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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프라이드치킨과 포계 사이의 오해와 진실 - 닭고기 이야기
작성일
2018-08-0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12683

프라이드치킨과 포계사이의 오해와 진실 - 닭고기 이야기 닭의 억울함(?)을 푸는 걸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흔히 ‘꿩 대신 닭’이라고 말한다. 꿩고기가 좋긴 한데 부득이 하면 그보다 못한 닭고기로 대체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과연 꿩고기가 닭고기보다 맛있을까? 그렇지 않다. 꿩은 아주 작다. 하늘을 날아다니니 뼈도 약하다. 먹기 불편하다. 잔가시 수준의 뼈는 일일이 발라내기도 힘들다. 살과 뼈를 같이 다진다. 꿩고기 완자는 뼈가 씹힌다. 꿩은 야생의 것이었다. 냄새도 난다. 꿩이 좋은 점? 공짜다.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다. 몇 마리 잡았다고 숫자가 줄지도 않는다. 닭은 사육한다. 모이, 사람의 손이 필요하다. 먹고 나면 ‘우리 집 닭’의 숫자가 줄어든다. 꿩 대신 닭인 진짜 이유다. 01. 스포츠 경기 시즌이면 더욱 인기를 구가하는 프라이드치킨 ⓒ셔터스톡

닭고기의 역사는 길다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다. 이른바 난생(卵生)이다. 신라의 별칭은 계림국(鷄林國)이다. 나라 이름에 ‘닭’이 들어 있다. 가락국을 세운 수로왕도 알에서 태어났고 고구려 동명왕도 마찬가지. 어머니 유화부인이 알을 낳았고 그 알에서 태어났다. 닭은 오래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다.

중국 후한 때 태학에서 같이 공부했던 범식과 장소는 2년 후 장소의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약속한 날, 장소는 범식을 위해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었다. 장소의 부모는 “오래전 약속이고 거리가 먼데 범식이 과연 오겠느냐?”고 했다. 장소는 “범식이 신의가 있는 선비이니 반드시 올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범식이 왔다. 이른바 ‘계서약(鷄黍約)’이다. 닭고기(鷄)와 기장(黍)밥에 얽힌 고사다. 닭은 오래전부터 친근한 식재료였다. 친근한 식재료니 먹는 방식도 다양했다.

가장 널리 사용한 조리법은 찌거나 삶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흔했던 닭요리 법은 ‘백숙(白熟)’이다. 오늘날의 백숙은 조선시대의 ‘연계증(軟鷄蒸)’이다. 닭고기를 부드럽게 쪄낸 것이다. 연계증은 ‘연계백숙(軟鷄白熟)’ 혹은 물로 쪘다고 수증계(水蒸鷄)라고도 했다(『음식디미방』). ‘영계백숙’은 엉터리다. 어린 닭을 푹 곤 것이 ‘영계’라고 생각하지만 ‘영계’라는 닭은 없었다. 중국 명나라 때 이시진의 『본초강목』에 영계(英鷄)가 있지만 어린 닭이 아니다. 『본초강목』의 ‘영계’는 ‘석영(石英)을 먹여 기른 닭’이란 뜻이다. 영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어리고 야들야들한 닭이 아니다. 『일성록』 정조 24년(1800년) 5월의 기록에 세 종류의 닭이 등장한다. “생계(生鷄) 세 종류는, 여러 해 자란 진계(陳鷄)와 부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연계(軟鷄), 진계도 연계도 아닌 활계(活鷄)”라는 내용이다.

이 내용 끝부분에 진계 한 마리의 가격이 활계 두 마리의 가격과 같다는 내용도 있다. 묵은 닭일수록 가격을 더 높이 쳤음을 알 수 있다.

포계 炮鷄 닭고기구이 요리로 살찐 닭 한 마리를 24~25개로 토막을 내어둔다. 기름을 넣고 그릇을 달군 후 토막 낸 닭고기 넣고 뒤집어 볶은 다음 청장과 참기름을 밀가루에 섞어 즙을 만들어 식초와 함께 낸다.

조선시대에도 프라이드치킨을 먹었다?

재미있는 닭요리 법으로는 포계(炮鷄)를 손꼽을 수 있다. 포계는 조선 전기의 의관 전순의(생몰년 미상)가 쓴 『산가요록(山家要錄)』에 그 내용이 나타난다. 전순의는 조선 초기 세종, 문종, 세조의 세 임금을 모신 의관이다. “닭 한 마리를 24~25개로 토막낸다. 기름을 붓고 그릇을 달군 후 고기를 넣는다. 손을 빠르게 움직여 뒤집어 볶는다. 청장(淸醬)과 참기름을 밀가루에 섞어 즙을 만들어 식초와 함께 낸다.”

얼핏 오늘날 프라이드치킨과 비슷해 보이지만 엄밀히 말해 포계를 ‘프라이드치킨’으로 여기는 것은 무리다. 오늘날 우리가 ‘프라이드치킨’이라고 부르는 것은 ‘딥 프라이드치킨(deep fried chicken)’이다. 딥 프라이드치킨은 고기를 기름에 풍덩 빠뜨려서 고온으로 튀기는 것을 말한다. 딥 프라이드치킨은 기름에 지지는 것과는 다르다. 『산가요록』에는 “손을 빠르게 움직여 뒤집어 볶는다”고 했다. 튀기는 것이 아니라 기름에 지졌다는 뜻이다. 『산가요록』의 포계는 ‘기름에 지진 닭고기 구이’ 요리쯤 된다.

