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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옛 다리를 찾아서’ - 잃어버린 옛 시간 여행
작성일
2007-02-20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798

잃어버린 옛 시간 여행

‘옛 다리를 찾아서’

만남과 헤어짐의 경계가 되는 허공의 길

다리는 ‘이편’과 ‘저편’을 이어주는 소통의 길이다. 다리를 통해 마을과 마을이 연결되고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 요즘이야 하늘로도 길이 열리고 땅 밑으로도 길이 뚫리는 세상이지만, 오로지 제 발로 온전히 땅을 밟으며 걸어야 했던 옛 사람들에게 다리는 더없이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였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돌 하나하나 인력으로 쌓아 올린 옛 다리에 서면 은근한 옛 사람의 향취가 느껴지는 것 같다. 소박하나 정교하며, 멋스러우나 경망스럽지 않은 옛 다리. 오랜 시간 제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떠받치며 풍
상을 견뎌 온 옛 다리를 찾아 떠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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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 진천 농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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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고속도로 서울 방향으로 증평IC를 지나면서 오른쪽을 유심히 바라보면, 진천 농다리를 볼 수 있다. 농다리가 있는 곳은 예로부터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고 하는 진천 땅 문백면의 세금천이다. 농다리는 충북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어 있으나, 작은 낙석으로 다리를 쌓은 방법이나 다리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축조한 기술은 우리나라에서 유례가 없다. 농다리라는 이름의 유래는 이렇다. 자연석을 쌓아 만든 구조의 특성상 사람이 발을 디딜 때 돌이 움직이기도 하고, 손으로 흔들면 흔들리기도 해서 ‘수레의 굴대’라는 뜻을 가진 농籠자를 써서 농다리라고 하게 되었다 한다. 세인들은 농다리가 어떤 홍수나 장마에도 떠내려가지 않는 도깨비 같은 다리라고 한다. 그러나 농다리의 축조 형식이나 모양을 보면 교각 및 상판의 길이·간격·높이 등이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오랜 세월을 두고 유실되기도 하고 다시 쌓기도 한 듯하다. 농다리는 고려 고종 때 임연 장군이 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현존하는 동양의 다리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긴 다리에 속한다. 돌의 뿌리가 서로 물리도록 쌓고 그 속에 석회물의 보충 없이 건쌓기를 했는데, 처음의 길이는 100m가 넘었다고 하고 교각의 수가 28개였다고 전해지나 지금의 길이는 93.6m로 24개의 교각만 남아 있다. 걸음걸음 옮길 때마다 아름다운 무늬를 감상하는 즐거움을 안겨 주는 상판석은 170cm 정도의 길이와 20cm 정도의 두께로 한 장이나 두 장을 나란히 놓아 사람들이 건널 수 있도록 했다.
마을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하상이 낮아 다리 밑을 걸어서 지날 수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복개되어 농다리 밑을 지나가는 경험을 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농다리는 임진왜란과 한일합방 등의 국난이 닥쳤을 때 개울 흐르는 소리와 다른 특이한 소리로 울었다고 전하는데, 이는 오랜 시간을 마을과 함께 한 농다리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비롯된 듯하다.

