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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려 마지막 충절의 상징, 정몽주의 집터
작성일
2017-05-3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1852

고려 마지막 충절의 상징, 정몽주의 집터 - 국보문화유물 제128호 숭양서원 개성특급시 선죽동에 위치한 숭양서원은 1573년(선조 6년)에 개성유수 남응운이 유림들과 협의하여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고 서경덕의 학덕을 추모하고자 세운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도 존속했던 47개 서원 중 하나인 숭양서원은 개성지역을 대표하는 곳이었다. 숙종·영조·고종이 개성에 행차했을 때, 관리를 파견해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견관치제(遣官致祭) 은전(恩典)을 받았으며,영조는 친필로 어필사액(御筆賜額)을 하사하기도 했다. 숭양서원 강당

정몽주의 옛집, 숭양서원

숭양서원은 정몽주가 살던 집에 그의 시호를 따 처음 사(祠)의 형태로 ‘문충당(文忠堂)’으로 시작했다. 2년 뒤인 1575년 ‘숭양(崧陽)’의 사액이 내려지면서 공식적으로 서원의 기능을 하게 됐다. 1668년(현종 9년) 이후 김육·김상헌·조익·우현보 등이 추가로 배향됐다. 1823년(순조 23년)에 유수 김교근과 김이재가 동재와 서재를 중건하고 사당과 강당을 중수했으며, 1930년에는 우상훈이 보수했다.

서원 주차장 입구에는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그중에서도 『중경지(中京誌)』를 편찬하고 개성 유수를 지낸 잠곡 김육의 것이 눈에 띄는데, 김육은 효종 때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대동법 확대 실시를 주도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외삼문 오른쪽 능선에는 1530년(중종 25년)에 세워진 정몽주의 옛집임을 알려주는 구기비(舊基碑)가 비각 없이 붉은 글씨로 남아있다. 먼발치에 있어 자세히 보지 못했으나, 판독 가능한 부분은 앞면에 ‘고려충신정몽주지려(高麗忠臣鄭夢周之閭)’, 뒷면에 ‘가정 경인 8월 일(嘉靖 庚寅 八月 日)’이다. 이는 ‘고려 충신 정몽주의 마을, 가정 경인년 8월 일’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숭양서원에는 선조가 내린 사액 현판이나 각 건물에 있어야 할 편액이 보이지 않는다. 일제강점기까지 영조어필게액기(英祖御筆揭額記)를 비롯하여 어제시·중수기·상량문 게판 등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고 전하나, 현재는 그 소재가 불분명하다.

서원 내, 강학(講學)의 영역

자남산 동남쪽 기슭의 경사지에 위치한 경내 건물은 좌우대칭 상태이며, 2개의 영역으로 나뉜다. 앞쪽에 강학 구역, 뒤쪽에 신실(神室) 구역으로 구성된 서원의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형태를 취하고 있다. 장방형의 높은 담장으로 둘러싼 숭양서원 외삼문에 들어서면 강당과 동재·서재로 이루어진 강학의 영역이 펼쳐진다. 경내 건물로는 사당·강당·동재·서재·신문(神門)·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되어 있으며 전면에 퇴칸을 둔 팔작(八作)지붕 건물이다. 3단 화강암 장대석 위에 다시 1단의 장대석을 쌓아 이중 기단으로 되어 있다. 공포(栱包)가 없고 장식이 간단하나 단청은 전면에 금단청(金丹靑)을 도채(塗彩)하는 등 비교적 화려하다. 당시 유생들의 숙소로 쓰인 동재와 서재는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의 5량가 맞배지붕 건물로 규모가 크다. 서재 뒤쪽에는 고직사 등이 보조영역을 구성하고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정몽주의 화상과 사당, 제향의 영역

강당의 왼쪽으로 돌아 계단을 오르면 내삼문(內三門)과 사당인 문충당으로 구성된 제향(祭享) 영역이 나온다. 숭양서원의 중심 건물인 사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3단 높이의 단층기단 위에 놓여있다. 흘림이 강한 기둥 상부에는 공포를 생략하고 소박한 연화문(蓮花紋)을 새긴 초엽으로 대들보와 중보를 받들었다. 사당은 주실과 협실이 약간 변형을 이루고 있는데, 우진각 형식에서 맞배지붕으로 고쳐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마도 배향된 위패의 숫자가 늘어나게 되자 정몽주의 영정과 위패를 주실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당 안에는 정몽주를 비롯하여 우현보, 서경덕, 김상헌, 김육, 조익의 위패를 안치했다. 협실에는 정몽주의 화상(畵像)과 국보유적 제138호 표충비(表忠碑)에 새긴 영조의 시(詩) 탁본, 정몽주의 문집을 두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정몽주의 화상만 남아 있다. 이곳에 안치된 정몽주의 영정은 1575년(선조 8년)의 가묘본(家廟本)을 토대로 몇 차례 이모 과정을 거쳐 1768년(영조 44년) 한종유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영정은 숭양서원본을 모사한 것이라 한다.

사당 앞뜰 좌우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는데, 우측의 것은 1811년(순조 11년)에 세운 포은선생서원비(圃隱先生書院碑)로 묘정비이다. 왼쪽의 것은 1872년에 세워진 숭양서원기실비(崧陽書院記實碑, 북한 보존급 제1625호)인데,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 개성의 유생들이 숭양서원을 그대로 두도록 정부에 요청하여 승인을 받고 서원을 다시 수리한 내력을 적고 있다.

현재 북한에서 숭양서원은 임진왜란 이전의 건물로 개성에 남아있는 옛 건물 중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건축물이다. 사립교육기관으로서 당시의 지방교육과 서원의 배치형식, 구조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고려후기 서원의 전형적인 배치와 구성을 보여준다고 평가받고 있다. 또한 숭양서원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개성역사유적지구(Historic Monuments and Sites in Kaesong)’ 안에 포함되어 있다.

 

글‧홍영의(국민대 한국역사학과 교수) 사진‧국립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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