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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북한산에는 진달래, 인왕산에는 개나리, 그 사이에 핀 홍지문
작성일
2010-06-10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830



 


내 집 마당

서울의 번화한 곳과 얼마 멀지 않은 곳이지만 풍성한 자연과 오래된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곳, 그 곳이 그의 집 앞 풍경이다. 그가 그의 집을 사시사철 변화무쌍한 자연과 마주하고, 역사의 숨결을 지닌 문화재가 있는 이곳을 선택했다는 것은 어떤 궁금증도 없을 만큼 어울림이 완벽했다. 홍지문의 역사를 짚어 봐도,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기에 적합할 홍지문을 통과하는 작은 길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통로 같았다. 그 말고도 천천히 그리고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 길에 놓여있는 자그마한 벤치에 앉아 그가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이곳을 저희 집 앞마당이라고 자랑을 하곤 했어요. 전 이곳이 너무 좋아요. 마당 앞으로 탕춘대성의 일부가 직접 보이고요. 시선을 내려 보면 홍지문이 보이지요. 앞에 인왕산도 보이고요. 10년 전과 변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더 좋아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서울에서 10년 동안 그대로 숨결을 지키고 있는 마을, 게다가 오랜 역사를 간직한 홍지문과 함께하는 곳, 그는 이곳에서 운명을 다할 때까지 살겠다고 한다. 그는 지인들을 직접 집으로 초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고 노래하기를 좋아 한다. 그러기에 이곳은 참 적합한 곳이다.

“특히 외국 사람들을 초대했을 때 감탄을 해요. 한국의 자연과 문화재가 어우러진 이곳이 얼마나 아름답다고 말하는지 몰라요.”

사시사철 그 매력을 더욱 발산하는 자연과 그 앞의 홍지문은 늘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조금 지겹다 싶을 때면 계절이 바뀌어 즐거움을 주는 곳, 그 자연을 바탕으로 더 오래되었지만 늘 새로워지는 홍지문의 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내 마음 속 보물 홍지문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왜란과 호란으로 서울을 함락당하며 고초를 겪었던 조선왕조가 수도 방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낌에 따라 숙종 때 지은 것이다. 숙종은 1704년부터 1710년까지 했던 도성 수축 공사를 끝낸 후 북한산성을 축성하였고, 여러 논의를 거쳐 탕춘대성을 축조하였다.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해 홍지문을 만들었고, 숙종이 편액을 하사했었다. 하지만 1921년 홍수로 붕괴되어 50여 년간 방치되다가 1977년 서울특별시에서 복원을 하였고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새로 쓰였다.

“홍지문은 77년에 복원되었지만, 여전히 조선시대의 건축양식을 보여 주는 지표가 되고 있어요. 선조들의 기술과 예술성은 정말 이 시대의 우리도 본받을 만하죠. 중간 중간 오래된 돌들은 수백 년의 역사를 직접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숭례문에 불이 났을 때 그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듯 마음이 아팠고, 눈물을 흘렸다. 그 이후 문화재에 대한 애정은 더 커졌다.

“문화재에는 우리의 넋, 정신이 분명 있어요. 숭례문은 소신공양을 했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자신을 불태워 부처님께 공양하면서 다른 문화재들을 살리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이 그 이후에 더욱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늘었으니까요. 사람들이 적어도 우리 동네에 어떤 문화재가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화재에는 생명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그는 숭례문 화재는 모두에게 일침을 준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건 이후로 자신도 더욱더 홍지문과 탕춘대성을 아끼게 되었다고. 현재 홍지문이 잘 보존되고 있는 것도 숭례문의 소신공양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비둘기 퇴치제를 설치하는 작은 정성에서부터 여러 관리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우리 문화재를 살리고, 우리의 색깔을 잃지 않기 위해 중요한 것임을 분명이 말하고 있었다.


내 노래 

“사람들은 노래하는 장사익이 한복을 입고 무대에 서는 것을 특별하게 생각할 때가 있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정말 평범하게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입으셨던 옷을 입은 것뿐이에요. 동대문에 가서 광목을 사서 옷을 만들고 풀을 먹여 옷을 입는 것이지요. 그저 우리 옷일 뿐인데 그게 특별한가요. 외국에서 공연할 때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옷을 입고 노래를 부르죠. 그럴 때 사람들은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보고 가는 거에요.”

우리네 사람들이 우리 옷을 입고 우리 노래를 부르는 것, 이것은 특별할 것 없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것이 그 자신의 색깔이었고, 부모님의 색깔이었고, 우리 민족의 색깔이었다. 여러 문화들이 넘치도록 들어오는 이 시점에 그는 문화재와 우리 문화를 지키는 것은 기본이며, 그럴 때 더욱더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나무는 겨울에 추운데 오히려 옷을 벗어요. 껴입는 법이 없죠. 그리고 여름에는 무성해져서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줘요. 사람들은 자연과 거꾸로 살죠. 욕심 때문인 것 같아요. 나는 한 번도 노래를 욕심을 위해 집착하면서 해본 적이 없어요. 그저 즐겁게 재미있게 했어요. 그러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내 머릿속에서 노래가 툭툭 나왔어요. 그래서 노래하게 된 시간이 남들보다 빙 돌아 늦은 나이가 된 건지도 몰라요. 하지만 일찍 핀 개나리는 일찍 지지만, 늦게 핀 국화의 향기는 오래도록 짙답니다.”

꿈꾸는 것 자체가 어쩌면 좀 힘들지도 모를 46세에 그는 노래를 시작했다.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사물놀이의 태평소를 3년 동안 배운 후였다. 그저 사물놀이를 마치고 뒤풀이 시간에 흥겹게 노래를 불렀던 것이 주변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노래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자연처럼 때를 알고 사는 것, 우리의 것을 몸에 밴 듯 살아왔던 것이 느지막이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밀의 열쇠가 되어주었다. 오늘도 그저 좋은 날이므로 홍지문을 통과하는 작은 길옆의 벤치에서 그의 노래가 또 시작이 되었다.




열세 번을 바꿔야 했던 직업, 그 험한 길을 걷다가 우연히 찔레꽃을 만나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 꽃을 피우며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46세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태평소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기를 3년 그는 태평소 연주자로의 삶을 살다가, 지인들의 권유와 도움으로 소리꾼 인생을 시작한다. 1995년 소리‘찔레꽃’을 담아 1집 ‘하늘가는 길’을 낸 후 ‘허허바다’, ‘기침’, ‘꿈꾸는 세상’, ‘사람이 그리워서’ 등의 음반을 발매한다. 국내의 이곳저곳에서 테마를 가지고 소리판을 벌여 공연을 꾸준히 해왔고, 2000년에 들어서서는 본격적으로 일본, 헝가리, 미국, 중국 등에서 해외공연을 시작하게 된다. 1995년 KBS 국악대상 대통령상, 1996년 KBS 국악대상 금상, 2006년 국회 대중문화, 미디어 대상 국악상을 받으며 나이를 먹을 수록, 세월이 흐를수록 소리에 대한 그의 진솔함과 열정은 커져가고 더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다. 홍지동에 기거하며 지인들을 집으로 초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고 소리를 하는 61세의 그는 여전히 꿈꾸는 소년이다.


글·김진희  사진·최재만  
사진제공 | 김호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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