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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설을 이야기하는 문화재 - 테마기획 Ⅱ
작성일
2007-02-20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342

테마기획 Ⅱ  전설을 이야기하는 문화재

비바람 견디며 천 년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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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에 새긴 거구, 석불은 우리 시대 자화상

천년 석불의 얼굴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표정이 점점 자애로워진다. 오랜 세월의 비바람을 맞으며 돌부처의 이목구비를 점점 닮아가는 것이다. 세월이 비껴나가는 것은 석불에 얽힌 이야기뿐이리라. 묵묵한 돌부처의 표정에 귀 기울여 본 사람이면 안다. 석불을 천 년 동안 지탱한 힘은 사라지지 않는 전설이란 것을.

 hspace=0 src=갸륵한 불심의 승화, 제비원석불
‘성주의 본향이 어디메뇨? 경상도라 안동땅에 제비원이 본일레라’하는 성주풀이 가락을 보라. 무속신앙 속에서도 안동 제비원은 신성시되는 땅이다. 안동 시내에서 북쪽으로 6km, 태화산 기슭에는 거대한 암벽 위에 만들어진 부처의 얼굴이 있다. 신성한 제비원 전설을 풀어내는 제비원석불(보물 제115호)이다.
11세기에 조성된 제비원 석불은 거대한 암석으로 몸통을 삼고, 별개의 돌로 환조丸彫된 머리통을 올려놓은 불상이다. 몸체의 높이가 12.38m, 머리의 높이가 2m로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석불이다. 머리의 뒷부분은 파손되고, 큰 바위에 새겨진 몸체는 비바람에 무뎌졌지만, 얼굴 앞쪽에는 선명한 표정이 남아 있다.
제비원이라는 이름에서 ‘원院’은 사람들이 여행길에 쉬어가던 여관을 말한다. 영남에서 서울로 향할 때 안동을 거쳐 소백산맥을 넘어야 했는데, 그곳에서 쉼터 역할을 했던 것이 제비원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제비원에는 예쁘고 부지런한 ‘연’이라는 처녀가 있었다. 여덟 살 때 부모를 여읜 연이는 제비원에서 청소와 빨래를 하면서 지냈다. 부지런할 뿐만 아니라 마음이 따뜻하고 불심도 대단해서,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모두 감탄할 정도였다. 연이를 사모하는 총각들도 많았다. 이웃 마을에 살던 고약한 김 부자까지도 연이를 사모할 정도였다. 김 부자는 못된 심보로 동네에 명성이 자자했는데, 그 많은 재물을 다 써 보지도 못한 채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그가 죽어서 저승에 가자 염라대왕이 말하기를 “자네는 아직 올 때가 되지 않았으니, 인정이나 더 쓰고 오겠느냐. 워낙 생전에 쌓아 놓은 선행이 없어서 이대로 죽으면, 다음 생에는 소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소로 태어나 평생 노동에 시달릴 생각을 하니, 김 부자는 눈앞이 깜깜했다. 김 부자가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저승의 창고 가득 선행을 쌓아둔 사람에게서 조금 그 선행을 꾸어 쓰는 것이었다. 김 부자는 다른 이의 선행을 꾸어 쓰고, 그것을 다시 갚기 위해 이승으로 돌아갔다. 다시 살아나자마자 그가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은 연이였다. 김 부자에게 선행을 빌려준 사람이 바로 연이였기 때문이다. 김 부자는 은혜를 갚기 위해 자신의 재물을 연이에게 많이 나눠 주었고, 자초지종을 들은 연이는 그 재물을 모두 부처님께 바치기로 결심했다. 연이는 도선국사에게 부탁하여, 큰 법당을 짓도록 했는데 공사의 규모가 워낙 커서 5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법당이 완공되던 날, 기와를 얹던 와공이 발을 헛디뎌 그만 높은 지붕에서 추락했다. 온 몸이 기왓장처럼 깨진 바로 그 순간, 와공의 혼이 제비가 되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이에 이 절이 ‘제비사’가 되고, 이곳이 ‘제비원’이 된 것이었다. 평생 처녀의 몸으로 갸륵한 불심을 보였던 연이의 삶은 서른여덟 살 되던 해에 그쳤다. 연이가 죽던 날, 온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큰 소리가 들리더니 커다란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 다음날 아침, 사람들은 갈라진 바위 속에서 자애로운 부처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연이의 혼이 이뤄낸 것, 그것이 바로 제비원석불이었다.
제비원석불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석불의 머리 부분은 조선시대에 다시 올려놓은 것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이 불상의 머리를 베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여송이 타고 있던 말이 제비원석불의 표정 앞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인데, 석불의 머리를 벤 후에야 비로소 말발굽이 움직였다. 당시에 떨어진 돌부처의 목이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는데, 그것을 어느 스님이 횟가루로 다시 붙여 놓았다. 그 연결 부위는 지금 염주모양으로 올록볼록하게 보인다.


