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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삶과 세상의 이치를 새기는 윤도장輪圖匠, 김종대
작성일
2006-09-06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4024

■ 사람과 문화재 삶과 세상의 이치를 새기는 윤도장輪圖匠, 김종대

공간 속에 사는 사람의 머물고 나아감은 방위로 결정된다. 그리고 그 방위는 지구의 적도를 동서의 횡으로 나누고, 자오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나누어 가늠한다. 항해를 하거나 원행을 할 때만이 아니라 음택(무덤)이나 양택(집터)을 정할 때도 우리 선조는 주역이나 음양오행사상에 따라 그 방위를 신중히 결정했던 것이다. 자력이 있는 철침을 가지고 그 방향을 정했던바, 우리가 흔히 부르는 나침반이 그것으로 예로부터 내려오는 명칭은 ‘윤도’라 부른다.

장마가 지나가고 한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정오 무렵, 고창군 성내면 산림리 낙산마을에 도착했다. 낙산 보건소 옆의 아담한 한옥과 현대식으로 지어진 2층 건물이 바로 목적지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흰 모시 적삼 차림으로 아직도 소년처럼 풋풋한 미소를 띤 노인, 그가 바로 전통 윤도의 맥을 잇고 계신 김종대 선생(74세·중요무형문화재 제110호)이었다. 짙은 눈썹에 새치조차 별로 보이지 않는 빽빽한 모발, 뚜렷한 이목구비는 아무래도 선생의 연세를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땀을 흘리는 필자를 에어컨이 돌아가는 전수관으로 안내한 그는 시원한 음료수부터 권했다. 이어서 윤도에 대한 유래와 설명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윤도의 유래와 ‘흥덕패철’ 윤도는 24방위를 원으로 그려 넣은 풍수 지남침指南針을 말하는데 나침반羅針盤, 패철佩鐵, 나경羅經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중국 한대漢代에 점을 치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우리나라에는 A.D 1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낙랑고분에서 식점천지반式占天地盤이라는 패철이 출토되어 그 유래를 알 수 있다. 식점천지반은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원반과 방반의 두 반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반의 중심에는 북두칠성을 두고, 그 주위로 12간지를 기입하였다. 본격적으로 윤도가 사용된 것은 조선시대 들어와 풍수사상이 생활과 밀접해지고 일반화되면서부터인데 윤도라는 명칭은 조선 「선조대왕실록」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사대부들은 부채의 끝에 선추扇錘라고 부르는 작은 2·3층(윤도에 새겨진 동심원의 수)짜리 패철을 만들어 매달고 다닐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수요가 다해 지관이나 집안의 가보, 또는 장식용으로 일 년에 삼십여 건 정도의 주문만이 들어올 뿐이라고 했다. 원래부터 선생이 태어나고 사시는 낙산마을은 조선시대부터 윤도가 유명하여 ‘흥덕패철興德佩鐵’하면 명품브랜드로 인식되었다. (예전엔 이곳이 흥덕현이었다.) 마을 뒷산에 거북바위가 있는데 정확히 동서방향으로 누워있어 완성된 윤도를 그 바위 위에 올려놓으면 정확히 직각을 이룬다고 한다. 320여 년 전, ‘전씨’로부터 시작된 윤도 제작은 그 이후 ‘한씨’와 ‘서씨’를 거쳐 선생의 조부이신 ‘김권삼’이 대를 이었고 백부를 거쳐 선생에 이르기까지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데 선생의 아들이 전수생으로 기술을 익히고 있어 4대째 가업이라고 해야 옳겠다. 선생은 정읍 농고를 졸업하고 농협에 다니던 20대 중반 무렵 ‘네 사촌은 소질이 없으니 네가 가업을 이어야겠다.’라는 백부의 권유로 윤도를 시작했는데 정식으로 그 기술을 배운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어깨너머로 본 것으로 그만큼의 기술을 쌓았으니 아마도 윤도장의 운명을 타고난 것은 아닐까. 