혹자는 ‘청장과 참기름을 밀가루에 섞어 만든 즙’을 두고 양념 치킨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역시 무리가 있다. ‘딥 프라잉(deep frying)’ 방식을 사용하려면 고기의 튀김옷이 필요하다. 딥 프라잉 방식은 일본인들의 덴푸라(tempura, 튀김)로 반드시 튀김옷이 필요하다. 『산가요록』의 양념은 지진 고기를 찍어먹는 용도다. 둘은 전혀 다르다.

‘포계’의 ‘포(炮)’는 ‘굽다’ ‘지지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닭고기 지짐이 혹은 기름에 구운 닭고기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기름이 무척 귀했다.

명재 윤증(1629~1714)은 조선시대 큰 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86년간의 삶에서 단 한번도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지만 소론의 영수로 추앙된 백의정승이다. 그가 제사에 대해 한 유훈이 재미있다. “제사상에 떡이나 유과, 전을 올리지 마라”고 했다. 일손이 많이 들뿐만 아니라 당시엔 무척 귀했던 기름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딥 프라이드치킨이 불가능했던 것은 닭고기가 아니라 기름 때문이다. 오늘날 가정에서 튀김 음식을 만들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 번 사용 후 버려야 하는 기름이 아깝기 때문이다. 생선, 고기, 전 등을 지지기는 하지만 기름에 튀기지 않는 이유다.


02. 명재 윤증 초상. 조선시대 큰 유학자 중 한명인 명재 윤증은 “제사상에 떡이나 유과, 전을 올리지 마라”며 제사에 대해 재미있는 유훈을 남겼다. ⓒ한국데이터진흥원 03. 프라이드치킨은 고기를 기름에 풍덩 빠뜨려서 고온으로 튀기는 ‘딥 프라이드치킨(deep fried chicken)’ 방식으로 만든다. ⓒ셔터스톡 04. 포계는 프라이드치킨과 달리 기름을 붓고 그릇을 달군 후 토막 낸 닭고기를 넣고 볶아 만드는 방식이다. ⓒ셔터스톡 05. 요즘은 브랜드마다 프라이드 방식 외에 오븐에 굽는 방식의 치킨 등 다양한 메뉴를 내놓고 있다. ⓒ셔터스톡 06. 연포탕(軟泡湯)은 두부탕이다. 닭고기를 삶아낸 국물에 두부를 넣어 끓인 뒤 닭고기 살을 고명으로 얹어 먹는다. ⓒ셔터스톡

다산 정약용도 먹었던 닭고기 국물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에는 참 가슴 아픈 닭고기 이야기가 나온다. 태종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양녕, 효녕, 충녕, 성녕대군이다. 성녕대군은 늦둥이다. 늦둥이니 태종과 왕비 원경왕후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었다. 귀한 늦둥이는 14살에 죽었다. 부부는 낙심한다. 성녕대군이 죽은 후, 어전회의에서 태종이 말한다. “성녕의 묘소에 쇠고기를 사용하면 좋겠지만 쇠고기는 귀하다. 명나라 사신이 올 때나 종묘 제사 때 쇠고기를 준비하면 그때 성녕의 묘소에도 올리도록 하라. 평소에는 닭을 사용하면 좋겠는데 예법에 닭고기를 사용하는 것이 어긋나지 않겠는가?” 신하들이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답하자 태종은 시간에 맞춰 닭고기를 올리도록 한다. 소 대신 닭인 셈이다.

당연히 낙지가 들어가야 할 것 같은 연포탕(軟泡湯)은 원래 두부탕이다. ‘포(泡)’는 거품이다. 두부를 만들 때 거품이 일어나기 때문에 두부를 ‘포’라고 불렀다. 연포는 연한 두부, 부드러운 두부다. 조선 후기에는 연포탕을 끓여먹는 모임이 여기저기 성행한다. 연포탕을 끓일 때 닭고기를 사용한다. 고기는 고명으로 쓰고 고기를 삶고 난 국물은 연포탕의 국물로 사용한다. 연포탕이되 프리미엄 연포탕인 셈이다. 야외에서 연포탕을 끓여먹는 모임을 연포회(軟泡會)라고 부른다. 풍치가 좋은 산이나 개울가에서 닭을 잡고, 두부 탕을 끓여 먹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런 연포탕, 연포회가 제법 있었다. 다산 정약용도 『다산시문집』 제7권 「절에서 밤에 두붓국을 끓이다」에서 연포탕, 연포회를 언급한다. “다섯 집에서 닭을 한 마리씩 추렴하고, 주사위처럼 썬 두부를 띠 풀에 꿰어 준비한다.”고 했다. 두부는 주사위처럼 네모나게 썰고 국물, 고명용으로 닭을 준비했다.

조선 후기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도 음력 시월의 음식으로 연포탕을 꼽는다. 두부를 잘게 썰어 꼬챙이에 꿰서 지진 다음 닭고기와 함께 끓인 것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인 목임일이나 다산 정약용이 먹었던 연포회의 연포탕과 『동국세시기』의 연포탕은 비슷하다. 모두 ‘닭고기+두부+닭고기 국물’이다.


글. 황광해(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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