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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산영루(山映樓) 옛터에서 만난 늦가을 정취
작성일
2019-11-26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1442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장가이자 정치가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1564~1635)는 37세 때인 1600년 10월에 예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5월에 병으로 체직(遞職)이 되었으나 8월에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고, 10월에는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을 겸하게 되었다. 11월에는 조사(詔使) 고천준(顧天埈)과 최정건(崔廷健)이 조선에 오자 원접사(遠接使)로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1602년 3월에 평양 영위사(平壤 迎慰使)가 되었다가 돌아와 대제학을 사직하였고, 8월에는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위에서 보듯 그는 37세부터 39세까지 3년간을 예조판서 자리를 맴돌며 양관 대제학을 지내는 등 벼슬과 문장 모두 이름을 날리는 득의의 시기였다. 이처럼 바쁜 와중에 그는 또 특별한 행적과 글을 남기게 되었는데, 바로 금강산과 삼각산을 여행한 일과 유람기를 남긴 것이다.

마음의 답답함을 풀려는 조촐한 계획

이정귀는 예조판서로서 화릉(和陵)을 보수하는 일을 위해 관동으로 갔고, 간 김에 오랜 염원인 금강산 유람을 하였는데, 그가 금강산에 다녀온 날짜는 1603년 8월 1일부터 30일까지였다. 그는 금강산에서 돌아온 뒤 보름 만인 1603년 9월 15일에 다시 삼각산을 유람하게 되었다. 그는 금강산을 유람하고 난 뒤에 금강산을 잊지 못하여 마치 고향을 떠나온 사람처럼 심정이 쓸쓸하고 즐겁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이 맡고 있는 예조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도 마음이 답답하여 세 차례나 해직을 청할 정도였다.


삼각산을 가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중흥사(重興寺) 주지 성민(性敏)의 초청에 의해 이루어졌다. 오랜 산문(山門)의 벗인 성민이 사미승 천민(天敏)에게 편지를 주어 “산중에 늦가을 서리가 내려 단풍잎이 한창 곱습니다. 며칠만 더 지나면 시들 것이니, 구경 오실 의향이 있으시면 이때를 놓치지 마십시오.”(이하 「유삼각산기」의 번역은 고전번역원, 이상하 역본을 따름)라고 청하였던 것이다. 이정귀는 금강산에 다녀온 후유증이 매우 심각하였고 업무에 지쳐 있던 때에 마침 성민의 초청을 받고 삼각산 산행을 결행하였다.

산중에 늦가을 서리가 내려 단풍잎이 한창 곱습니다. 며칠만 더 지나면 시들 것이니, 구경 오실 의향이 있으시면 이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이하 「유삼각산기」
01. 노적봉은 북한산의 산성주 능선에 있는 높이 716m의 봉우리이다. ⓒ김하람

이에 그는 혼자 가기는 적적할까 하여 신응구(申應榘, 1553∼1623)에게 함께 가기를 청하였고, 그 집의 적노(笛奴)인 억량(億良)과 함께 오라고 하였지만, 억량은 이미 다른 곳으로 불려가고 없었다. 그리고 이웃의 풍류가 있는 계성도정(桂城都正) 이각(李桷)에게 청하니 선비 박대건(朴大健)도 따라왔다. 가는 길에 종자(從者) 한 사람을 보내 적공(笛工) 이산수(李山守)를 불러오게 했더니, 종자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악사(樂師) 이용수(李龍壽)에게 물으니, 산수(山守)는 없다고 하더이다.” 하여, 피리 부는 사람을 데리고 가려 하였으나 모두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이정귀가 삼각산으로 처음 출발할 때는, 자신을 비롯하여 신응구, 이각, 박대건 네 사람과 종자 한 사람뿐이었고, 술 두 통과 말 한 필이 전부였다. 더구나 그는 양관 대제학을 지낸 현직 예조판서였지만,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얼굴까지 가리고 간 조촐한 산행이었다.

