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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고 각궁으로 활을 쏘다
작성일
2017-09-28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10244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고 각궁으로 활을 쏘다 -  무용총의 <수렵도>, 김홍도의 <활쏘기>와 강희언이 그린 <사인사예(士人射藝)>  예로부터 활을 쏘아 동물을 사냥하고 몸과 마음을 단련했던 선조들. 땅에 발을 단단히 디딘 후 목표물을 향해 겨누었던 활에는 흔들림 없는 선조들의 강인한 기개가 실려 있었다. 활쏘기의 역사와 목적, 그리고 자세의 의미를 살펴보고 물소뿔로 만들어진 활에 새겨진 이야기를 읽어보자. <수렵도>, 무용총 주실서벽, 5세기 후반 ⓒ『세계문화유산 고구려고분벽화』

우리 민족의 삶과 함께 한 ‘활’

우리 민족의 활쏘기는 그 역사가 아주 깊다. 중국인들은 동방의 이민족을 동이(東夷)라 표현했는데 여기에서 이(夷)는 큰 활(大弓)이라는 뜻이다. 고구려의 건국 시조인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이름이 주몽으로 7세부터 활과 화살을 직접 만들어 활쏘기를 즐겼는데 그때마다 백발백중이었다고 전한다. ‘주몽(朱蒙)’이란 이름도 ‘활을 잘 쏘는 자(善射者)’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고구려인의 활쏘기 실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남아 있다. 무용총의 널방 오른쪽에 그려져 있는 <수렵도>에는 다섯 명의 궁사가 말을 타고 달리면서 사슴과 호랑이를 사냥하는 장면이 들어 있다. <수렵도>를 그린 사람은 활 쏘는 인물의 특징이 잘 드러나도록 다양한 각도에서 동작을 표현했다. 네 명은 우궁(右弓)으로 그렸고, 말을 타고 달리다가 뒤를 돌아보며 활시위를 당기는 인물은 좌궁(左弓)으로 그렸다. 다른 인물들의 말이 하늘을 날아갈 듯 다리가 쫙쫙 벌어진 반면 맨 뒤에 따라 오는 인물의 말은 방금 달리기를 시작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들의 탁월한 사냥 실력은 말 타는 기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냥꾼들은 말 위에 걸터앉아 오로지 등자(橙子)에 올려놓은 다리로만 말을 다루면서 두 손으로 활을 쏜다. 화가는 다섯 명의 인물을 통해 사냥의 시작에서부터 맹수를 쫓아 격렬하게 달리며 활을 쏘는 사냥의 절정까지 실감 나게 장면을 묘사했다. 이것은 삼국시대 때 사냥이 매우 성행했음을 말해준다.

김홍도, <활쏘기> 종이에 담채, 27×22.7cm ⓒ국립중앙박물관

활쏘기의 목적과 자세

활은 무(武)와 예(禮)를 담은 무기로 전쟁용, 사냥용, 군사훈련용, 의례용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활쏘기는 전쟁이 발생하면 호국의 의미였으며, 평상시에는 사람의 심성을 수양하는 행위로 사용되었다. 활은 인류의 삶과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우리 민족은 특히 활을 중시했다. 칼이나 막대기는 백병전에 사용하는 살상 무기로 중국의 장창(長槍)과 일본의 칼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칼이나 창보다는, 성 위에서 성 밖으로 쏘기에 가장 적합한 무기인 활을 선호했다. 활을 많이 사용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이 적에게 다가가 직접 죽이는 것보다는 다가오는 적을 멀리 쫓아버리는 목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활쏘기는 오랫동안 전쟁용으로 사용되었지만 18세기 중엽에 조선군의 군비체제가 화약류와 총포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활쏘기 역시 군사적인 목적보다는 양반사대부들의 심신 단련을 위한 용도로 점차 굳어지게 되었다. 김홍도가 그린 <활쏘기>와 강희언이 그린 <사인사예(士人射藝)>를 보면 조선 후기에 활쏘기가 양반 사대부들의 전유물을 넘어 신흥 사대부에서 중인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지지를 얻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활쏘기는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의 육예(六藝) 중 하나로 공맹(孔孟)을 비롯한 성현들이 한결같이 선비가 배워야 할 과목으로 여겨 그 가치와 의미를 강조했다. 『논어』「팔일」에는 공자(孔子)가 “군자는 경쟁하는 바가 없으나, 경쟁하는 바가 있다면 반드시 활쏘기일 것이다”라고 말한 내용이 적혀 있어 활쏘기(射禮)에 군자의 풍도가 있음을 강조했다. 활쏘기는 무과(武科)의 필수과목으로 무인들에게는 신분상승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국왕이 종친 및 문무대신들과 함께 행하는 활쏘기 의식을 그린 그림 <대사례도(大射禮圖)>를 보면 활쏘기가 무인들뿐만 아니라 역대제왕과 종실은 물론 문인들까지 심신수련을 위해 진력한 활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성군정치를 펼친 정조는 활쏘기 솜씨가 뛰어난 왕이었다. 고종황제도 활쏘기를 즐겨했는데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활터인 황학정(黃鶴亭)은 고종황제가 활을 쏘던 경희궁 활터의 후신이다. 활쏘기를 통해 재능 있는 선비를 선발하는 향사례(鄕射禮)는 성리학의 전래와 더불어 조선에 전해져 조선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시대 이후부터 실시되기 시작했다. 향사례는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전국 각지에서 시행되었는데 군사적인 목적으로 무사를 선발하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선비들이 몸과 마음을 수련하고 예를 실천하는 방법으로 시행된 의례였다.

