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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논매기를 마치고 즐기는 농부들의 명절, 백중百中
작성일
2006-08-03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646

논매기를 마치고 즐기는 농부들의 명절, 백중百中 음력으로 7월은 바쁜 농사일을 마친 뒤 가을 추수를 기다리는 달로, 다난한 농사일 중 잠시나마 허리를 펴고 쉴 수 있는 때이다. 우리네 농사일이 두레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일과 놀이가 어우러진 공동체의 잔치였던 칠월 백중은 바로 두레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고유의 농경문화가 사라져감에 따라 이제는 그 흔적만이 남아있는 백중의 여름 풍속을 알아본다.

밀양 백중놀이
<밀양 백중놀이>
백중의 어원 백 가지 곡식을 모두 갖춘 시기라 하여 붙여진 ‘백중百中’은 음력 7월 15일(8월 8일)로 백종百種, 중원中元 또는 망혼일亡魂日이라고도 한다. 백종은 이 무렵에 여러 가지 과실과 채소가 많이 나와 ''백가지 곡식의 씨앗''을 갖추어 놓았다고 하여 유래된 말이요, 중원은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삼원三元의 하나로서 이 날 천상天上의 선관仙官이 인간의 선악을 살핀다고 하는 데서 연유하였다. 또한, 이날을 망혼일이라 한 까닭은 조상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술과 햇과일을 정성껏 차려놓고 천신을 한 데서 비롯되었다.

길 쌈
<길 쌈>
백중의 유래 농촌의 7월은 바쁜 농번기를 보낸 뒤이면서 한편으로는 가을추수를 앞둔 달이어서 잠시 허리를 펼 수 있는 시기이다. 이때에 우리 선조는 ''백중''이라는 속절俗節을 두어 농사일을 멈추고, 천신의례 및 잔치와 놀이판을 벌여 노동의 지루함을 달래고 더위 때문에 쇠약해지는 건강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백중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불가에서 유래한 것으로, 조선 후기에 간행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우란분회를 열어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부처님께 공양하고 조상의 영전에 바쳤다고 한다. 또 조선 후기에 간행된 『송남잡식松南雜識』에 의하면 우란분회 때 승려들이 발을 닦아 발뒤꿈치가 하얗게 되어 백종白踵이라 한다는 설이 있으나 신빙성은 떨어진다. 한편, 제주도에는 백중에 관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 설화에 의하면 백중은 농신農神으로 상정되어 있다. "제주도의 목동이 곡식과 가축을 지키려고 옥황상제의 명을 어겼는데, 이 때문에 노여움을 받아 스스로 자결하였다. 그 후 농민들이 그가 죽은 날인 음력 7월 14일을 백중일이라 하여 제사를 지내어 그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진성기, 『남국의 민속下』) 이렇게 볼 때 백중은 본시 우리나라 고대의 농신제農神祭날이었던 것이 삼국시대 이후 불교의 우란분회의 영향을 받아 그 원래의 의미를 상실한 것으로 추측된다.

두레 재현 모습
<두레 재현 모습>
백중의 풍속 백중날에 행해지는 행사는 매우 다양하다. 각 가정에서는 수확한 과일로 사당에 천신薦新을 올렸으며, 궁중에서는 종묘에 이른 벼를 베어 천신을 올렸다. 농가에서는 백중날이 되면 머슴과 일꾼을 하루 쉬게 하고 특별히 장만한 아침상과 새 옷 및 돈을 주었는데 이를 ‘백중돈 탄다.’라고 하였다. 백중돈을 탄 이들은 시장에 가서 술과 음식을 사먹거나 물건을 사고 놀이를 즐겼다. 그래서 이때 서는 장을 특별히 ‘백중장百中場’이라 하였다. 마을 어른들은 머슴이 노총각이나 홀아비면 마땅한 처녀나 과부를 골라 장가를 보내고 살림도 장만해 주었다. ''백중날 머슴 장가간다.''라는 옛말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제주지방에서는 백중날에 살찐 해산물들이 많이 잡힌다고 하여 쉬지 않고 밤늦도록 해산물을 채취하기도 하고, 한라산에 ''백중와살''이라는 산신이 있어 백중 이후 오곡과 산과山果를 사람들이 따 가면 샘을 낸다고 하여 산신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또한, 신라에는 백중일을 기해서 부녀자들이 삼을 삼는 풍속이 있었다. 고려 중기에 간행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백중 무렵 왕이 6부를 정하고 이를 두 패로 나누어서 두 왕녀에게 각각 한패씩 거느리게 한 후 길쌈을 시켜 진 편이 이긴 편에 음식 대접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풍속은 근래까지도 경남지역의 ''두레삼''으로 전승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날에는 그 해에 농사가 가장 잘 된 집 머슴을 뽑아 소에 태워 마을을 돌며 위로하고 노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를 ‘호미씻이’라 한다. 지방에 따라 초연草宴, 풋굿, 머슴날, 백중놀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호미씻이는 호미질을 다하고 씻는다는 의미로 논매기를 마쳤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말이다. 백중놀이 형태의 세시풍습은 조선 말엽까지만 해도 중부 이남 지역 대부분에서 행해졌으나, 벼농사의 논매기에서 호미의 사용이 줄어들고 무엇보다도 여타의 고유한 농경문화가 파괴된 이후 그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현재 백중놀이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지역으로 밀양을 들 수 있다. 밀양백중놀이 밀양백중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는 경상남도 밀양 지방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는 농경 세시 행사로, 밀양에서는 백중날을 흔히 머슴날이라고 하고 이날의 놀이를 꼼배기참놀이라 부른다. 백중놀이는 앞 놀음, 놀음마당, 신풀이 등 세 마당으로 짜여 있다. 첫째 마당인 앞 놀음은 농신제로, 놀이판 한가운데에 겨릅대로 만든 농신대를 세우고 모인 사람들이 둥그렇게 둘러서서 세 번 절을 하고 풍년을 비는 마당이다. 이어 놀음마당으로 들어가면 덧배기춤으로 흥을 돋운 다음 가장 흥겹고 재미있는 병신춤이 펼쳐진다. 마지막 마당인 신풀이에서는 관중과 악기를 만지던 잽이 및 춤꾼들이 한데 어울려 한바탕 허튼춤을 춤으로써 흥을 달랜다. 밀양백중놀이는 농사의 풍요를 위해 농신제를 올리는 제의적인 신앙요소와 한국인의 멋과 흥을 발산하는 예능적 요소가 스며있는 놀이로, 양반들에게 시달림을 받던 농민들이 갖가지 불구자로 꾸미고 나와 양반들의 몰인정하고 비인간적인 태도를 익살 넘치는 춤으로 풍자한다.

들돌들기
<들돌들기>
오늘날 생산 방식이 변하여 삶의 현장에서 백중과 관련된 여러 풍속이 사라졌지만, 그 바탕을 이뤘던 삶의 진솔한 모습과 공동체적 신명을 되새겨 봄으로써 현대인들의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생각을 반성하는 기회가 되기 바란다. 글 _ 편집실 자료제공 _ 국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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