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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DMZ의어제와 오늘
작성일
2010-06-10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4140



임진강과 DMZ의 역사  

 DMZ(비무장지대)는 우리나라의 중앙부분을 동서로 가로지르고 있다. 서쪽으로는 임진강이 한강과 만나는 지점으로부터 시작하여 북쪽으로 장단군과 연천군 북단을 지나 김화와 평강 사이의 철원평야를 관통한 후 화천 양구일대의 백암산과 해안분지 북쪽을 돌아 동해안의 고성 남쪽으로 연결된다. 임진강이 서부의 DMZ 역사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던 것은 삼국시대라고 볼 수 있다. 임진강이 삼국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임진강의 지리적 위치와 유로 때문이라고 하겠다. 우선 임진강은 서울과 개성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시대에 북방세력이 서울을 점령하려면 임진강을 도하渡河하여야 했으며 남방세력이 개성을 경유하여 평양일대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필히 임진강을 건너야 했었다. 단순하게 설명하면 평양과 서울사이에 유로가 동서로 흐르는 강은 임진강 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삼국시대에 고구려는 백제로 진출하기 위하여 임진강 북안에 전초기지를 구축하는 한편 백제나 신라의 도하를 막기 위해서는 임진강 북안에 보루堡壘를 쌓아야 했으며, 남방세력인 백제나 신라도 임진강 남안에 보루나 전초기지를 쌓아야 했던 것이다. 대체로 4세기부터 7세기 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당나라가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임진강 쟁탈전을 벌였던 것이며 따라서 이 기간에 임진강은 남북세력간의 국경하천國境河川 역할을 수행해 왔던 것이다.

필자는 육군사관학교 역사학 교수와 육군박물관장을 맡아오면서 1994년부터 2003년까지 DMZ와 인접한 최전방지역의 관방유적關防遺蹟 1) 조사를 1년에 1개군씩 10년 간 조사해본 경험이 있다. 조사결과 임진강변에는 문헌에 없거나 아니면 옛날의 고성古城으로 지금은 폐허화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는 천년 넘은 삼국시대의 고성들을 다수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 고성들은 임진강 양안과 그리고 강에서 다소 떨어진 구릉 및 산지에 지금도 즐비하게 남아있는 실정이다. 파주군에서만 17개의 성(지)城址,진鎭, 봉수지烽燧址 등이 확인되었으며 연천군에 23개의 성(지) 와 돈대, 봉수지 등이 확인되었고 기타 인접한 포천과 철원에서도 각각 17개와 16개의 관방유적들이 확인되었다. 이들 중 이제는 우리 귀에 익숙해진 산성을 몇 개 열거하면 서쪽으로부터 임진강 북안의 덕진산성, 호로고루성지, 당포성지, 은대리성지, 무등리보루, 군자산성 등이 있고, 임진강 남안에는 오두산성, 월롱산성, 칠중성, 아미성, 대전리산성, 초성리산성, 수철성, 고석성 등이 있다.

실제로 이 임진강변의 산성들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삼국시대의 전쟁을 간략히 살펴보자. 371년 백제가 임진강을 건너 평양을 점령하고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후 광개토대왕은 남하정책南下政策을 표방하고 397년 파주의 관미성(오두산성)을 공격했고 그 후 장수왕은 475년 한성을 정복하여 한성일대는 한성백제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551년 백제와 신라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한성일대의 고구려를 축출했으나 한강일대를 진흥왕이 독차지하면서부터는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백제의 대결에서 고구려와 신라의 대결로 변하였다. 그 후 신라가 668년에 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당과 신라가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였으며 676년 매소성買肖城전투로 당나라가 드디어 한반도에서 물러남으로써 이 일대는 신라가 지배하게 되었다. 임진강을 둘러싼 남북 간의 치열한 각축과 관련된 성 중 연천의 호로고루성, 당포성 및 은대리성은 최근의 발굴조사로 고구려의 전초기지일 뿐만 아니라 임진강을 도하하여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남방세력을 저지하는 고구려의 보루였음이 입증되었다. 신라가 당을 한반도에서 최종적으로 축출하여 한반도를 통일하는 계기가 되었던 매소성전투의 매소성은 우리 조사단의 결론으로는 연천군의 대전리 산성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반드시 국가적 차원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중서부 일대 DMZ의 역사와 문화유산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연천군 임진강 중상류지역 즉 연천군 군남면 삼곶리, 횡산리, 강내리 일대의 문화재와 그에 관한 역사 이야기다. 이 지역에서는 과거 수년간 지표조사만으로도 전곡의 구석기 못지않은 다양한 구석기가 수습되었는가 하면 강을 따라 나란히 7기의 적석총이 확인되고 있다. 최근 제일 북쪽의 횡산리 적석총이 조사되면서 이 일대의 적석총은 북쪽의 고구려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백제를 건국한 고구려계 유민 또는 그들의 후손이 조성한 고구려 양식의 적석총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외에도 고구려인들의 석실 무덤이나 주거지 및 유물이 다수 확인됨으로써 임진강이 북쪽의 고구려 계통의 문물이 남으로 전래되는 중요한 루트였음이 확인되고 있다.

