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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무, 소리를 품고 악기로 태어나다
작성일
2017-05-08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4043

나무, 소리를 품고 악기로 태어나다 - 오동나무와 대나무로 만든 국악기 울림이 좋은 나무는 악기가 된다. 그러나 좋아하는 소리 울림은 지역마다, 민족마다 제각기 달라서 ‘악기’로 탄생되는 나무의 종류도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 성종 때 편찬된『악학궤범』의 악기 항목에는 오동나무와 대나무를 비롯하여 옴나무, 두충나무, 뽕나무, 산유자나무, 버드나무, 상수리나무, 은행나무, 박달나무, 모과나무, 대추나무 등 수많은 나무가 등장한다. 옛사람들은 이 나무들이 소리 울림에 좋다는 것을 어찌 알았을까. 어떤 나무는 공명판에 좋고, 어떤 나무는 뒷 판에 좋고, 또 어떤 나무는 괘를 만들어 쓰면 좋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 적재적소에 ‘그 나무’를 써 왔던 것일까. 가야금과 거문고, 대금의 주재료인 나무 이야기 속으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본다.

01.오동나무 표면 02.대나무의 단면

나지막하고 은근한 오동나무 울림

조선 후기 문인 신헌조(申獻朝, 1752~1807)는 오동나무가 악기가 되는 과정을 단 석 줄의 시조 한편으로 기막히게 풀어냈다.

에굽고 속 휑덩그려 빈 저 오동( 梧桐)나무 바람 받고 서리 맞아 몇백 년 늙었던지 오늘날 기다려서 톱 대어 베어 내어 잔 자귀 세 대패로 꾸며 내어 줄 얹으니 손 아래 둥덩둥당딩당 소리에 흥을 겨워하노라. - <봉래악부> -

좋은 나무에서 좋은 소리가 울리는 감흥을 이처럼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을 보면 이 사람은 아마도 오동나무를 구해 직접 악기를 만들어 본 듯하다. 실제로 음악을 좋아한 문인들은 좋은 목재를 보면 악기를 제작해 소장하고, 나무의 내력과 악기 이야기를 글로 남겼다. 보물 제957호로 지정된 ‘김일손 거문고’는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이 땔감으로 쓰이기 직전의 오동나무 문짝을 구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는가 하면, 명종 때 영천군수를 지낸 심의검(沈義儉)은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향교의 오동나무를 베어 중죄를 물어야 한다는 탄핵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어디서든 좋은 오동나무를 만나면 소리의 울림을 먼저 떠올렸던 옛사람들의 악기 사랑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일화다.

악기의 재료가 될 오동나무는 흔히 바위틈에서 자란 석상(石上) 오동이 좋다느니, 폭포 옆에서 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 자란 나무라야 한다느니, 추운 곳에서 힘겹게 자란 나무가 좋다느니 여러 말들이 있다. 나무가 단단해야 소리가 좋기 때문에 대체로 수월하게 쑥쑥 자란 것보다 자갈밭같이 메마른 데서 마디게 자란것을 더 으뜸으로 쳤다. 본래 오동나무의 성질이 무른 편이라 주변 환경에 의해 단단해진 것을 우선으로 여긴 것이다.

수령이 30년에서 50년 정도 되는 재래종 오동나무는 최상품 악기재료로 쓰이며, 보통 20년이 넘으면 좋은 악기감으로 여겨진다. 대부분 악기장은 알맞은 크기로 잘라온 오동나무를 야외에 펼쳐두고 눈비를 맞히고 바람을 쐐 가며 나무의 생기가 완전히 빠질 때까지 말린다. 2년 남짓 걸리는 이 과정에서 어떤 나무는 썩고, 어떤 나무는 비틀어져 일부만 악기 재료로 삼는다.

수년 전, 악기 명장들의 제작 과정을 녹화하는 문화재청의 프로젝트에 동행 취재를 갔을 때 현악 명기의 조건이 재료의 선택에서 거의 결정된다는 점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명장들은 우선 명기가 될 악기의 재료를 수소문해 많이 확보하여, 잘 관리하는 일을 중히 여긴다. 장인은 건조장에서 공명통이 될 오동나무 판을 하나씩 들고 ‘똑~똑~’ 두드리며 울림을 파악하는데, 이 순간‘나무’는 ‘악기’로 새 생명을 얻게 된다. 이 울림을 기억한 장인은 나뭇결을 다듬고, 판의 표면을 불 인두로 지지고, 잣기름으로 윤기를 내어 명주실 현을 받아들일 공명통을 완성한다.

왜 오동나무였을까

15년 전쯤 한 TV 채널에서 거문고가 된 오동나무와 바이올린이 된 가문비나무의 울림을 과학적으로 비교 실험한 내용을 방영한 적이 있다. 나무학자와 음향물리학자가 각기 나무의 세포와 탄성, 주파수, 진동 등을 알아보기 쉽게 설명하고, 왜 우리 민족이 오랜 세월 동안 현악기의 재료로 오동나무를 선호해왔는지에 대한 답을 유추했다.

