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노력으로 이룬 성취, 계승으로 꽃핀 전통 이주환 가곡명인
- 작성일
- 2018-08-01
- 작성자
- 국가유산청
- 조회수
- 1042
‘가곡’이라 하면 대부분은 서양 클래식을 떠올리겠지만 원래 가곡은 시조를 소규모 국악 관현악 반주에 맞추어 남성과 여성들이 부르는 성악 장르이다. 그 구성은 남성이 부르는 노래인 남창(男唱) 26곡과 여성이 부르는 노래인 여창(女唱) 15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남창은 울림이 있고 강하며 깊은 소리가 특징인 반면, 여창은 고음의 가냘픈 소리가 특징이다. 음계는 장엄하면서도 서정적인 것이 특징이다. 평화롭거나 구슬픈 느낌을 준다. 세련된 멜로디와 진보적 악곡(樂曲)이라는 점 또한 오랜 세월 명맥을 유지해온 가곡이 찬사를 받는 이유이다.
국가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의 초대 예능보유자인 이주환(李珠煥, 1909~1972)은 1909년 서울 종로구 관수동에서 이직상과 최감녀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관향은 초산(楚山), 원래의 이름은 복길(福吉)이었다.
1926년 3월 교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같은 해 4월 이왕직아악부양성소 3기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입학 당시 전공은 가곡이 아닌 피리였다. 이후 하규일에게 가곡·가사·시조를 전수받으면서 훗날 정가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게 된다. 한편 이왕직아악부 양성소 3학년이 된 그는 18명의 동기생 중 마음 맞는 친구 6명과 함께 아악(雅樂)의 복고를 위한 ‘전악회’를 결성한다. 그 구성원은 거문고에 성경린, 가야금에 김강본, 대금에 임장길, 해금에 왕종진, 그리고 피리에는 이주환과 김보남이었다. 이주환과 김보남은 번갈아가며 피리를 불거나 장구를 잡았다고 한다. 이렇듯 이주환은 매우 진취적으로 아악을 공부하며 동급생을 이끌었다.
1931년 3월 이왕직아악부양성소 졸업 후, 18명의 졸업생 가운데 이주환, 성경린, 김보남, 김강본, 이재천 등 다섯 사람은 우등졸업으로 아악수보를 거치지 않고 바로 아악수로 임명이 되었다.
1968년 6월 그는 복길이라는 본명을 버리고 주환(珠煥)으로 개명했는데, 이 무렵 종로권번에서 한성준 선생에게 승무를 익히면서 그것을 무보로 채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1941년에는 아악사로 승진했으며, 1942년 종로권번의 가곡과 무용의 사범(師範)이 되었고, 1944년 무렵에는 훗날 만든 가곡보의 전신이 되는 <만년장환지곡>을 등사해서 펴내게 된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이왕직아악부가 구왕궁아악부로 바뀌는데 이주환은 구왕궁아악부에서 아악사들의 교양부장을 맡다가 1946년 9월 아악사장으로 승진했다. 해방 이후 그는 가곡이나 시조의 보급에 보다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매달 거르지 않고 시조강습을 하여 수강자가 크게 증가하였고, 그 결과 시조를 중심으로 한 모임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드디어 1946년 7월, 가람 이병기를 회장으로 하여 시조연구회를 결성하고 시조강습회를 개최한다. 1947년에는 당시 문교부가 주최한 제2회 전국음악경연대회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그는 이후 아악사장의 자격으로 시조 강습을 통해 국민개창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1950년 구왕궁아악부가 국립국악원으로 승격된 후 국립국악원 초대원장(1951~1961)을 역임했다.
이주환은 성악가로서의 목을 타고난 것은 아니지만, 피나는 노력을 통해 서서히 실력을 키워 주위에서 추앙을 받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는 평생 정가의 보급에 앞장선 공로로 1956년 12월 국악진흥회가 주최하는 제1회 국악상 공로상을 수상했고, 1958년 5월에는 제7회 서울특별시 문화상(음악부분)을 수상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매우 차분하게 주위를 정리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사후에 <금합자보> 등 귀중한 국악 자료들이 사라질 것을 염려해 이 중 일부는 주위 사람들에게 또 일부는 국립국악원에 희사했다. 그리고 1972년 11월 30일 자택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글. 김진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