 

철원평야와 DMZ 역사

중부 및 중동부지역의 DMZ는 철원평야를 통과하게 된다. 철원은 백제를 몰아내며 남하한 고구려의 지배 하에서 ‘모을동비’라고 불렸으나 신라의 삼국통일 후 철성군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곳은 모두 오늘날 구철원 지대에 해당되고 DMZ가 통과하는 풍천원 벌판에는 큰 마을이 형성되지 못했다. 풍천원 벌판이 역사무대에 각광을 받는 것은 궁예에 의해 이곳에 태봉국의 도읍지가 건립되면서부터이다. 궁예는 수도를 송악에서 이곳으로 옮기고(904년) 국호도 동방대제국을 뜻하는 마진摩震으로 바꾼 뒤 다시 태봉泰封으로 확정하였다.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하여 발해일대를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궁예의 이상은 결국 고구려계통의 세력에 의해 좌절되고 권좌에서 축출됐지만 궁예의 불교적 이상 국가 건설의 꿈은 왕건에 의해 고려로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능했던 궁예는 고구려 세력의 아성인 송악을 벗어나 옛 철원이 아닌 풍천원에 새로운 도읍지를 건설하였는데 이곳이 사통팔달四通八達의 교통의 중심지임을 고려하여 당시 당나라와 발해의 도성을 연구하여 이곳에 대규모의 새로운 도읍과 도성을 건설하였다. 도읍지 주위의 태봉국 도성은 이중의 방형方形으로 설계되었다. 외성의 둘레는 12.5km, 내성은 7.7km 정도이며 대개는 토성이지만 문지門址나 기타 필요한 곳은 토석혼축으로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수차에 걸쳐서 태봉국 도성을 다녀온 적이 있으나 한국전쟁 때 격전장이어서 도성을 모두 답사할 수는 없었고 개략적으로나마 도성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언젠가는 남북 간의 대립이 해소되어 남북이 공동으로 태봉국과 그 도성을 체계적으로 조사하여야 할 것이다.

철원평야의 DMZ에 관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또 다른 유적은 김화읍 생창리의 성재산 일대에서 벌어진 병자호란 김화지구 전투에 관한 유적이다. 이 병자호란 전적지인 김화는 지금 철원군의 읍으로 속해 있지만 한국전쟁 때 최대격전장이었고 그에 따라 DMZ가 김화읍 한가운데를 지나면서 유서 깊은 김화읍은 현재 옛 모습 사진 한 장조차 남아있지 않은 폐허의 도시로 되어 버렸다. 김화지구전투(백동산전투)는 병자호란 때 조선이 쟁취한 유일한 승리이고 그것도 철저하고 완벽한 작전에 의해 이루어진 대첩大捷이며 그 유적지가 지금도 성재산 산자락에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전쟁과 관련된 유적, 예를 들어 아군전사들의 집단 무덤인 전골총戰骨塚이나 유림장군대첩비 및 홍명구를 기리는 충렬사 그리고 인접해 있는 성재산성 등이 잘 남아있는 만큼 이에 대한 체계적 조사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아울러 철원평야일대의 DMZ에는 근대에 만들어졌으나 오히려 현재 우리에게 보다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는 철도선이 2개가 있다. 그 중 하나는 태봉국도성 내 오른쪽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는 경원선 철도이다. 경의선철도복원은 개성공단 등과 관련이 있어 정부에서 직접적인 관심을 갖고 복원하였으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경원선 문제이다. 장차 남북의 관계가 원활해지고 상호협조 분위기가 이루어질 경우 이 경원선의 복원이야말로 원산과 서울을 잇는 것뿐만 아니라 블라디보스톡 등 러시아 동북지역의 도시들과도 연계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또한 철원역에서 일부의 DMZ를 거쳐 외금강으로 이어지는 금강산전기철도도 지금 당장은 어렵다하더라도 복원계획을 지금부터 차근차근 수립해야 할 것이다.

 

DMZ 내 문화유적의 남북공동조사를 제안하며

DMZ는 어떻든 같은 민족이 피를 흘리며 만들어 놓은 서글픈 유산이다. 역사에는 영원이란 없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제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0년이 흘렀다. 갈등과 상쟁으로 남겨져있는 DMZ도 언젠가는 사라져야 할 것이며 그것도 가능한 빨리 사라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남과 북은 정치, 군사적인 면 등에서 웃으며 손을 잡기가 그렇게 쉬워 보이지 않는다. 비록 현실이 어렵고 정치, 군사, 사상, 모든 면에서 상호 대화가 지금은 어렵다하더라도 우리가 수천 년간 같은 문화와 역사를 지녀온 단일민족이었음을 재확인하는 노력들이 남북 간에 필히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DMZ에 있는 태봉국 도읍지와 병자호란 전적지를 남북이 함께 조사를 하는 작업이 남북 간의 갈등을 줄이고 장차 화해를 도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태봉국 도성의 남북공동조사는 우선 도성 주변에 산재해있는 지뢰를 공동으로 제거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며 이러한 작업은 DMZ의 성격과 기능을 결국 바꾸는 일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같은 민족임을 확인하여 대결과 갈등을 화해와 평화의 길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천년 이상 방치해온 잃어버린 제국의 역사를 남북이 함께 다시 찾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병자호란 대첩지인 김화지구전적지는 우선 북쪽의 평안도 관찰사 홍명규와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림뿐만이 아니라 남쪽의 김화읍의 군민이 같이 손을 잡고 이민족의 침입을 물리친 대 회전會戰이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또한 격전장인 백동산이나 기타 유적이 성재산 일대에 잘 남아있으므로 그 당시 남북이 협동정신을 다시 상기하며 대첩지를 공동조사 하는 일은 남북이 한민족임을 다시 일깨워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조사를 통하여 김화지구 전쟁터와 유적은 국가차원에서 이를 성역화하여 안보역사의 교육현장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글·사진 | 이재 (재)국방문화재연구원 원장  
사진제공·엔싸이버 포토박스, 연합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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