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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백성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깃든 그림자, 앙부일구
작성일
2018-06-29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7813

백성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깃든 그림자, 앙부일구 해시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단순한 시계이다. 인간은 해가 뜨면 생기는 그림자라는 자연현상을 이용하여 하루, 한 달, 일 년 같은 시간의 마디를 시계라는 도구로 기록해 왔다. 흔히 해와 그림자는 밝음과 어둠 또는 긍정과 부정이라는 상반되는 이미지로 다가온다. 하지만 해와 그림자는 서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는 상대이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에서 임금과 백성은 마치 해와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일까? 조선 초에 만든 해시계인 ‘앙부일구’는 조선이 멸망하는 19세기 말까지 그 생명력을 이어갔다. 01,02. 앙부일구(보물 제845호). ‘가마솥 모양의 해시계’라는 뜻으로, 세종 때 처음 만들어져 한양에서 사람들이 많이 오가던 혜정교와 종묘 남쪽 길 옆에다가 설치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시대의 시간 표현, ‘시(時)’와 ‘각(刻)’

“일식(日食)이 있으므로, 임금이 소복(素服)을 입고 인정전의 월대 위에 나아가 일식을 구(救)하였다. 시신(侍臣)이 시위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백관들도 또한 소복을 입고 조방(朝房)에 모여서 일식을 구하니 해가 다시 빛이 났다. 임금이 섬돌로 내려와서 해를 향하여 네 번 절하였다. 추보(推步)하면서 1각(刻)을 앞당긴 이유로 술자(術者) 이천봉(李天奉)에게 곤장을 쳤다.”- 『세종실록』 세종 4년(1422) 1월 1일

1422년(세종 4) 정월 초하루, 창덕궁 인정전에서 개기일식 때 벌어진 일이다. 흥미로운 것은 술자 이천봉이 추보(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것)하면서 1각을 앞당긴 이유로 곤장을 맞았다는 것이다. 도대체 ‘1각’이 무엇이기에 이천봉은 곤장까지 맞았을까?

요즘은 시간을 나타내는 단위로 ‘시, 분, 초’를 쓰지만, 조선시대에는 달랐다. 먼저 하루를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唇),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라는 12지(十二支)로 시간의 마디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 열두 가지 ‘시(時)’를 또다시 둘로 나눠 앞을 ‘초(初)’라 하고, 뒤를 ‘정(正)’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자시(子時)’는 밤 열한 시부터 오전 한 시까지를 일컫는데, ‘자초(子初)’는 자시의 첫 무렵인 밤 열한 시를 말하며 ‘자정(子正)’은 자시의 한가운데인 밤 열두 시를 이른다. 그러고 보면 조선시대에도 하루를 요즘처럼 24시간으로 구분하였던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시(時)를 다시 ‘일각, 이각, 삼각,반각(2분의 1시), 오각, 육각, 칠각, 정각’처럼 여덟으 로 나누었는데, 요즘으로 치면 1각(一刻)은 약 15분쯤에 해당한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세종실록』에 나오는 이천봉이 곤장을 맞은 까닭은 일식(日食)의 예보 시간을 일각, 곧 15분이나 앞당겼기 때문이다. 왕을 상징하는 해가 사라지는 일식을 하늘이 보내는 경고로 여기던 때에 잘못 예보한 결과였던 것이다.

이처럼 ‘시(時)’와 ‘각(刻)’으로 이루어진 조선시대의 시간 시스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유물이 바로 앙부일구(仰釜日晷)이다. 앙부일구는 1434년에 세종이 장영실·이천·김조 등에게 명하여 만든 해시계로, 시계판이 가마솥처럼 오목한데다 하늘을 우러르고 있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앙부일구는 해의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시곗바늘 ‘영침(影針)’과 해의 그림자가 비치도록 가운데가 오목하면서도 둥근 ‘시반(時盤)’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침은 북극을 향해 비스듬히 세워졌는데, 동쪽에서 떠오른 해가 서쪽으로 지면서 생기는 그림자는 태양의 고도와 계절에 따라 그 길이가 달라진다. 또 시반의 안쪽 바닥에는 세로선 일곱 줄과 가로선 열세 줄이 그어져 있는데, 세로선은 시각을 나타내는 선이고 가로선은 24절기를 알 수 있는 선이다.

시각선은 해가 뜨는 묘시(卯時, 5~7시)부터 해가 지는 유시(酉時, 17~19시)까지 일곱 개이며, 각각의 시각선 사이에는 1각(15분)을 뜻하는 선이 여덟으로 나뉘어 있다. 또 열세 줄의 가로선을 따라가 보면 시반의 왼편에는 동지부터 하지, 오른편에는 하지부터 동지까지의 24절기가 표시되어 있다. 그래서 영침의 그림자는 동지 때 가장 길기 때문에 시반의 바깥쪽 계절선에, 하지 때는 가장 짧기 때문에 시반의 안쪽 계절선에 자리한다. 그런데 시각을 알려 주는 해시계인 앙부일구에 왜 24절기를 나타내는 가로선을 그려 놓은 것일까?

