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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의학사의 흐름 조선 후기 민간 의료의 성장
작성일
2008-10-02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5850



의료화의 정도를 가늠할 가장 중요한 지표는 의약종사자의 수와 인구당 의약인 수일 것이다. 조선 후기 사회의 한의학 의술시술자의 수를 일러주는 통계는 없다. 『경국대전』,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에 실린 서울과 지방의 의관醫官 수 규정만 있을 뿐이다.

1866년에 편찬된 『육전조례』에 따르면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에 소속된 현직 의원 수는 의관, 의서습독관, 의학생도, 의녀를 합쳐서 대략 250여 명 정도의 규모였다. 이런 정도의 규모는 아마도 조선왕조가 기틀을 잡게 된 이래 계속 유지되어온, 또는 민간의료의 성장 때문에 다소 축소된 숫자였을 것이다. 지방의 경우에는 혜민서에서 파견한 심약과 지방 관아의 의원, 의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심약의 경우에는 각 도에 1~3인을 파견했는데, 『대전통편』에서는 13인에 불과했다. 지방 의생 수는 『경국대전』(1445년)에 따르면, 각 지역의 규모에 따라 부府에는 16인, 대도호부와 목牧에는 14인, 도호부는 12인, 군에는 10인, 현에는 8인을 두도록 규정했는데, 이는 조선시대 내내 지속되었다. 조선 영조 때 군현이 331개였으므로 규정대로 한다면 대략 3천 여 명의 관에 딸린 의생이 지방에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법전의 규정은 어디까지나 이상적인 것을 적은 것일 뿐, 실제 상황에서는 이 규정이 지켜지지 않았다. 아마도 법전에 규정된 것은 민간의 의원을 제외한 관 의료의 최대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민간의 의원이 성장해 있지 않았던 시대에는 그 이하의 의원이 조선에 존재했을 것이다. [b]환자의 관점에서 본 급격한 민간 의료의 성장 [/b]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동안 지방 수준에서 의약이 성장했다는 점은 환자 차원에서도 확인된다. 우선 조선 후기 강릉지역에서 240년 동안 지속된 강릉의 약국계藥局契의 등장과 소멸은 의약성장 과정을 가장 잘 말해줄 수 있는 사례다. 이 약국계는 ‘벽지라서 의원과 약이 없는’ 의료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강릉의 사족 25명이 1603년(선조 36)에 설립했다. 이후 1691년(숙종 17) 상당한 외형의 성장을 보였으나, 1842년(헌종 8)에 폐지되었다. 폐지 이유는 사적으로 운영되는 약국이 계속 생겨 시중에서 약재를 구하기 쉬워졌다는 점이 하나였고, 그러한 결과 약국 운영이 사대부의 일이 아닌 천한 장부의 일로 치부되기 시작한 풍토 때문이었다. 약국계가 설립되던 17세기 초반에는 지방유지 사대부들이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특별한 약계 조직체를 만들어냈었다. 그러나 의학지식의 대중화와 약재 시장의 활성화로 의약의 상업적 성장이 상당 정도에 이른 19세기 중반에는 더 이상 이런 특별한 조직이 필요 없게 된 것이다. 또 16세기 후반 사족의 일기인 유희춘의 『미암일기』, 오희문의 『쇄미록』에 나타난 의약 기사와 18세기 후반 사족의 일기인 유만주의 『흠영』, 황윤석의 『이재난고』의 의약기사 비교를 통해서도 급격한 민간 의료의 성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미암일기』와 『쇄미록』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서울과 지방 의료 형편의 현격한 차이이다. 서울은 의원과 약이 풍부했으나 그들이 머문 지방인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 지방은 그렇지 못했다. 지방의 의원은 잘 보이지 않고, 약재는 부족하며, 대부분 서울의 것에 의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흠영』과 『이재난고』에서는 서울은 물론이거니와 지방에서도 적지 않은 의자醫者들이 경쟁하고 있으며, 자체적인 약물의 유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 있다. [b]조선시대 의약 유통 체계의 대변화[/b]

16세기말과 200년 후의 상황에는 단지 의원과 약재의 풍부함과 부족함만의 차이가 아니라 의약 유통 체계 자체의 근본적인 변화가 내재되어 있다. 한마디로 의약의 선물경제에서 상품경제로 탈바꿈한 것이다. 16세기말에는 약의 수급이 영업이 아닌 왕, 관료, 사족 사이의 관직, 혈연, 사승관계, 친분에 입각한 상납과 선물, 하사가 일반적인 형태였다. 그 대가는 쌀, 음식, 종이와 먹 등의 유형적인 것에서부터 인사 추천이라는 무형적인 것을 망라했다. 의원의 경우에도 대다수가 관에 예속되어 있으며, 관아의 일이 아닌 경우에는 유력자의 부탁으로 그들의 친지를 돌보는 경우가 흔하게 나타나며 의료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경제적 보상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이런 사실은 16세기말에는 의약이 독자적인 경제적 품목 또는 상품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하고 신분사회에 예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18세기 후반에는 약값은 모두 화폐로 지불되고, 의원의 진료에 대한 보수도 돈으로 지불했던 모습이 흔히 보인다. 『흠영』에 등장하는 서울의 의원은 대부분이 민간의民間醫로서 치열한 경쟁을 보이고 있다. 16세기말에 비해 안과와 부인과가 있을 정도로 전문화가

상당 정도 진행되어 있었다. 약재 구입의 양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사여, 선물의 형태가 아닌 매매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화폐를 사용했다.『이재난고』에 나타난 지방의 경우에도 의약이 상당한 정도로 상품화 되어 있었다. 지방에도 민간의 의원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은 꽤 전문화 되어 있었다. 약국도 각 고을마다 한둘씩은 있었다. 이곳, 저곳을 떠돌며 진료행위를 하는 의객醫客의 존재도 더러 눈에 띄는데, 이들은 몰락한 양반으로 훈장 직업처럼 의학 지식을 기반으로 활동한 새로운 유형의 직업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민간에 등장한 수많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의원과 약국이 16세기말 서울과 지방의 의관醫官을 대체했으며, 신분관계에 예속되어 있었던 의약을 상품의 형태로 대체했음을 뜻한다. 의약을 선물 경제에서 시장 경제로 바꾼 동인은 무엇인가? 이런 현상은 의약 분야만의 일이 아니다. 사회의 전반적인 상업화의 흐름 속에 의약 분야마저도 포섭된 것이다. 결정적인 계기는 일반 역사에서 밝혔듯, 대동법의 등장 이후 일어난 시장의 활성화라는 큰 조류이다. 이와 함께 수많은 의원의 존재를 가능케 한 양반의 증가 또는 몰락을 특징으로 하는 신분체계의 변화가 주요 요인이다. 훈장으로 대표되는 초등교육 분야와 함께 의약 분야가 새로이 등장한 몰락한 ‘지식’ 분자를 흡수할 몇 안 되는 분야였기 때문이다. 종합하면, 조선 후기 의약생활의 변화는 조선사회 전체의 변화가 관련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 요인에 대한 분석은 약령시를 비롯한 의료경제사적 연구나 신분사 연구를 통해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글·사진_ 신동원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사진_ 서울약령시 한의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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