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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 민족의 혼(魂)과 생명을 지킨 무기 개발과 발전의 역사
작성일
2024-05-3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138

우리 민족의 혼(魂)과 생명을 지킨 무기 개발과 발전의 역사 인류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라고 한다. 이것은 인류가 자신을 위협하는 적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병력과 무기가 필수적인 요소이며, 우수한 무기는 적을 압도하고 승리를 쟁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01.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사적, 사천해전도)

동이족으로 불리던 한민족의 활과 화살 그리고 기마술

전쟁을 통해 새로운 무기가 개발되기도 하고, 기존에 있던 무기의 성능이 개량되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고대로부터 900회가 넘는 왜구의 침략을 겪는 과정에서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고 발전시킴으로써 민족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었다. 적보다 월등한 무기를 보유함으로써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세계 각국은 연구개발에 많은 자원을 투자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나라 또한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 민족이 북방과 남방으로부터 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무기를 개발하고 발전시켰다.


전통적으로 고대부터 전투에서 주로 쓰인 무기는 창, 칼, 도끼 그리고 활이었다. 인간의 근력을 활용해 근접전 시 사용하는 칼은 돌을 깨서 만들었던 원시적인 형태에서 구리를 녹여 만든 청동 검을 사용하던 시기를 거쳐 삼국시대에 들어철로 제작한 무기가 본격적으로 개발되어 쓰였다. 활과 화살은 다른 무기와 달리 다소 원거리에서 적을 제압하기 위해서 활용되는데 우리 민족은 성능이 우수한 활과 화살을 개발하고 기마술을 결합해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이런 우리 민족의 월등한 활쏘기 실력을 인정하여 동이족(東夷族)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02.동모, 청동기시대 대표 유물로, 적을 찌르는 데 사용, 부산광역시유형무형유산 Ⓒ부산시립박물관 03.비격진천뢰, 조선 선조 때 사용된 살상용 폭탄 Ⓒ국립고궁박물관

영토 확장을 위한 전투 그리고 방어 무기

삼국시대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전쟁을 경험한 시기였다. 고구려·백제·신라가 주변 소국을 정복한 후 고대국가를 형성하고 본격적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삼국 간 그리고 중국의 수나라, 당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176개, 백제 65개, 가야와 신라가 109개의 성을 축성하여 성을 중심으로 한 공성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공성 무기가 발달하였는데, 성을 활용한 전투에서 공격 시에는 투석기인 포거(抛車), 충거(衝車), 운제(雲梯), 방어 시에는 노포(弩砲)와 마름쇠인 철질려(鐵蒺藜)가 사용됐다. 즉, 공성전 시 공격하는 부대는 포거를 사용하여 기선을 제압했고, 방어하는 부대는 마름쇠를 성 주위에 뿌려 적의 접근을 차단했다. 이 같은 공성전 양상은 고구려와 당나라 간의 안시성싸움 사례에서 볼 수 있다. 공성무기를 제외하고 삼국시대의 개인무기는 활과 칼이 주를 이루었다.


우리나라 폭탄, 고려시대 첫 개발

고려시대는 이민족간 전쟁이 잦았던 시기로 무기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고려시대는 삼국시대의 무기체계를 계승하여 활과 창, 칼을 기본 병기로 했다. 고려는 전통 활을 개선하고 기계식 활인 쇠뇌(弩)를 개발하고 검차(劍車)를 활용해 거란에 타격을 입혔다. 또한 몽골의 1차 침략 시 귀주성(龜州城)에서 공성전을 전개하면서 몽골의 무기들을 대우포(大于浦)로 격파했다. 


이후 고려는 14세기 말(1377년)에 최무선의 노력으로 화약을 제조할 수 있게 되었고, 화통도감(火㷁都監)을 설치해 대장군포 등 여러 종류의 발사기와 철령전(鐵翎箭) 등 발사물, 오늘날의 로켓형 화기와 같은 화전(火箭), 질려포(蒺藜砲)라는 폭탄도 개발하였다. 이 같은 화약무기를 활용하여 고려는 연안 지방에서 약탈을 일삼던 왜구를 격퇴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집단부대를 대상으로 하는 화약무기가 현저하게 발전하였으나 개인무기는 삼국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04.대완구(大碗口), 조선 태종 때 최해산이 만들었다고 하는 화기의 한 종류 Ⓒ국립진주박물관 05.삼안총, 조선시대 개인이 휴대할 수 있게 만든 총 Ⓒ국립경주박물관 06.화차