03. 세종대왕 어진. 세종은 1434년에 장영실·이천·김조 등 에게 해시계를 만들도록 명했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 04,05. 간평일구·혼개일구(보물 제841호). 두 개의 해시계를 하나의 돌에 새긴 매우 독특한 형태이다. 상공의 태양운행과 시간을 알 수 있는 간평일구와 24절기와 시간을 알 수 있는 혼개일구를 나란히 두었다. ⓒ국립고궁박물관
06. 그림자가 닿는 면이 수평면을 이루는 평면해시계. 큰 원을 문자판에 그리고, 그림자를 나타내기 위한 삼각형의 영표(影標)를 세웠다. ⓒ국립고궁박물관 07. 돌로 만든 원형의 해시계. 시반면에 있는 2개의 구멍에 해그림자를 만들 수 있는 시표를 세워 간략한 시간과 절기를 측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서울역사박물관 08. 휴대용 앙부일구(보물 제852호). 세로 5.6㎝, 가로 3.3㎝, 두께 1.6㎝의 돌로 만들었으며, 서울의 위도를 표준으로 하였다. 또한 제작자의 이름과 제작 연대(1871)가 새겨져 있어 학문적 가치가 높다.ⓒ문화재청
앙부일구 仰釜日晷 세종 16년(1434)에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만들었던 해시계로 시계판이 가마솥같이 오목하고, 이 솥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둥근 지구 모양을 표현한 것이고 작은 크기로도 시각선, 계절선을 나타내는데 효과적이다.

하늘을 관찰하여 백성들에게 때[時]를 알린 까닭

중국 고전인 『서경(書經)』의 ‘요전(堯典)’에는 “일월성신을 역상(曆象)하여 삼가 백성에게 때를 알린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은 하늘의 움직임을 살펴 백성들에게 농사에 필요한 시기를 제때 알려 준다는 ‘관상 수시(觀象授時)’를 뜻한다. 농사를 중시하고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에서도 관상수시는 임금의 중요한 책무 가운데 하나로 여겼다. 하지만 관상수시를 하려면 천문(天文)을 정확히 관측하여 만든 책력(冊曆,달력)이 필요한데, 세종 이전까지는 중국에서 만든 책력만 사용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천자(天子)인 황제만이 책력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 책봉·조공 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에서는 따로 책력을 만들 수 없었다. 그런데 중국의 책력은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아 이천봉처럼 실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북경과 한양의 고도 위치가 달라 일식이 발생하는 시간도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종은 일식 관측 때 ‘1각(刻)’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을 만큼 ‘관상수시’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1433년(세종 15)에 정인지, 정초, 정흠지 등에게 명하여 『칠정산 내편』을 편찬하도록 하고, 뒤이어 이순지, 김담 등에게는 회회력(아라비아 역법)을 바탕으로 조선의 실정에 맞게 고친 『칠정산 외편』을 만들게 했다. 바로 이러한 세종의 애민정신이 농사에 필요한 24절기를 백성들이 제때 알 수 있도록 앙부일구에 달력 구실을 하는 계절선을 그려 놓은 것이리라.

이처럼 세종이 백성들을 향한 ‘관상수시’를 실천하려 했던 의지는 『세종실록』의 또 다른 기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1434년(세종 16) 10월 2일에 집현전 직제학 김돈은 “처음으로 앙부일구를 혜정교(惠政橋, 지금 의 광화문 네거리)와 종묘(宗廟) 앞에 설치하여 일영(日影, 해의 그림자)을 관측하였다.”면서 아래와 같이 설명을 덧붙였다.

“모든 시설에 시각보다 큰 것이 없는데, …… 신(神,12지신)의 몸을 그렸으니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것이 요, 각(刻)과 분(分)이 소소(昭昭)하니 해에 비쳐 밝은 것이요, 길옆에 설치한 것은 보는 사람이 모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백성들이 만들 줄을 알 것이다.” - 『세종실록』 세종 16년(1434) 10월 2일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처음으로 만든 앙부일구에는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도 시각을 알 수 있도록 열두 동물을 그려넣고, 이것을 사람들이 많이 오가던 혜정교와 종묘 남쪽 길 옆에다가 설치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앙부일구 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백성들이 만들 줄을 알 것이다.”라고 한 김돈의 말처럼 단순히 ‘관상수시’를 넘어서는 실용성을 갖춤으로써 그 생명력을 이어갔다. 조선 후기에는 오목한 해시계에다가 수평과 방위를 맞출 수 있는 나 침반이 함께 있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휴대용 앙부일구가 등장하였다. 주로 여행이나 군사용 목적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특히 부채에 매다는 선추(扇錘)로도 쓰인 해시계는 금강산 유람을 떠나는 양반들한테 매우 편리하였을 것이다. 물론 장터를 바삐 오가던 사람들한테도 이런 휴대용 앙부일구는 점점 더 필요했으리라.

관상수시로 상징되는 해가 실용성이라는 그림자를 만났을 때, 자연현상을 이용한 가장 단순한 원리의 해시 계는 조선이 끝나는 19세기 말까지도 그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


글. 김종엽(역사콘텐츠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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