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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칠궁(서울 육상궁), 왕의 생모를 모시는 사당
작성일
2024-05-3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140

칠궁(서울 육상궁), 왕의 생모를 모시는 사당 경복궁을 지나 창의문쪽으로 가는 길, 청와대와 담 하나를 경계로 위치한 ‘칠궁’이 있다. 이곳은 아들이 왕이 되거나 왕으로 추존되었으나, 왕비가 아니기에 종묘에 부묘될 수 없는 일곱 분을 위한 사당이다. 저경궁, 대빈궁, 육상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 7개의 사당이 있어 칠궁이라 하지만, 사당 건물은 다섯 채이다. 선희궁과 경우궁, 육상궁과 연호궁은 각각 하나의 건물에 같이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01.육상궁과 연호궁 내부

영조의 궁원제 도입

칠궁은 영조(재위 1724~1776)를 빼고는 말할 수 없다. 잘 알려져 있듯이 영조는 숙종(재위 1674~1720)과 후궁 숙빈 최씨(1670~1718)의 아들이다. 조선시대 왕실 구성원 중 오직 왕과 왕비의 무덤만 ‘능’이며, 능주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종묘’다. 아무리 자신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하더라도, 왕이나 왕비가 아닌 부모의 사당은 ‘묘(廟)’ 무덤은 ‘묘(墓)’라고 했다. 이들에 대한 제사 역시 아들인 왕이 아니라, 다른 후손을 정해 지냈다. 왕위에 오른 영조는 자신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공적 지위를 올리고자 노력하며 ‘궁원제’라는 제도를 도입했다. 영조가 시행한 궁원제(宮園制)는 왕의 생부와 생모의 사당을 ‘궁’으로, 무덤을 ‘원’으로 올리고, 더불어 이들에 대한 제사도 왕이나 관리가 지내는 국가 제사로 만들었다.


사당과 무덤에 내린 이름

궁원제에 따라 1753년(영조 29) 영조는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을 ‘육상궁’으로, 무덤은 ‘소령원’으로 승격시켰다. 생모를 왕비로 추존할 수는 없었지만, 아들이자 왕의 자격으로 떳떳하게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이다. 영조가 재위 기간 중 이곳을 200여 차례 넘게 방문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얼마나 이 문제를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려준다. 영조가 제사에 앞서 머물던 곳이 칠궁 가장 안쪽 가운데에 냉천정이라는 정자다.


영조는 2년 뒤 인조(재위 1623~1649)의 조모이자 추존왕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1555~1613)의 사당을 저경궁으로 승격시키고 남양주에 있던 묘는 ‘순강원’으로 올렸다. 저경궁은 원래 호현방(현재 한국은행이 있는 곳)에 위치했었다. 경우궁은 순조(재위 1800~1834)의 생모인 유비 박씨(1770~1823)의 사당이다. 유비 박씨가 살아 있을 때 순조가 왕위에 올랐기에 비록 왕비나 왕대비는 아니었지만 왕의 생모로 편안한 일생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고, 사당과 무덤은 각각 경우궁과 휘경원으로 명명되었다.


02.칠궁 냉천정 03.숙빈 최씨의 소령원 전경 04.대빈궁 외관

현존의 삶의 흔적이 남은 대빈궁

연호궁과 선희궁의 주인은 모두 추존된 왕의 생모다. 정조(재위 1776~1800)는 사도세자(1735~1762)와 혜경궁 홍씨(1735~1816)의 아들이지만,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 이후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세자(1719~1728)에게 입적되었다.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가 진종으로 추존되고, 진종의 생모이자 영조의 후궁인 정빈 이씨(1694~1721)의 사당과 무덤이 연호궁과 수길원으로 승격된 이유다.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는 정조 재위 기간에는 끝내 추존되지 못하다가, 1899년(광무 3)에 이르러서야 장조로 추존되었다.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1696~1764)의 사당은 정조대 선희궁으로 승격되었지만 무덤은 여전히 의열묘로 불렸다. 장조가 추존된 후에야 수경원으로 승격되었다.


대빈궁은 경종(재위 1720~1724)의 생모인 옥산부대빈 장씨, 바로 그 유명한 장희빈의 사당이다. 경종은 왕위에 올랐으나 어머니를 왕비로 추존할 수는 없었고, 다만 사당은 대빈궁이 되었다. 기록을 통해 영·정조대에 대빈궁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대빈궁은 다른 네 채의 사당에 비해 기단이 높고 문 장식도 화려하며, 둥근 기둥을 썼다. 비록 폐위되었으나 한때 왕비였던 그의 삶이 다른 사당 건물과는 다른 모습을 남긴 것이다. 다만 대빈 장씨의 묘는 끝내 원으로 승격되지 못하고, 대빈묘로 남았다.


현재의 모습이 갖춰지기까지

현재 칠궁 자리에는 육상궁만 있었는데, 1908년 서울 곳곳에 있던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을 모두 육상궁 경내로 옮겼다. 이후 1911년 고종의 후궁이자 대한제국 의민황태자의 생모인 순원황귀비 엄씨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사당은 덕안궁, 무덤은 영휘원이라 명명되었다. 앞서 여섯 사당의 주인이 모두 왕 또는 추존왕의 생모인 반면, 덕안궁은 황태자의 생모라는 차이가 있다. 1929년 원래 덕수궁 안에 있던 덕안궁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현재의 칠궁 모습을 갖게 되었다.


매년 3월 봉행하는 칠궁 제향

각 궁에 대한 제사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매년 10월에 봉행하다 2024년부터 3월로 변경해 봉행하고 있다. 제향에 맞춰 칠궁을 방문한다면 왕실 사당의 가치를 더욱 깊게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언제 가더라도 칠궁의 고즈넉함과 정갈함은 느낄 수 있으니 발걸음 해 보시길 바란다. 이곳에 모셔진 분들이 묻혀 있는 ‘원’과 ‘묘’도 이어본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글. 임경희(궁능유적본부 궁능서비스기획과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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