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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주 읍성길 천년 고도에서 발견한 다채로운 시간의 층위
작성일
2024-05-3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81

경주 읍성길 천년 고도에서 발견한 다채로운 시간의 층위 경주라고 하면 누구라도 단박에 ‘신라’를 떠올리지 않을까. 확실히 경주에는 신라의 역사를 품고 있는 천년 고도의 이미지가 짙다. 그런데 구 경주역사를 에두른 마을과 경주읍성에서 갈라진 골목을 걷다 보면 보다 다채로운 시간의 층위를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놓쳤던 경주를 만나볼 차례다. 01.경주역

예사 동네가 아니었던 경주로 놓인 기찻길

근대기 우리 터전을 앗아갔던 일제의 눈에도 경주는 예사 동네가 아니었던 듯하다. 일본의 지식인들이 경주 기행에 나섰고, 곧이어 일본의 어린 학생들도 경주로 수학여행을 다녀갔다. 이는 3·1운동 이후 우리나라 각급 학교의 수학여행이 보편화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1918년 11월 1일 대구에서 경주 시내를 통과해 불국사까지 경동선 열차가 개통되면서 왕래가 더욱 수월해졌다.


1921년 한국 전통 양식으로 건립된 경주역은 1936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역사를 이전하며 신식 건물로 다시 지었다. 지붕은 기존 역사를 본떠 전통미가 느껴지게끔 기와를 올린 모양새다. 그럼에도 회색 철골과 통유리로 감싼 근래의 기차역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감이 묻어난다. KTX 신경주역 신설과 문화유산 보호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경주역은 2021년 폐역이 되었는데, 2022년 12월 2일 지역의 문화플랫폼 역할을 하는 ‘경주문화관1918’로 단장해 옛 역사를 보존·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던다.


선로 반대편의 옛 급수탑은 그대로 남았다. 급수탑이 세워진 1920년대 후반에는 증기기관차가 선로 위를 달렸다. 증기기관차는 기차 내에서 보일러를 가동하여 증기를 발생시켜야 하는 구조로 기차가 기관구로 입고될 때면 급수탑에서 용수를 보충하는 일이 기본이었다. 급수탑 가까이에는 석가탑을 닮은 10층 구조의 무사고 기원탑이 있다. 본래 일본인들이 신사참배에 필요한 구조물을 세웠던 자리로 알려져 있는데, 1955년 일제의 잔재를 없애고 열차의 안전 운행을 기원하는 의미로 다시 세운 것이라 한다.


옛 경주역을 품고 있는 황오동 일대는 철도관사 80여 채가 밀집했던 철도관사촌이다. 대전 소제동 철도관사촌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주택 안에 두 가구가 가운데 벽을 공유하는 ‘2호 연립주택’ 구조의 주택이 격자형으로 배치된 것이 인상적이다. 상당수의 관사가 헐리거나 증·개축되었지만 관사 번호를 적었던 문패, 관사 사이 울타리 역할을 했던 측백나무 등 관사촌의 흔적은 읽어낼 수 있다.


02.급수탑 03.황오동 철도관사촌 골목 풍경 04.황오동 철도관사촌

일제의 근대 도시계획으로 헐린 읍성

경주문화관1918 광장 앞 쭉 뻗은 대로를 따라 십여 분 걸으면 경주읍성(사적)에 다다른다. 1933년에 발행된 지리서 『동경통지』에 ‘읍성의 시축 연대는 불명이지만, 고려 우왕(1378)에 개축하였고 둘레가 4,075척, 높이가 12척 7촌으로 석축이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 때의 석축 읍성으로 추정된다.


경주읍성은 임진왜란 때 불타 이후 동·서·북문을 다시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소실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국방에 관심이 증가하면서 전국적으로 성곽 개수가 진행될 때 개축되어 전체 둘레 2.3㎞ 남짓 네모반듯한 평지성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자연지세를 따라 산자락을 타고 길쭉한 타원형으로 축조하여 전체 둘레가 18㎞에 달하는 서울 한양도성과 비교해 보면 옛 경주읍성의 규모와 특징이 더욱 선명해진다. 


안타깝게도 일제의 근대 도시계획에 따라 개축된 읍성 대부분이 헐려 현재는 동쪽 성벽만 50m 남짓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행인 것은 2002년부터 꾸준히 발굴 조사와 복원 사업이 추진되고 있어 고려에서 조선을 거쳐 근현대까지 경주 역사의 층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경주읍성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05, 06.경주읍성(사적) 07.경주문화원

생채기 난 자리에 다시금 새살이 돋기까지

경주읍성 주변으로 시간의 결이 다른 문화유산 여럿이 이웃하고 있다. 수령 600년이 넘는 은행나무 등 아름드리 고목이 우거진 경주문화원은 고려와 조선에 걸친 경주 관아 자리다. 향토사료관 등 문화시설을 갖추고 있기도 하지만 사계절 정취가 좋아 주민들이 산책 장소로 즐겨 찾는다. 한때 경주박물관으로 활용된 이곳에 국보 성덕대왕신종이 보존되기도 했는데,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이 경주시 인왕동으로 옮겨갈 때 성덕대왕신종은 옮겨갔지만 종각은 그 자리에 남겨 둔 것이 이색적이다.


08.동경관(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09.화랑수련원 10.경주 구 서경사 (국가등록문화유산)

경주문화원과 이웃한 동경관(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은 본래 신라 왕실에서 집기를 보관할 용도로 지은 건축물이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외국 손님이나 서울의 벼슬아치가 지방에 오면 머무는 관아의 객사 건물로 이용했다. 일제강점기 때 학교로 사용되다가 광복 후 6.25전쟁을 거쳐 일부가 헐리고 서쪽 건물만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몇 차례 이건되면서 형태 변화가 발생했지만 영·정조 시기의 역사성을 품고 있는 건축물로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문화원과 동경관 사이 화랑수련원 간판을 내걸고 있는 건축물은 1920년경 경주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이었던 구 야마구치병원으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건축물 자체도 독특하지만 1930년대 이 병원 의사 다나카 도시노부가 경주의 어느 골동품상에서 ‘신라의 미소’로 일컬어지는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를 구입했고, 훗날 경주박물관에서 그로부터 어렵사리 수막새를 기증받은 이야기가 얽혀 있어 눈길을 주게 된다.


한때 조선 태조의 어진을 모셨으나 일제강점기 인력거 보관소로 사용되었다는 집경전 석실을 지나 발걸음을 경주 구 서경사(국가등록문화유산)로 옮긴다. 서경사는 1932년경 일본 불교의 한 종파인 조동종에서 세운 사찰 건물이다. 일본에서 모든 자재를 들여와 일본 전통 불교 건축 양식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급경사의 기와지붕이 우리 전통 건축과 구분된다. 멋스럽다는 표현을 주저하게 되는 것은 묵직한 돌을 탄탄하게 쌓아 올린 경주읍성이 대부분 헐린 것과 달리 이 작은 사찰이 건축 당시와 크게 달라진 것 없이 보존되고 있다는 데 기분이 묘해졌기 때문이다.


경주읍성 둘레만 걸어도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난다. 출출한 기분에 경주 명물 황남빵을 한입 베어 무는데, 이 황남빵이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탄생한 근대기 주전부리라는 사실을 그제야 확인한다. 익숙한 경주의 신라로 넘어가볼까 하던 발걸음을 자연스레 다시 읍성길로 돌리게 되는 이유. 이제껏 몰라봐 왔던 겹겹의 시공을 조금 더 톺아보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글. 서진영(《하루에 백 년을 걷다》 저자) 사진.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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