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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바른 정치 구현을 위한 조선시대의 언론기관, 언 론 삼 사
작성일
2008-05-28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6738



‘언론’은 ‘언치논도言治論道’의 준말로 바람직한 치도治道를 둘러싼 논의를 의미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조선에도 언론기관이라 지칭할 만한 것들이 있었다고 한다. 성리학을 유일무이한 통치사상으로 채택한 조선조에서는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 홍문관弘文館 등 소위 언론삼사言論三司가 ‘언치논도’를 전담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본래의 언론기관은 사간원이다. 사간원을 구성하는 간관諫官의 기본임무는 제왕의 잘못된 정책 및 언행 등에 대해 직간하는 것이다. 최초의 간관은 전한前漢 때 출현한 간대부諫大夫로 후한 때 간의대부諫議大夫로 개칭되었다. 사헌부는 재상을 보좌하는 부승상副丞相인 어사대부御史大夫에서 출발해 백관에 대한 감찰을 전담하다가 수당隋唐 이후 간의대부와 함께 언론기관의 역할을 수행케 되었다. 그러나 조선조 언론의 가장 큰 특징은 성종 때 설치된 홍문관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원래 왕의 경연經筵을 전담시키기 위해 발족한 전문적인 연구기관이었다. 학술기관에 해당하는 홍문관이 언론기관의 역할을 수행케 된 것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당초 세종은 태종 때 형성된 공신집단을 견제하기 위해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했다. 세조는 즉위 초 집현전 학사들이 대거 참여한 단종복위 사건이 터지자 이내 집현전을 철폐했다. 이후 성종은 세조 때 형성된 훈구세력을 견제할 생각으로 예문관藝文館의 일부 기능을 독립시켜 집현전의 후신인 홍문관을 개설했다. 이때 명분을 중시하는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영남사림嶺南士林이 대거 진출했다. [b]왕권과의 마찰도 개의치 않은 언론삼사[/b] 홍문관이 언론기관으로 전환된 것은 왕의 자문에 응하면서 조정朝政의 시비를 논하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간언을 행한데 따른 것이었다. 이는 학문연마에 전념하는 홍문관이 성리학 이론에 대해 가장 권위적인 해석을 내릴 수 있었던 사실과 무관치 않았다. 당시 언론삼사가 힘을 합쳐 간쟁하는 것을 ‘삼사합사三司合司’, 3개 기관 중 2개 기관이 합사하는 것을 ‘양사합사兩司合司’라고 했다. 양사합사는 대개 사헌부와 사간원의 합사로 이뤄졌으나 홍문관이 사헌부나 사간원을 대신해 합사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들 언론삼사의 관원들은 소속기관 및 자신의 선명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적잖이 다투었다. 이는 성리학을 채택한 나라가 지닌 특징이자 한계이기도 했다. 대개 홍문관은 양사합사에도 불구하고 군왕이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마지막으로 나서 삼사합사로 간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만큼 위세가 높았다. 실제로 홍문관의 수장인 대제학(大提學 학술원장)은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大司憲 감사원장)이 종2품, 사간원 수장인 대사간(大司諫 국영언론 사장)이 정3품인데 반해 그보다 높은 정2품이었다. 소위 문형文衡으로 불린 홍문관 대제학은 사대부들로부터 정승보다 더 큰 존경과 권위를 인정받았다. 당시의 상황에서 군왕이 언론삼사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곧 스스로 사리에 어두운 암군暗君 내지, 간언을 무시하는 무지막지한 폭군暴君임을 자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선 중기 이후 사대부들이 사색당파로 나누어 싸운 것도 이들 언론삼사를 누가 장악하느냐 하는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 언론삼사는 왕권을 견제하기 위해 군주와 다투는 것을 본연의 임무로 생각한 까닭에 모든 사안에 개입했다. 이에 성군으로 일컬어진 세종과 성종도 이들과 적잖은 마찰을 빚어야만 했다. 성종은 언론삼사가 군주의 재량권인 인사권에까지 간섭하고 나서자 이같이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지금의 대간을 보면 반드시 들어줄 것을 기대하고 논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지금 한두 명의 대간을 이조의 추천에 의해 외직外職에 임명한 것을 놓고 대간이 억측하여 말하고 있다. 