02. 중흥사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산에 있는 고려후기 승려 보우가 중수한 사찰이다. ⓒ김하람 03. 보물 제749호 고양 태고사 원증 국사탑의 유래와 형태 등의 설명이 적힌 안내판 ⓒ김하람

산영루 옛터에서의 늦가을 정취

이정귀가 거쳐간 곳 가운데 민지암, 중흥사, 산영루, 향옥탄, 노적봉 등은 모두 삼각산의 이름난 명소였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삼각산 8경시 가운데에는 백운대를 비롯하여 노적봉, 산영루가 들어가 있고, 연경재(硏經齋) 성해응(成海應)의 「산수기(山水記)」 가운데 「기경도산수(記京都山水)」에는 인왕산과 삼각산 두 곳이 소개되어 있는데, 삼각산에 대해서 “삼각산의 여러 명승 가운데 민지암(閔漬巖), 환희령(환喜嶺), 산영루(山映樓), 향옥탄(響玉灘)이 가장 아름답다.”라고 하여, 삼각산의 여러 승경 가운데 이정귀가 지났던 민지암, 산영루, 향옥탄 등이 포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가운데에서도 산영루가 가장 시인묵객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던 곳이다. 산영루(山映樓)는 삼각산의 태고사(太古寺), 중흥사(重興寺) 계곡이 합류되는 지점에 세워진 누각이다. 산영루는 정확하게 언제 건립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정귀의 「유삼각산기」에 “산영루의 옛터로 내려왔다”는 말로 보아 1603년 이전에 이미 터만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검색 자료 가운데 이정귀 이후 산영루를 읊은 한시 작품을 가장 일찍 남긴 사람이 정백창(鄭百昌, 1588~1635)이라는 점으로 미루어보면, 산영루는 1603년 이후 1635년 이전에 이미 중건이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1717년에 쓴 송상기(宋相琦, 1657~1723)의 「유북한기(遊北漢記)」에 “승려들이 산영루를 중수하였는데, 단청을 겨우 마쳤다.”라고 하였으니, 1717년에 중수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925년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가 북한산 일대를 휩쓸 때에 다시 유실되었다고 한다. 10개의 초석만 남아 있던 것을 고양시가 2014년 산영루를 복원했고, 경기도 기념물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04. 경기도 기념물 제223호 고양 북한산 산영루지. 산영루는 북한산성 내에 위치했던 누각으로,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 등 당대 많은 지식인 등이 이곳을 방문하여 아름다운 시문을 남겼다. ⓒ문화재청  05. 노적봉과 대동문, 북한산 대피소로 이어진 갈림길 ⓒ김하람

산영루를 읊은 시인은 정백창을 비롯하여 정약용(丁若鏞), 김정희(金正喜), 홍세태(洪世泰), 정래교(鄭來僑) 등 31인의 42수가 확인이 되는데, 조선 후기의 문인들 특히 중인 계층의 인물이 시를 많이 남긴 것을 볼 수 있다. 이들 가운데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는 「재유산영루(再遊山暎樓)」라는 시에서 산영루 앞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마치 그림 속에 있는 듯하다고 읊었는데, 조병현(趙秉鉉)은 「산영루서(山暎樓序)」에서 “피리와 노래는 없지만 시냇물 소리가 음향을 돕고, 비단 옷을 입은 미인은 없지만 산이 예쁜 모습을드러낸다.[無笙歌而澗流助響, 乏綺羅而山容呈姸]”라고 산영루의 뛰어난 경치를 묘사하였다.