 hspace=0 src=이몽룡과 성춘향의 사랑이야기 - 광한루 오작교
흥부전과 춘향전,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 같은 흥미진진한 옛 이야기들의 배경무대가 되는 곳이 전라북도 남원 땅이다. 그 배경 중에도 첫 손에 꼽히는 곳은 아무래도 이몽룡과 성춘향의 사랑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광한루일 것이다. 매표소를 지나 광한루원으로 들어서니 조선의 아름다운 정원답게 오솔길은 원만한 곡선을 그리며 끝을 감추고, 세 개의 섬이 떠 있는 연못과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멋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조선 정원의 아름다운 모습을 두루 갖춘 광한루원은 사적 제303호로 지정되어 있고, 특히 광한루는 보물 제281호로 지정되어 있다. 광한루는 세종 1년(서기 1419년)에 남원으로 유배를 온 황희 정승이 광통루라는 누각을 세운 것이 시초이고, 이후에 정인지가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광통루를 보고 “월궁月宮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와 닮았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해 광한루라 불리고 있다. 광한루원 연못을 가로지르는 오작교는 우리나라에 가장 긴 홍교(무지개다리)이다. 오작교는 세조 8년(서기 1462년)에 부사로 부임한 장의국이 광한루를 크게 수리하면서 놓은 다리이다. 화강암을 재질로 해서 만들어진 오작교는 4개의 홍예(아치)를 가지고 있고 길이 33m, 폭 2.6m, 높이 4m로 홍예와 홍예 사이에는 반듯하게 가공된 돌로 옆면을 마무리했다. 현재 광한루원의 연못에 있는 삼신산과 그것을 잇는 다리는 후대 사람인 송강 정철이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 다리도 놓인 장소에 따라 조금씩 그 용도나 의미가 달랐는데, 광한루의 오작교처럼 누각 앞에 놓인 다리는 옛 선비들이 누에 올라 시서화詩書畵를 겨루기 전에 마음을 깨끗이 하고 흐르는 개울에 자신을 비춰보는 구실을 하던 다리이다. 이몽룡도 오작교를 지나 광한루에 올라 시 한 수 읊조리다가 춘향이의 그네 타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고, 이는 결국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오작교의 전래동화가 현실로 이루어진 셈이다. 양반과 천민이라는 신분을 초월한 사랑. 오작교는 단순히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이 아니라, 신분의 강을 건너 사랑을 이어준 애틋한 사연이 담긴 다리인 것이다.

삼남 제일의 대교로 불렸던 - 강경 미내다리
금강의 지류인 강경천을 따라 흐르다 보면 미내다리를 만날 수 있다. 미내다리는 논산군 채운면에 있는 홍교로 충남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은 다리가 놓인 개울을 강경천이라 부르지만, 예전에는 미내渼奈라고 불러 지금도 미내다리로 불리고 있다. 개울 이름은 세월에 따라 변했지만, 다리만큼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옛 이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미내다리는 영조 4년(서기 1728년)에 송만운이라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 황산의 유부업·여산의 강명달·강지평이 재물을 모아 전라도와 충청도를 잇는 다리를 1년여에 걸쳐 만들었고, 당시에는 삼남 제일의 대교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은진미교비’에서 전하고 있는데, 이 비석은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미내다리는 3개의 홍예를 이루고 있는데, 가운데의 홍예가 양 옆의 홍예 보다 조금 크다. 길이 30m, 폭 42.8m이고 높이가 4.5m 정도인데, 지금은 교각이 토사에 묻혀 2m 정도만 드러나 있다. 이러한 미내다리는 충청과 전라를 나누는 금강의 지류인 강경천을 가로지른다. 충청과 전라가 어떤 곳인가. 삼남 지방 중에서 최고의 곡창이 전라도이고, 충청도는 삼남지방 가운데 서울과 가장 가까운 곳이니, 전라도의 물산이 충청도를 거쳐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교통의 수요가 많은 곳이다. 다리의 폭과 높이를 보면, 조선시대 큰 포구의 하나였던 강경항을 드나들던 배와 뭍으로 물산을 운반하던 부산스러움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이러한 유통의 중심지에 놓여 조선 팔도로 사람과 물산이 모이고 흩어지는 흥성을 겪었고, 이제는 금강하구언으로 인해 작은 어촌이 되어버린 강경의 퇴락까지 큰 덩치로 꿈쩍 않고 지켜온 든든한 다리가 바로 미내다리다.
우리나라 어느 곳이든 마을마다 다리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허다하다. 또 지명이나 도로명을 보더라도 다리와 관련된 것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다리가 한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지금으로 치자면 ‘랜드마크’의 구실을 했던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다리와 관련한 민속놀이를 보면 영남의 북부지역 아녀자들이 하는 놋다리밟기가 있고, 정월 대보름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다리밟기 놀이가 이 땅 어디에서든 전승되고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리는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기 위해 놓여지지만, 다리는 실상 그 다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어 주고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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