 hspace=0 src=소망의 기원, 파주 용미리 석불
장지산 중턱의 거대한 암벽에 2구의 불상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왼쪽의 불상은 둥근 보관을 쓰고, 목도 원통형이다. 두 손은 가슴 앞에서 나란히 연꽃을 쥐고 있다. 이 원립불 옆에는 사각형 보관을 쓴 방립불이 있다. 보관과 합장한 손 모양이 다를 뿐, 신체 조각은 두 불상이 꼭 닮았다. 구전되는 바에 따르면, 둥근 보관을 쓴 불상이 남자상, 사각 보관을 쓴 불상이 여자상이라고 한다. 이처럼 두 가지 형태의 보관을 구별해서 만든 것은 특별한 의도가 있어서가 아닐까. 또 하나의 이야기를 실타래처럼 풀어내는 이 불상이 바로 경기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있는 파주용미리석불입상(보물 제93호)이다.
고려시대 선종은 자식이 없었다. 후궁으로 원신궁주를 맞이했지만, 걱정하던 바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원신궁주의 꿈에 두 명의 도승이 나타났다. 두 도승은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사는 사람들인데, 매우 배가 고프다”고 말했다. “먹을 것을 달라”고 하던 두 도승은 그렇게만 말하고는 곧 사라졌다.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그 내용이 생생하기에, 원신궁주는 이를 왕에게 고했다. 왕 역시 예사 꿈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사람들을 장지산으로 급히 보냈다. 왕의 심부름으로 장지산에 간 사람들은 곧 엄청난 위압감을 느끼고 돌아왔다.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그 위용이 범상치 않았던 것이다. 바위에 대해 전해 들은 왕은 곧 그 바위에 나란히 도승의 얼굴을 새기도록 명했다. 그리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렸더니, 그 해에 곧 원신궁주에게 태기가 있었고, 왕자 한산후가 탄생했다. 이 두 불상을 두고 왕과 왕비라고 하는 설도 있고, 미륵불과 미륵보살이라고 하는 설도 있으나 어느 쪽이든 두 개의 불상이 서로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뿌리가 같다.
현존하는 한국의 마애불 중에 가장 큰 불상으로 알려진 용미리석불은 전해지는 이야기처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55년 불상에 새겨진 조선시대의 명문이 발견되어 조성 시기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했으나, 고려시대인가 조선시대인가에 대한 확실한 답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다만, 어느 시기에 조성되었든 옛 사람들이 자연석에 미륵의 불성을 부여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사람들은 석불의 표정에서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석불을 둘러싼 전설은 그 가짓수가 많지만, 어떤 이야기든 뿌리는 늘 선善에 있다. 선한 불심이 집약되어 부처의 얼굴을 만든 것이다. 단단한 돌에 부처의 표정을 아로새긴 선조들의 마음은 어쩌면 전설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우리들의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글 _ 고은주(자유기고가) / 사진 _ 장명확(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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