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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6년간 함께 한 문화재 연구의 길
작성일
2017-05-3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187

26년간 함께 한 문화재 연구의 길 - 한국 고건축의 대부 장경호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문화재관리국이 처음 탄생할 때 함께 했던 인물이자, 한국 고건축의 초석이 된 장경호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한국 역사의 굵직한 순간마다 함께 걸어온 그는 한 우물 정신으로, 일평생 연구소 현장을 지켜왔다. 그가 걸어온인생의 발자취에 남아 있는 문화재와의 인연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좌)장경호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우)1973년 불국사에서 장경호 선생

친형을 본보기 삼아 시작한 건축학과 배구

일제강점기였던 1936년 음력 9월 19일,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서 정미소를 하는 비교적 유복한 가정의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장경호 선생은 문화재계, 특히 한국 고건축계의 초석을 다진 ‘관학파’의 대표 인물로 통한다. 한 살 아래 김동현 선생과 더불어 학계가 아니라 관(官)에 정착한 1세대로서, 공직 생활 대부분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냈다. 그는 소장을 역임하면서, 연구자로서도 적지 않은 업적을 이룩했다. 그것이 지금의 한국 고건축의 얼개를 만들었다. 수려한 외모에 단아한 체구는 팔순을 넘긴 지금도 여전하다. 건축에 뛰어든 동기에 대해 물으니 6살 터울인 친형을 거론한다.

“작고하신 형님이 서울대 공대 건축학과를 나오셨어요. 저도 형님 따라 서울대 건축학과를 지원했지만 떨어졌어요. 낙담해 있는 제게 어머님은 한양대에도 건축학과가 있다며 관련 서류를 준비해 오셨어요. 그렇게 한양대에 지원하게 됐습니다.”

당시 한국 남자 평균 키보다 약간 크다고 할 수 있는 장경호 선생은 배구 선수라는 독특한 이력이 있다. 이것 역시 형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경동고 시절 배구 선수였어요.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6인제가 아니라 9인제 배구를 할 때였어요. 형님 역시 고교 시절 유명한 배구 선수였죠. 뿐만 아니라 형님은 김창룡 씨가 대장인 특무부대에서 배구 선수 생활을 하셨어요. 저는 12사단에서 군 생활을 했는데, 거기서 배구 선수로 활동했죠. 문화재연구소에서도 배구단을 조직했답니다.”

문화재관리국에서의 첫 시작

장경호 선생의 인터뷰에서 확인한 것 중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가 바로 1961년 문화재관리국 출범 당시의 창립 멤버라는 점이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고 새로 출범한 장면 정부가, 1961년 봄에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을 나온 젊은이 2천 명을 공개 모집해 예비공무원으로 선발했어요. 장준하와 함석헌 선생 등이 강사로 나섰고 일주일간 정신 훈련을 거치고 나면 청년들은 각 지방 시·군·면으로 보내졌어요. 사방사업이나 관개사업과 같은 국토개발 분야를 감독하도록 했죠. ‘국토건설추진요원’이라고 들어봤어요? 제가 그 일원으로 선발돼, 전북 정읍으로 파견 가서 일했어요. 그러다가 두 달쯤인가 지나서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거예요. 공무원의 꿈은 접어야 했는데, 군사정부가 예비공무원들을 일제히 근무처로 발령했어요.”

이렇게 해서 그가 정착한 곳은 경복궁 석조전에 있던 경무대산하 ‘구황실재산사무총국’ 관리과였다. 조선왕실 재산을 관리하던 곳이었다.

“저는 관리과 영선계에 건축기원(技員)으로 배치됐어요. 현재 복 씨와 김삼봉 씨도 같이 일했어요. 당시 총국장은 조선왕실 전주 이씨 일원인 이수길 씨라는 분이었는데 어느 날 군인이 오더니 1961년 10월, 구황실재산사무총국이 문화재관리국으로 재편되고 경무대 산하에서 문교부 외국(外局)이 되었지요.”

오직 문화재관리 연구에만 몰입한 시간

명색이 건축학과를 나왔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장경호 선생은 한국 고건축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

“대학에서는 서양 건축만 배웠지, 한국 고건축은 가르치지 않았어요. 당시 국립박물관에 계셨던 임천 선생이 정리한 한국 고건축 용어집을 보고 공부하거나 현장에서 직접 고건축을 배웠어요.”

문화재관리국의 창립 멤버로 발을 디딘 장경호 선생은 1970년 지금의 사무관에 해당하는 건축기좌 시험에 합격하면서 1969년에 막 출범한 문화재연구실(현재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배치됐다. 그렇게 그는 1996년 6월, 정년을 1년 반 남기고 국립문화재연구소장으로 명예퇴직할 때까지 26년에 달하는 연구소 생활을 시작한다. 많은 연구소 직원이 본부 격인 문화재관리국과 연구소를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도 장 선생은 오직 연구 현장만을 지켰다. 특히 연구소장을 명예퇴직 직전까지 9년 3개월간 재임했다. 초대소장 김정기 박사에 이은 ‘장기집권’이었다.

오랜 공직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일화가 한두 가지겠는가?

“한당욱 육군 준장이 예편하고 초대 문화재관리국장으로 왔어요. 이 양반 때 덕수궁 대한문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지요. 그가 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과 덕수궁 담장이 붙은 자리에다가 ‘혁명문’이라는 철문을 만들었어요. 그때 제가 공사감독이었죠. 흉물이라 해서 이내 철거됐지만... 못내 씁쓸해요.”

문화재연구소 퇴임 뒤, 장 선생은 경기도박물관장과 기전문화재연구원(현재 경기문화재연구원) 원장 등을 거쳐 지금은 연구소 후배이기도 한 김홍식 명지대 건축학과 명예교수가 설립한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한울문화재연구원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글+사진‧김태식(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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