조선시대 화차는 오늘날 다연장로켓으로 발전

조선시대에는 부국강병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고려 말에 개발된 화약 병기를 더욱 발전시켰다. 조선 초기의 최대 위협은 북쪽의 여진족과 남쪽 연안의 왜구였다. 태종이 등용한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은 화약무기 연구에 전념해 화차를 개발하기에 이른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화약무기 개발에 더욱 많은 힘을 쏟았다. 세종 때 개발된 화약무기의 종류는 모두 23종으로 총포류 10종, 폭탄류 8종, 로켓화기 5종이다. 대표적인 화포로는 천자문의 글자 순으로 이름을 붙인 천자(天字)·지자(地字)·현자(玄字)·황자(黃字)총통(銃筒)과 신기전 등이 있었다. 


또한 문종 때로는 100발의 화살을 동시에 또는 연속하여 발사가 가능한 신기전기화차(神機箭機火車)를 개발했다. 태종 때 개발된 화차는 성종 시기 여진족을 정벌할 때 포위망을 뚫고 적을 격퇴하는 데 활용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 시에도 권율 장군이 화차 300대를 운용하여 열세한 전황을 극복하고 큰 승리를 거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화차는 끊임없이 구조를 개선하고 장비를 보완하여 17세기 이후 기동화력 무기로 발전했다. 조선의 화차는 오늘날의 다연장로켓과 유사한 것으로 막강한 화력을 지닌 무기였다.


임진왜란은 무기 개발과 발전에 계기가 되어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은 명과 일본의 선진 화기를 경험하고 이들의 무기를 도입하고자 노력했다. 조선은 투항한 일본 병사인 항왜(降倭)를 활용해 명나라 군대의 발전된 화기 제조술을 익히는 노력을 했다.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화기도감(火器都監)을 설치하여 무기개발에 적극 나섰다. 


그 결과 인조 시기에는 일본제 조총보다 성능이 훨씬 우수한 조총을 제작할 수 있었고, 명나라 군의 신형 화기를 모방하여 불랑기포, 호준포 등을 자체 제작하였는데 이들은 조선 후기의 주요 무기가 됐다. 조선시대의 개인 무기는 궁시(弓矢)와 장검, 환도(還刀)가 있었다. 특히 전통적인 궁시를 개량하여 각궁(角弓)과 편전(片箭)을 제작하였다. 조선의 편전은 중국의 창, 일본의 조총에 견주어 제일로 여겨질 만큼 성능이 뛰어났다.


무기 개발의 노력은 수입으로도 이어진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실정에 맞는 무기를 개발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 17세기에는 오늘날 지뢰와 유사한 파진포(破陣砲)를 비롯하여 50개의 조총을 연속하여 발사할 수 있는 병거(兵車)를 개발하였고, 18세기에는 홍이포(紅夷砲), 천보총(千步銃)을 개발하였다. 


그러나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통해 화력의 열세를 절감하였고, 조선은 신식 무기를 비롯한 서구 문물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청나라에 영선사,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하였다. 이어 대한제국에서는 무기의 자체 제작보다는 완제품을 수입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권총, 소총 등 개인화기와 야전포(野戰砲) 등을 수입하였고, 3,435톤 규모의 군함인 양무호(洋務號)를 도입하였다.


조선의 대표적인 해상 무기인 거북선의 제작은 조선 초기부터 이루어졌으나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만든 철갑선이다.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사천해전(1592년)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거북선과 함께 조선 수군의 핵심 전함이었던 판옥선은 16세기 중반에 건조됐다. 판옥선은 일본의 안택선에 비해 노꾼의 수가 많고 전투원이 적었는데 안택선이 근접전투에 중점을 준 반면 판옥선은 포격전과 원거리 공격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무기의 수출로,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한 역사를 돌아보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평시부터 대비해야 하는 일이다.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이 주변국의 위협을 해소하고 번영할 수 있었던 시기는 우리 자신을 보호하고 지킬 수 있는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던 때였다. 


우수한 무기 개발의 경험과 역사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K-방산의 씨앗이 되었다. 무기의 개발과 수출은 단순히 경제적인 측면을 넘어 대한민국의 생존 문제와 직결된다. 역사 속에서 선조들이 우리의 땅과 문화, 그리고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했으며, 그 과정에 독창적인 무기 개발과 군사기술의 발전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글. 최정준(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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