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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산자수려山紫水麗한 충의의 고장, 충북 괴산
작성일
2006-09-06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173

문화유산의 숨결을 찾아(괴산편) 1 산자수려山紫水麗한 충의의 고장, 충북 괴산

칠보산, 보개산, 덕가산, 백화산, 도명산, 군자산, 가령산, 낙영산, 대야산, 조령산 등 산악인의 사랑을 받는 명산이 즐비하고, 그 산자락마다 선유동계곡, 화양구곡, 갈론계곡, 쌍곡계곡처럼 멋진 계곡이 즐비하여 신선들의 놀이터라는 표현이 과언이 아닐 듯싶은 충북 괴산은 그 뛰어난 풍광에 못지않은 인심을 자랑하여 다녀가는 이들의 마음을 늘 감동으로 가득 채우는, 그야말로 한반도의 감추어진 보물이라고 칭할 수 있겠다. 괴산은 산세가 수려하고 물이 맑은 충의의 고장이다. 홰나무죂槐죃과에 속하는 280여 그루의 느티나무 노거수가 각 동리를 지키고 있다. 610년(진평왕 27년) 백제군의 침입 때, 신라 가잠성의 현령 찬덕은 성이 함락되자 홰나무에 머리를 박고 최후를 마쳤고, 찬덕의 아들 해론은 618년 가잠성을 탈환하였으나 다시 진격해 오는 백제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 두 부자의 충절 어린 가잠성 이야기는 괴산槐山이라는 명칭의 유래로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괴산은 백두대간을 경계로 동쪽으로 경상북도 문경시와 상주시에 접하고, 북쪽은 음성군·충주시와, 서쪽으로는 증평군·청원군과, 남쪽으로는 보은군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백두대간을 종주한 산악인들이 가장 아름답고 험난한 산행으로 청화산, 대야산, 악휘봉, 희양산, 백화산, 조령산을 꼽는데, 이 아름다운 산봉우리에 앉아 사방을 바라보면 넋을 놓게 된다.

괴산은 삼국시대에 삼국의 접경지역이라 치열한 전투가 끊이지 않았던 곳으로, 지금도 주민들 의식의 뿌리에는 살기 위해 나라가 바뀌는 것에 순응하며 사는 법을 터득하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고구려 때 잉근내라 부르다가 신라 때는 괴양현槐壤縣, 고려 때는 괴주槐州, 조선 태종 13년 이후에 괴산이라 불렀다. 수려한 산세와 첩첩산중으로 둘러싸인 옛 고을 연풍현에는, 조선시대 풍속화가 김홍도(1745~?)가 현감으로 부임하면서 가도 가도 첩첩산중이라 막막하여 울고, 떠날 때는 백성의 그 따뜻한 정을 잊을 길 없어 울었다고 하여 ‘울고 왔다 울고 가는 연풍 원님’이라는 일화가 남아 있다. 우암 송시열과 충무공 김시민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 괴산

산자수려한 괴산에는 화양동구곡, 쌍곡구곡, 선유동구곡, 풍계구곡, 고산구곡, 연화구곡, 갈은동구곡 등이 제 모습을 한껏 보여주기 위해 여름 피서객들을 맞고 있다. 특히 ‘금강산 이남의 최고 절경’이라는 화양동구곡은 조선시대 대학자이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병자호란 이후 이곳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고 중국의 무이구곡을 본떠 화양구곡(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파천)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화양서원과 화양구곡 주변에는 우암의 유적이 많다. 그 중 금사담의 반석 위에 세워진 암서재巖棲齋는 우암이 59세(1666년)에 지은 서재 겸 정자인데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암서재 근처의 암벽에는 ‘충효절의’·‘비례부동’이란 글을 새긴 곳이 많이 있어 우암을 중심으로 이곳이 당시 성리학의 중심지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화양서원에 세워진 만동묘정비萬東廟庭碑(충북기념물 제25호)는 우암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그의 제자 수암遂庵 권상하가 명나라의 의종 사후 60년이 되는 숙종 30년(1704)에 세웠다.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운 명나라의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제사祭祀하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글자 획들을 일일이 쪼아 알아보기 어렵게 훼손한 뒤 땅속에 묻어버렸던 것을 최근에 옛터에서 발견發見하여 수습하였다.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으로 불리는 진주대첩은 충무공 김시민 장군이 그의 아우인 김시약 장군과 함께 3천 병사로 왜군 3만 대군을 맞아 6일간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유명한 싸움이다. 괴산읍 능촌리에 장군의 애국충절을 기리는 사당과 유택이 충민사(충북기념물 제12호)에 잘 모셔져 있다. 충민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취묵당이 느티울 강가에 우뚝 서 있다. 일명 ‘억만재億萬齋’라고도 불리는데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손자인 김득신은 타고난 둔재여서 10세에 글을 깨우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백이전伯夷傳」을 십일만 삼천 번이나 읽었다고 하니 오죽하면 ‘억만재’라고 칭하였을까. 뒤늦게 벼슬을 버리고 유유자적 시를 쓰며 시인으로서의 삶을 81세까지 향유하며 이곳 취묵당에서 지냈다고 한다.

벽초 홍명희의 민족의식이 구현된 『임꺽정』의 탄생지, 괴산 1910년 경술국치를 당했을 때 비분강개하여 관리로서는 처음으로 자결한 금산군수 홍범식 의사는 괴산의 대문호 벽초 홍명희의 부친이다. 그는 ‘죽을지언정 친일하지 말고 먼 훗날이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마라.’는 유언을 아들에게 남겼는데, 홍명희는 그 유언을 받들어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다고 한다. 홍명희는 기미년 대한독립만세운동을 충북 최초로 주도하였으며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평생을 몸바쳐 살면서 1928년부터 조선일보에 나라 잃은 설움을 『임꺽정』으로 표출하기도 하였다.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3대 천재로 일컬어졌던 홍명희는 1948년 남북 제정당 연석회의에 참석하고서 광복 이후 대한민국이 친일청산을 하지 않은 것을 빌미로 북한에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역사대하소설 『임꺽정』은 벽초 홍명희의 민족정신과 그의 문학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인데 신간회 활동 중 옥중에서조차 집필을 허용할 정도로 국민에게 인기가 있었다. 명문사대부가의 자제가 천민계급출신의 백정 임꺽정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을 보면, 진정으로 민중 속에 다가가려 했던 그 정신은 민족연합전선체인 신간회의 활동과 전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벽초 홍명희의 문학적 정신을 계승하고 통일문학을 추구하는 좰홍명희 문학제좱가 올해로 11회를 맞고 있다. 지금까지 괴산 보훈단체와의 갈등으로 벽초 문학비와 생가복원까지 수난을 겪고, 지역문화발전의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기도 하지만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희생이 될 수밖에 없었던 벽초의 삶을 우리는 모른 척하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 8회부터는 주민들의 냉대를 이겨내고 벽초 홍명희의 고향인 괴산에서 문학제를 치르고 있다. 아직도 폭넓게 이해하지 않는 주민들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끌어안을 것인가 생각하게 한다. 김순영 _ 괴산민예총 준비위원장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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