활쏘기는 활을 들었다가 당겼다 놓는 세 가지 동작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단순한 동작 속에는 결코 단순하지 않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활을 쏘는 자세(弓體)는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正心正己). 발의 위치는 정(丁)자도 아니고 팔(八)자도 아니게 둔다(非丁非八). 활을 들었을 때는 상체의 힘을 빼고 복부를 단단히 하며(胸虛腹實), 활을 쥔 줌손은 태산을 밀어내듯 당당하게 버텨야 한다(前推泰山). 마지막으로는 깍지손이 호랑이 꼬리를 잡듯이 시위를 뒤로 당겨 활을 쏘아야 한다(後握虎尾). 이 모든 과정은 순식간에 이루어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정신집중이라고 할 수 있다.

강희언, <사인사예> 종이에 담채, 26×21cm ⓒ개인소장

우리 활, 복합궁의 우수성

활쏘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활의 성능이다. 특히 화살을 날려 목표물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사정거리는 활의 생명력을 좌우한다. 우리나라의 활이 다른 나라의 것에 비해 우수한 비결은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크기가 작다는 것이다. 우리 활은 120~130cm로 세계에서 가장 작다. 크기가 작으면 그만큼 휘어지는 탄성이 좋아 더 멀리 날아갈 수 있어 정확도와 파괴력에서 압도적인 능력을 자랑한다. 두 번째 비결은 복합궁(複合弓)이라는 사실이다. 한 가지 재료로 만든 단순궁이 아니라 7가지 이상의 재료를 조합해 만든 복합궁이다. 이중화(李重華)가 쓴 『조선의 궁술』에는 복합궁의 재료로 물소뿔, 뽕나무, 참나무, 대나무, 쇠심줄, 어교, 명주실 등이 언급되어 있다. 이렇게 우리 활은 작으면서 여러 재료가 조합된 덕분에 훨씬 긴 사정거리를 갖게 되고 엄청난 파괴력을 갖게 되었다.

우리 활은 복합궁이면서도 각궁(角弓)이다. 활 이름에 뿔 각(角) 자를 쓴 이유는 그 안에 물소뿔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물소뿔은 우리나라에서는 겨울 날씨 때문에 구할 수가 없어 동남아시아에서 농경용으로 사육된 것을 중국 등지에서 수입했다. 그 때문에 이웃나라에 우수한 무기를 만드는 재료를 내어줄 수 없다는 중국과 종종 외교적인 마찰을 일으킬 때도 있었다. 같은 뿔로 만든 활도 빛깔에 따라 부르는 이름을 달리 했다. 검은색 뿔을 붙인 활은 흑각궁(黑角弓)이라 하고, 흰색 뿔을 붙인 활은 백각궁(白角弓)이라 불렀다. 특히 백각궁은 그 희소성 때문에 활의 가치도 귀중하게 여겼지만 성능은 흑각궁과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우리 활은 고대로부터 전쟁과 수렵뿐만 아니라 연희와 의례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또한 관리등용과 군사적 필요성은 물론 심신 수련과 유교적 가치관의 진작을 위해서도 이용했다.

 

글‧조정육(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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