전수생인 김종대 선생의 아들 역시 대한주택공사에 다닌다고 했다. 역시 윤도는 선생 집안의 가업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윤도의 종류와 힘든 작업공정 전수관의 대부분은 전시장이라 부를 만큼 많고 다양한 윤도가 공간을 빽빽하게 메우고 있었다. 선추는 물론이고 거울을 단 면경철, 9층, 12층, 24층, 그 크기와 무게가 엄청난 32층의 윤도, 거북이 형상의 윤도 등 그야말로 윤도의 모든 것이 전시되어 있었다. 윤도 표면의 동심원 안에는 12지 24방위와 음양·오행·팔괘 등을 새겨 넣는데 층이 늘어날수록 들어가는 방위와 그 내용이 복잡해진다. 1층짜리엔 보통 480자가 들어가고 24층에는 총 6,000자를 새겨 넣는다고 한다. 그래서 24층의 윤도를 만들려면 보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젊었을 때는 눈이 좋아 괜찮았는디 이젠 눈이 영 어두워서.” 그도 그럴 것이 윤도에 새겨 넣은 한자들은 매우 섬세하고 아주 작은 글씨였다. 만일 한자라도 틀리게 새기면 전면을 갈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하니 고도의 정신집중을 요하는 작업임이 분명했다. 잠시 후 선생의 작업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창호 문에 마루가 깔린, 정갈한 작업장은 선생의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바늘집게, 정, 활비비, 돌음쇠, 조각칼, 정간대, 송곳 등 50여 가지 도구를 사용하는 전통적인 수작업을 고수한다고 한다. 재료는 내구성이 뛰어난 대추나무로 윤도에 사용되는 것은 2~300년 된 것이어야 하는데 충북 제천에서 구해온다고 한다. 기계도 없이 일일이 톱으로 한 아름 되는 대추나무를 베고 둥글게 깎아 일일이 사포로 문질러서 윤도의 모양을 만드는 일차공정이 끝나면 제일 어려운 각자 작업이 기다린다. 하루 백 여자 남짓 밖에 불가능한 이 각자 작업을 마치고 다시 사포로 표면을 다듬어 백옥가루를 표면에 입히면 비로소 새겨 넣은 글씨가 흰색을 띠고 선명하게 나타난다. 각자 못지않게 어려운 기술은 바로 바늘의 중심을 고정하는 작업이다. ‘돌대송곳’으로 윤도의 정중앙에 구멍을 내고 가는 주석봉을 그 구멍에 세운 후 주석봉에 바늘을 고정한다. 이 모든 작업을 마친 후 뒷산 거북바위에 윤도를 올려놓고 기능적으로 문제가 없는지를 시험해보면 비로소 하나의 윤도가 완성되는 것이다. 윤도와 함께한 행복한 삶 요즘은 가격경쟁력에서 비교가 안 되는 공장제작의 중국산 윤도가 들어와 얼마 안 되는 시장마저 빼앗기는 형편이라고 한다. 이젠 돈도 되지 않는 윤도 제작을 후회하지는 않느냐는 필자의 어리석은 질문에 선생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은 윤도를 제작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행복은 대를 이어 선생의 아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또 올해 6월, 전북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에서 있었던 윤도전시회에 많은 사람이 보여주었던 관심을 고마워하며 윤도에 올곧게 새겨 왔던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자랑스러워했다. 그러한 선생의 모습을 보면서 선생이 윤도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일찍이 자신의 업을 발견하여 격랑의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한 길만을 걸어오신 선생의 지혜였다. 과연 우리는 지금 인생의 좌표를 잘 잡아가고 있는 것일까, 물질이 만능이자 가치로 자리매김한 시대에 나아갈 방향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윤도장 김종대 선생을 만나고 나오는 길은 8월, 강렬한 오후의 햇살이 가득히 쏟아져 잠시 어디로 가야할지 혼미했다. 우리 모두에게도 혼돈된 세상을 헤치고 나갈 수 있는 윤도가 진정 필요한 것은 아닐까. 글 _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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