이는 임금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성종24년 7월 30일) 연산군은 즉위 초에 강력한 왕권의 확립을 위해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신권세력의 발호를 가차 없이 제압했다. 이는 대간들의 기세를 초기에 제압하지 않고는 왕권을 행사하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한데 따른 것이었다. 연산군의 다음 언급이 그 증거이다. “대간 역시 신하인데 꼭 임금으로 하여금 그 말을 다 듣도록 하는 것이 옳은가. 그렇다면 권력이 위에 있지 않고 대간에 있는 것이다.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근원은 권력이 아래로 옮겨지는 데 있다.” (연산군2년 5월 6일) [b]서민들을 위한 언론의 통로, 상언과 격쟁[/b] 중종반정 이후 조선조는 신권이 왕권을 위압하는 소위 ‘군약신강君弱臣强’으로 인해 커다란 병화兵禍를 겪어야만 했다. 왜란 당시 명나라 조정이 ‘군약신강’에서 왜란의 원인을 찾은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는 성리학 이론에 기초한 ‘숭문천무崇文賤武’ 풍조로 인한 것이었다. 조선조는 ‘숭문천무’로 패망을 자초한 남송南宋의 전철을 밟은 셈이다. 언론삼사의 막강한 언론권 행사는 조선조가 끝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이는 ‘군약신강’으로 인해 왕권이 극도로 미약해진 상황에서 온갖 대소 사안을 놓고 모든 정파가 갑론을박하는 국론분열 상태가 지속된데 따른 것이었다. 18세기의 실학자 유수원柳壽垣은 『우서迂書』에서 홍문관의 설치에서 그 원인을 찾은 바 있다. 명분과 선명성을 둘러싼 언론삼사 간의 경쟁은 민생을 피폐케 하는 근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서민들은 자신들의 원억(억울한 일)을 해결키 위해 자구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그 대안으로 나온 것이 바로 상언上言과 격쟁擊錚이었다. 상언은 원억의 당사자가 그 내용을 글로 써서 바치면 승정원에서 이를 수합한 뒤 각방 승지의 견해를 덧붙여 보고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상언은 횟수가 2회로 제한되어 있는데다 한문으로 본인이 직접 작성해 제출해야 했던 까닭에 문자를 모르는 하층민들은 격쟁을 더 선호했다. 꽹과리와 북을 활용한 격쟁은 비록 형조로 끌려가 형추刑推를 받는 신체적 고통이 수반되었으나 횟수의 제한도 없고 글로 써야 하는 부담이 없었던 까닭에 하층민들이 선호했다. 격쟁은 16세기에 크게 3가지 형식으로 정착되었다. 직접 대궐 안으로 들어가 국왕에게 호소하는 궐내격쟁闕內擊錚을 비롯해 국왕의 행행行幸 때 어가 앞에서 행하는 위내격쟁衛內擊錚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행하는 위외격쟁衛外擊錚이 그것이다. 위외격쟁은 꽹과리 등을 치는 방식 이외에도 커다란 나뭇가지 끝에다 글자를 크게 써서 국왕의 눈에 뜨이게 하거나 크게 소리를 지르는 방식 등이 동원되었다. 원래 격쟁은 조선 전기의 신문고申聞鼓가 주로 서울에 거주한 문무 관원의 청원請願 도구로 변질돼 하층민과 지방민들에게는 별다른 효용을 갖지 못한 사실과 무관치 않았다. 영조는 격쟁이 급격히 늘어나자 재위 47년(1771)에 원래의 취지를 되살려 창덕궁 남쪽에 신문고를 다시 설치해 민원民怨을 수렴코자 했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정조는 대민접촉을 강화하면서 격쟁의 범위를 통상적인 사안으로 확대하고 관리의 축소보고를 금지시켰다. 이에 정조 14년(1790년)에는 서울에 사는 이안묵李安默이 산의 소유문제로 3년 동안 7번이나 격쟁을 행해 큰 물의를 빚기도 했다. 상언 및 격쟁의 빈발은 기본적으로 언론삼사가 서민을 위한 언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치 못한데 따른 것이었다. 여기에는 영정조 때에 들어와 관원들이 상공업의 발달로 인한 이익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탈하자 백성들이 스스로 나서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고자 한 점도 크게 작용했다. 고종 말기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는 국가 패망의 위기상황에서 사대부들을 위해 봉사했던 기존의 언론삼사와 하층민의 자구책으로 강구된 격쟁 및 상언이 하나로 결합한 특이한 언론양식으로 볼 수 있다. ▶ 글_ 신동준 21세기 정치연구소 소장 ▶ 일러스트_ 홍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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