세포구조가 규칙적이고 촘촘한 가문비나무는 배음 구조가 규칙적이고 여음이 길며, 높은 음역대에 잘 반응한다. ‘쨍한’ 바이올린의 음색과 탄성의 비밀이다. 반대로 세포의 벽이 얇고 유연하며 성근 오동나무의 세포구조는 낮은 음역대에서 울림이 좋고, 여음이 짧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의 거문고와 가야금은 오동나무 공명통을 사용하는 비슷한 현악기인 일본의 고토와 중국의 구친에 비해서도 더 낮은 음역대의 울림이 측정되었다. 우리 전통음악의 나지막하고, 은근하며 부드러운 느낌이 주조를 이루는 비밀은 바로 ‘나무의 선택’에 있었던 것이다.

03.관악기의 재료로 사용되는 대나무

04.거문고를 제작하고 있는 악기장 05.현악기의 재료로 쓸 오동나무 건조 모습

온갖 시름 잠재우는 평화의 소리, 대나무

전통 관악기의 주재료는 대나무다. 삼죽(三竹)인 대금·중금·소금부터 피리, 퉁소, 단소 등의 악기들이 모두 대나무에 구멍을 뚫어 소리를 얻는다. 대나무가 악기가 된 사연은 설화 ‘만파식적’에서 비롯된다. 바닷가에서 떠오른 신비로운 섬, 그곳에 자라는 이상한 대나무. 낮에는 갈라졌다가 밤에는 합쳐지더니 이레 만에 바다의 온갖 풍파를 잠재웠다. 신라의 이 대나무는 마침내 대금이 되어 세상의 평화를 불러왔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만파식적’ 설화는 대금의 탄생으로 해석되고 있으며, 대나무는 선한 이미지를 가진 평화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대금은 대나무 중에서 황죽(黃竹)이나 쌍골죽으로 만든다. 대의 한쪽에 골이 지는 것이 정상이나 쌍골죽은 양쪽에 골이 패인 일종의 병죽(病竹)이다. 대나무에 양쪽 골이 지면 텅 비어야 할 대나무 속에 살이 쪄서 죽세공에는 쓸 수 없다. 대 속이 메워진 쌍골죽은 바람이 불 때마다 우는 소리를 내기 때문에 이를 ‘망국죽(亡國竹)’이라고도 하고, ‘대밭에 쌍골죽이 나면 망한다’는 속설이 있어 얼른 베어버리고 마는 ‘기분 나쁜’ 대나무로 여겼다. 이렇게 쓸모없는 대나무가 대금 재료로는 최상의 대접을 받는다. 그 이유는 대나무의 살찐 내경(內徑)을 자유로이 조정하여 음정을 맞출 수 있으며, 두텁고 단단한 대나무 속살을 비집고 나오는 소리가 야무지고도 그윽하기 때문이다.

쌍골죽이나 황죽 모두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구하는데 그중에서도 쌍계사(경남 하동)나 담양, 밀양이 유명하다. 보통 3년에서 5년 이상 묵어 굵기가 4㎝ 정도 되고, 마디가 다섯 개 정도 나오는 것을 최상품으로 친다. 그리고 정월에 베는 대나무라야 악기를 만들었을 때 찌그러지지도 않고 좀이 먹지도 않는다고 한다.

한편, 향피리나 세피리는 가느다란 시누대(海藏竹)를 쓰고, 당피리나 단소를 만들 때는 시누대보다 약간 굵은 황죽이나 오죽(烏竹)을 사용한다. 대나무는 주로 남쪽에서 생장하는 것이 좋다. 연산군 때 일시적으로 악기 생산에 힘을 기울인 적이 있었는데, 이때 연산군은 음악감독에게 경상도와 전라도로 직접 내려가 대나무 재료를 구해오라 명한 적이 있다. 현재도 시누대는 남원, 진주, 해남, 진도에서 나는 것이 상품(上品)으로 알려져 있는데, 언론인 예용해 선생의 『인간문화재』에서는 ‘서산죽(瑞山竹)’을 최고로 꼽고 있다. 민물과 짠물이 교류하는 땅에서 자란 대나무가 강유(剛柔: 강인함과 유연함)가 좋다는 설명이다. 그런가 하면 필자가 인터뷰한 허용업(許龍業) 명인은 ‘울릉도 대나무가 제일’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연주자들은 취향에 따라 서로 다른 산지의 대나무를 고르고 있으나, 좋은 재료가 곧 좋은 악기를 결정하는 주요인임을 확인할 수 있다.

국악기는 나무 울림을 자연 상태에 가깝게 담고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재료와 형태를 인위적으로 변형하기보다 오랜 세월 동안 과거의 형태를 지키는 쪽으로 전승해왔다. 한쪽에서는 국악기가 시대의 요구를 받아들여 개량되는 추세이지만, 국악기에 내재한 오래된 자연적 미감은 여전히 중요하다. 나무가 기억하는 무형유산의 가치가 과학적 연구를 통해 더욱 활발히 재조명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글‧송혜진(국악방송 사장) 사진‧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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