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사랑
- 제목
- 도가와 만나다 - 우리나라의 도교 흔적을 찾아서
- 작성일
- 2008-02-01
- 작성자
- 국가유산청
- 조회수
- 16083
“도를 아십니까?” 한 때 ‘단丹’ 이라는 책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실제인물인 권태훈 이라는 도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책은 그의 신통한 능력과 정신세계에 관한 담론으로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 단전호흡 수련장이 동네마다 생겨났고 도와 단전호흡법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과연 도의 실체는 무엇일까? 무협지나 중국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놀라운 능력들은 과연 도의 수련을 통해 가능했던 것일까? 명상이나 수련을 통해 정신과 육신을 다스리고, 나아가서는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던 노력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그 중심에는 바로 도교, 도가 혹은 선도사상 같은 것들이 있다. 동양의 3대 종교로 전승되어온 도교와 우리네 선조들의 도교적 흔적들을 만나 본다.
도교, 도가사상 혹은 선도 - 무위의 정신세계
도교를 정의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철학적 근간을 찾자면 노자와 장자의 사상이 혼합된 노장사상을 말할 수 있으나, 종교적 의미에 무게를 두자면 선도仙道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노장사상은 의식전환을 통한 정신적 자유와 불멸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반면, 선도사상은 주로 육체적 불사를 이루어 신선이 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듯한 두 사상이 도교라는 큰 맥락으로 전승되어오고 있는데, 이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한 것이어서 따로 떼어놓기도, 그렇다고 하나로 묶어 말하기에도 어려운 점이 있다.
노자가 말하는 철학적 사상으로서의 도는 일종의 무위無爲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도덕경’ 에 따르면 ‘도는 항상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일은 하나도 없다’ 라고 말하고 있다.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이거나 조작성이 없이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즉 ‘천연스러운’, ‘꾸밈이 없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성인의 모습을 노자가 재미있게 묘사한 부분이 있어 소개해 본다.
세상 사람들은 마치 진수성찬이라도 받아 놓은 듯 신바람이 났네.
화창한 봄날 정자에 올라 꽃구경이라도 하듯이.
그러나 나만은 담담하고 조용하고 마음이 동하는 기미도 없네.
마치 웃을 줄도 모르는 갓난아이처럼.
마치 아주 지쳐 돌아갈 집도 없는 강아지처럼.
사람들은 무엇이든 남아돌 만큼 가지고 있지만
나만은 모든 걸 잃어버린 것 같네.
아. 나는 바보 같구나. 아무 것도 모르고 멍하니.
세상 사람들은 똑똑한데, 나는 그저 멍청할 뿐.
남들은 딱 잘라 잘도 말하는데, 나만은 우유부단, 우물쭈물
흔들흔들 흔들리는 큰 바다 같네.
쉴 줄 모르고 흘러가는 바람 같네.
- 도덕경 20장 -
노자가 당대의 풍조를 풍자한 위의 정황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세상은 물질만능주위 속에서 이기심으로 가득하고, 남들보다 많이 벌고 높이 오르는 것이 삶의 가치척도가 되어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남이 하는 것을 안 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오인받기 쉽고,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는 것은 발악을 하며 싫어하는 현대인의 모습, 사람들이 이런 습성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모양이다. 이러한 습성을 노자는 통렬히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옛 기록에 남아있는 도교의 흔적들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도교가 들어온 것은 고구려 영류왕 때의 일이다. 당시 중국의 오두미도五斗米道가 들어와 성행하였는데 이 소문을 들은 당의 고조는 고구려에 도사와 도교의 최고신인 천존의 상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약 20년 뒤 연개소문은 자신의 세력 확장을 위해 기존 세력이었던 불교를 견제할 의도로 중국 도교를 대대적으로 수입하게 된다. 이때 중국에서 온 도사들로 하여금 나라를 위한 도교식 의례인 재초齋醮를 지내게 하여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고 한다.
백제와 신라의 도교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삼국이 통일되기 전 김유신이 도교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방술을 닦았다는 기록이 있고, 그의 손자인 김암이 당나라에 유학 가서 도교식 방술의 일종인 둔갑술을 배워와 병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전에도 신라에는 신선과 관계되는 설화들이 많이 있었다. 중국 황제의 딸이 신라에 와서 박혁거세를 낳고 선녀가 되었다는 선도성모仙桃聖母의 이야기, 신라 최고의 화랑 네 명을 사선四仙이라 부르며 신선처럼 대우했던 일, 호공, 물계자, 우륵 등 여러 인물과 관련된 신선 설화 등 신라 고유의 신앙과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 섞여있는 이야기들이 많다.
백제의 도교는 기록이 거의 전무하다. 다만 일본의 역사책인 ‘일본서기’의 내용에 7세기 초 백제 승려 한사람이 일본에 천문학이나 달력, 혹은 도교식의 둔갑술이나 다른 방술에 관한 책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 이전에 백제에 도교가 들어와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종교로서의 도교가 체계를 갖춘 것은 고려시대에 들어서다. 태조 왕건이 거행했던 불교식 의례인 팔관회에는 도교적 내용이 가미되어 있다. 하늘의 큰 영天靈이나 다섯 가지 큰 산五岳 등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는 도교와 불교의 혼합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초제醮祭와 같은 도교적인 의례가 국가의 주관으로 집행되었다. 그러나 조선에 이르러 도교는 쇠퇴해 갔다. 태조 이성계는 왕이 되기 전 태백금성 같은 별에 제사를 지냈고, 왕이 된 후에도 전국의 성황당에 제사를 올리게 하는 등 도교의식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나, 중심 이데올로기로 자리한 유교세력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왕실에서 날로 쇠퇴해 갔다.
민간신앙으로 융화된 도교
왕실에서 유교에 자리를 내어준 도교는 대신 민간신앙에 흡수된다. 신선, 신령, 선녀에 관한 수없는 민담들, 홍길동전이나 전우치전에 나타난 흥미진진한 도술이야기, 부엌 아궁이에 머물러 있다는 조앙신이나 옥황상제, 서낭당 신의 이야기가 모두 일상 속의 도교적 분위기를 그대로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전래의 토속적인 것과 중국에서 들어온 외래적인 것이 섞여 나타난 형태이다. 또한 도교는 도참사상이나 풍수사상과도 연관되어 관련된 흥미로운 저작들이 많이 남겨져 있다. 이지함의 ‘토정비결’, 남사고의 ‘남사고 비결’, ‘정감록’ 같은 익숙한 저술들이 눈에 띈다. 특히 동양 최고의 의학책으로 추앙받는 허준의 ‘동의보감’ 또한 도교의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 허준이 이 책을 저술할 때 가장 많은 영양을 준 사람이 정작이라는 사람인데, 그의 사촌이 조선 최고의 도교 연구가인 북창 정렴이다. 정작 역시 도교에 정통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관습들이나 전통, 저술들을 보아 우리나라의 도교는 결코 죽은 전통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와 간접적으로 많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 글·사진_ 남정우
▶ 사진 제공_ 삼성미술관 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