꾼은 바로 상인과 고객 사이에서 흥정을 붙여 거래를 성사시키고, 여리餘利를 취하는 사람이다. 직업인으로서 여리꾼은 호객꾼·중간상인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일터는 종로 시 전 일 대 이고 전속되지 않는 프리랜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판매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흥정을 붙이는 중간상인은 여리꾼 외에도 싸전의 미곡 거간, 가옥 거래를 중개하는 가쾌(家: 집주름), 물화의 매매를 주선하는 객주 등 다양한 종류가 있었다.

01. 김준근의『기산풍속도첩』에 보이는 시장에 설치한 여막의 모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의 상거래 관행이 낳은 여리꾼列立軍

여리꾼은 남는 이익餘利을 얻는다는 뜻도 있지만, 열립군列立軍에서 유래된 말이다. 열립군은 종로 거리에 열을 지어 서서 고객을 기다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여리꾼의 출현은 조선의 상거래관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시전상인은 대개 한 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 최소한의 상품을 진열하고, 퇴청 바닥에 앉아 손님을 기다렸다. 또한 다닥다닥 붙은 전방들은 상호나 판매물품을 알리는 간판도 없었고, 가격도 표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소비자는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찾지 못해 시전 거리에서 헤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러한 상인과 고객의 틈새를 파고든 것이 바로 여리꾼이다. 여리꾼은 종로 거리에 열 지어 서 있다가 손님이 나타나면 다가가서 어떤 물건을 찾는지를 묻고, 해당 전방에 데려가 흥정을 붙이고 가격을 조정하여 거래가 성사되도록 했다. 이때 여리꾼은 상품에 대한 설명을 곁들여 구입을 권장하고, 가격을 조정하는 중간상인의 역할을 했다.

여리꾼은 상인이 작정한 값보다 높은 가격으로 물건을 팔아주고 그 차액, 곧 ‘餘利’를 챙겼다. 예컨대 상인이 10냥을 받으려는 상품을 여리꾼이 흥정하여 12냥에 팔게되면, 2냥은 여리꾼이 갖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리꾼은 일단 물건 값을 높이 부르고, 깎아주면서 흥정을 했다. 이때 얼마나 ‘말품’을 잘 파느냐에 따라 거래의 성사여부가 결정되곤 했다.

 

여리꾼의 암호, 변어邊語

여리꾼이 자기 몫의 여리를 많이 챙기려면, 가게 주인이 작정한 가격을 알아내어 그 보다 비싼 값에 팔아야 했다. 이에 손님이 알아들을 수 없는 암호를 사용하여 가격을 조정했는데 그 암호를 ‘변어’라고 했다. 여리꾼이 사용한 변어는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대개 한자의 파자破字원리를 이용하였다. 예컨대 1은 천불대天不大, 2는 인불인仁不人, 3은 왕불주王不柱, 4는 죄불비罪不非, 5는 오불구吾不口, 6은 곤불의袞不衣, 7은 조불백不白, 8은 태불윤兌不允, 9는 욱불일旭不日 등으로 했다. 그것은 천天에서 대大를 빼면 일一이 되고, 인仁에서 인人을 빼면 이二가 되고, 왕王에서 기둥(柱)을 빼면 삼三이 되고, 죄罪에 서 비非를 빼면 사四가 되는 식이었다. 여리꾼의 암호는 상인과 고객 사이의 거래를 원활하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상인과 여리꾼의 이익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자칫하면 손님은 바가지를 쓰는 ‘호갱님(호구고객)’으로 전락하기 십상이었다.

02.1904년 조지로스가 찍은 숭례문앞 시장. 조선시대시장의 전방들은 간판도 없었고, 가격도 표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소비자는 원하는물건을 찾지못해 헤매는 경우가 적지않았다. ⓒ곽재식 03.김학수가 그린 조선시대시장풍속도. 시장을 무대로 활동한 여리꾼은 아직점포를 갖지 못한 가난한자들이 대부분이었다.ⓒ국립민속박물관

소창옷에 한삼 달고 흥정하는 ‘경박’한 여리꾼

장을 무대로 활동한 여리꾼은 특정 가게에 전속된 것 이 아니었으며, 아직 점포를 갖지 못한 가난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손님에게 상품을 소개·안내하는 길잡이 역할을 했지만, 때로는 손님을 희롱하거나 애걸하기도 했다. 『한산거사漢山居士』「한양가」에 나오는 육의전 일대 여리꾼의 모양새를 들여다보자. ‘대광통교 넘어서니 육주비전六注比廛 여기로다. / 일 아는 여리꾼列立軍과 물화 맡은 시전주인은 대창옷에 갓을 쓰고 소창옷에 한삼汗衫달고 / 사람 불러 흥정할 제 경박하기 한이 없다.’ 당시 한산거사가 바라본 여리꾼의 흥정은 경박하기 한이 없는 모양새였다. 의리를 중시하는 조선사회에서 이익을 쫓는 여리꾼은 천시되었다. 개항 이후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되면서 여리꾼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근대적 상거래를 추구했던 지식인들은 여리꾼을 ‘거짓말품’을 파는 사람, ‘악습’의 대명사로 비판하고, 척결의 대상으로 여겼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잔존해 있는 여리꾼을 ‘일종의 비극’이라고 한탄했다.

상인과 고객 사이에서 공생과 기생의 관계를 넘나들었던 여리꾼은 근대 이후 시장에 간판과 광고가 등장하고, 상품 진열 방식이 바뀌고, 서비스 개념이 도입되면서 역사 무대 저편으로 사라졌다.

 

※참고문헌『제국신문』, 『별건곤』 박은숙, 2008, 『시장의 역사 -교양으로 읽는 시장과 상인의 변천사』역사비평사

 

글. 박은숙 (고려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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