조병현은 또 「산영루」라는 시에서 “시냇가의 새 우는 소리에 붉은 잎이 진다[澗鳥一聲紅葉落]”라고 하여 산영루의 가을 단풍이 어우러진 경치를 읊었는데,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는 「산영루에 앉아 단풍 든 나무를 오랫동안 감상하다가 갔다」라는 시의 1~4구에서 산영루의 늦가을 경치에 대한 단상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만 구름과 못을 보리라 생각했는데, 擬雲潭約
이처럼 기이한 경치를 볼 줄 알았으랴? 那知有此奇
사방의 산이 붉은 단풍 속에 있는데, 四山紅葉裏
하루 종일 푸른 시냇가에서 이를 즐기네. 盡日碧溪湄。


홍석주는 산영루에서 구름과 못 정도 볼 것으로 기대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붉은 단풍을 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하여, 뜻밖에 산영루의 가을 단풍을 만난 마음을 노래하였다. 산영루의 가을 단풍에 대해 박준원(朴準源)은 그의 맏아들에게 보내는 「여백자종보(與伯子宗輔)」라는 편지에서 자신의 아들이 가 있는 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북한산의 산영루의 경치에 비겨 “생각하건대 (네가 있는 그곳에는) 꽃이 온 산에 붉은 비단을 펼쳐놓은 듯 피었을 것이니, 마땅히 북한산 산영루의 가을 단풍과 백중을 다툴 것이다.”라고 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삼각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산영루는 늦가을 붉게 물든 단풍으로 더욱 이름을 날렸던 것이다.

06. 사실상 북한산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대서문. 대서문은 구파발로부터 평지를 따라 접근할 수 있었기에 옛사람들의 북한산 통로는 대부분 대서문으로 통했다. ⓒ김하람

이정귀도 증흥사에서 자고 난 뒤에 산영루와 향옥탄의 단풍이 어우러진 늦가을 정취에 대해 “아침 일찍 일어나 걸어서 산영루(山映樓)의 옛터로 내려왔다가 이어 향옥탄(響玉灘)으로 갔다. 때는 첫서리가 내린지 겨우 몇 밤이 지난 터라 단풍은 성성이의 피로 물들인 듯 붉고 푸른 솔과 노란 국화가 시냇가 골짜기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으니, 참으로 금수(錦繡)의 세계였다.”라고 묘사하였다. 산영루의 경치를 길지 않게 이야기하였지만, 붉은 단풍과 그것이 푸른 솔, 노란 국화 그리고 골짜기의 맑은 시냇물과 어우러진 모습을 묘사했다. 이를 그는 한마디로 비단에 수놓은 듯한 모습이었다고 하였다.


이정귀는 또 노적봉(露積峯)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산영루의 골짜기에서 더욱 멋과 풍류가 어우러진 놀이를 하였다. 이정귀는 이 금수의 세계에서 출발할 때 함께 간 사람들, 그리고 뒤에 합류한 적노 억량, 적공 이산수, 그리고 금수(琴手) 박모(朴某)와 더불어 내려오는 길에 신선놀음을 하였으니, “자제는 단풍 가지를 꺾어 머리 위에 꽂았고 나는 국화꽃을 따서 술잔에 띄웠다. 취기가 오르자 더욱 즐거워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춤을 추었으며, 거문고와 젓대가 어우러져 맑고 미묘한 음악을 연주하니 모두 천고에 드문 소리였다.”라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유삼각산기」에는 이때의 정황과 감흥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예나 이제나 삼각산 산행을 하면서 이처럼 멋과 풍류가 넘치고 이를 즐긴 경우가 또 있을까? 산영루의 경치와 그곳을 찾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행한 멋들어지고 풍류가 넘치는 일들은 모두 인간세상의 것이 아니라 신선세계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정귀는 자신의 일행 스스로 그렇게 느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신선인 양 여겼을 것이라 했다. 비록 길지 않은 1박 2일의 산행이었지만, 신선세계에 노닐다 온 것 같은 느낌을 이정귀는 이렇게 남겼다. 이 일은 비록 수백 년 전에 벌어졌던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도 산영루의 금수 세계, 그리고 그곳에서 있었던 이정귀 등의 그 멋과 풍류를 머릿속에 그리면 읽는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글. 윤호진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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