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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20년 전 조선의 모습을 기록한 이사벨라 비숍
작성일
2017-05-3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801

120년 전 조선의 모습을 기록한 이사벨라 비숍 - 1894년(고종 31년) 2월, 63세의 영국 여인이 부산항에 도착했다. 여성으로서는 첫 영국왕립지리학협회(Royal Geographic Society)의 회원이 된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shop, 1831~1904)이다. 4차례에 걸쳐 조선을 방문할 만큼 애정이 높았던 비숍은 조선의 국왕과 왕비, 민간인들의 삶을 상세히 기록한「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을 집필해 서양에 조선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좌)탑골공원 안에 있는 원각사비 (우)1894년 5월 한강 부근의 마을에서 촬영한 저녁 식사 모습을 동판화로 제작

탁월한 정보 수집과 문장력을 갖춘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은 영국 왕실과 깊은 관계가 있는 성공회 캔터베리 대성당의 대주교인 섬너 경(Sir Sumner)가문의 일원으로, 아버지는 성 토마스 주교좌 성당의 사제였다. 그녀는 23세에 미국과 캐나다를 여행한 후 2년 만에 영국 유명 출판사인 머레이에서 「미국에 간 영국 여인」이란 여행기를 출판했다. 미국 남부의 노예제도를 비판하고 흑인과 인디언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담은 이 책은 45쇄를 찍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두 번째 여행기는 자신의 우울증 치료를 위해 머물렀던 남태평양의 샌드위치 섬에 대해 쓴 「샌드위치 섬에서의 6개월(1875)」이었다. 이때부터 비숍은 세계 각국을 다니며 왕성한 집필활동을 펼쳤다. 여행 작가가 되기 위해 대학에서 지리학을 이수하고, 페르시아·그리스·티베트·일본 등을 여행했다. 책은 영국뿐 아니라 미국, 독일 등에서도 출판됐다. 그녀의 여행기는 사회, 역사, 지리를 철저하게 조사·연구해서 기록한 ‘학술답사 여행기’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학술서라 하면 지루하기 마련인데, 29세에 시인으로 등단할 정도의 필력을 가졌던 비숍이었기 때문에 뛰어난 묘사력이 현장감을 더했다.

조선의 곳곳을 탐방한 뚜벅이 지리학자

비숍은 1894년부터 1897년까지 모두 4번에 걸쳐 조선을 방문했다. ‘몽골리안 민족들의 국가와 지리, 민족적 특징’이란 주제로 진행한 연구계획의 일환이었다. 그녀가 책을 쓰기 위해 네 차례를 방문한 나라는 조선이 유일하다. 조선에 대한 연구 자료가 거의 없는 상황이라 답사와 자료 수집을 정리하는 데만 오랜 시간이 걸렸다. 1897년 런던과 뉴욕에서 동시에 출판된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은 단숨에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다. 조선 방방곡곡을 누빈 현장답사와 철저한 자료조사, 이를 뒷받침하는 생생한 사진 자료와 그림 덕분이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은 걸출한 지리학자이자 여행 작가인 이사벨라 비숍을 통해 서양에 좀 더 자세히 알려지게 됐다.

비숍의 첫 번째 방문은 1894년 2월 부산이었으며, 그 후 제물포에서 서울로, 4월 중순 즈음 나룻배를 타고 남한산성에서 단양으로 향했다. 조랑말을 타고서 금강산의 절경을 두루 찾아본 후 원산까지 갔다. 조선을 여행하던 비숍은 전국으로 번지는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때문에 만주로 피신했다가, 러시아 지역으로 이주해 간 조선인들을 만난 후 일본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듬해인 1895년 1월 다시 조선에 온 그녀는 조선 주재 영국 총영사와 언더우드 선교사 부인의 주선으로 고종과 명성황후를 알현하기도 했다.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했고 퍽 우아한 자태에 늘씬한 여성이었다. (중략) 대화의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면 그녀의 얼굴은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왕은 작은 키에 병약해 보이는 얼굴로 필시 소박한 사람일 듯했다. 몸가짐이나 태도로 보아 위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중략) 왕과 왕세자는 비슷한 의복을 갖추고 있었다. 왕세자는 통통했으나 병약해보였다. 불행히 심각한 근시라고 하는데 예법 상 안경을 낄 수 없었다.” -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295~296쪽. 도서출판 살림 -

비숍은 이후에도 명성황후를 세 번 더 알현했다. 네 번째에는 약 1시간 동안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의 사려 깊은 친절, 특출한 지적 능력, 통역자가 매개했음에도 느껴지는 놀랄만한 말솜씨 등 모두가 우아하고 고상했다”고 술회했다.

명성황후 화장터 (비숍은 이 장소가 ‘사슴공원 부근의 작은 소나무 숲’이라고 서술했다)

조선의 아픈 역사를 함께 한 여인

1895년 일본의 나가사키에서 명성황후 시해소식을 들은 비숍은 급히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와, 고종을 알현했다. 그리고 그녀는 일본인 낭인 자객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의 시신을 화장했다고 알려진 경복궁 향원정 부근 녹원(비숍은 사슴공원이라고 기록)에 있는 화장터를 촬영했다. 비숍은 힐리어 주한 영국 총영사와 함께 두 달에 걸쳐 을미사변이란 ‘비극적 사건’을 취재하면서 미국인 군사 고문관 다이(Dye) 장군과 왕실 경호원인 러시아인 사바틴의 증언을 들었다. 그리고 일본 히로시마 법정에서 일본인 낭인들에 대한 재판을 직접 참관했다. 증거 불충분으로 피고인들이 석방되는 판결을 보고 분노하며 비숍은 명성황후 시해 참변의 배후가 일본 정부라는 사실을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에 자세히 서술했고, 화장터 사진을 동판화로 만들어 게재했다.

비숍은 명성황후 시해 참변 취재를 마친 후 서울을 출발해 개성, 황주, 평양 일대를 답사했다. 중국으로 떠났던 그녀는 1896년 10월 제물포로 들어와 조선의 무속신앙과 정치적 상황을 심층적으로 바라보고, 1897년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을 출판했다.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조선의 국왕과 왕비 그리고 민간인의 삶, 교육 및 대외 무역, 무당과 기생 심지어는 무속신앙의 귀신 간 서열까지 최선을 다해 취재한 결과가 담겨 있었다. 물론 국제정서를 바라보는 시각이 우리와는 다른 부분도 있지만, 당시의 조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을 남긴 노고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글‧이충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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