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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선비문화의 향기와 동학정신이 살아 흐르는 땅, 정읍
작성일
2006-08-03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4454

태산선비문화권

태산선비문화권역은 호남지방에서 선비문화유산이 가장 많은 지역인 정읍의 태인, 칠보, 산내, 산외, 옹동, 북면을 아우르는 넓은 지역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칠보의 무성서원武城書院(사적 제166호)은 태산선비 문화권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신라시대 대문호이며 정치가였던 고운 최치원이 태산군수로 재직하는 동안 치적이 뛰어나 월연대(지금의 칠보면 무성리 성황산의 서쪽 능선)에 생사당(생존인물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지은 사당)을 세우고 태산사라 부른 것이 시초였다. 이 사당은 고려 말에 훼손되었다가 조선 성종 14년에 유림의 발의로 월연대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며, 그 뒤 조선 중종 39년(1544)에 태인 현감이던 영천자 신잠(1491~1554)이 부임하여 7년 동안 선정을 베풀다가 동·서·남·북 학당을 세우는 등 많은 치적을 남기니 주민들이 그를 사모하여 최치원과 함께 배향하게 되었다. 숙종 22년(1696)에 무성이라는 사액이 내려와 무성서원이라 했으며, 후에 고운 최치원, 영천자 신잠, 불우헌 정극인, 눌암 송세림, 묵재 정언충, 성재 김약묵, 명천 김관 등을 배향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뒤 정조 8년(1784)에 쌍계사로부터 최치원의 영정을 모시었다. 이 서원은 고종 5년(1868)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서 위기에 처했으나 당시의 현감, 유림 등이 청원하여 전라북도에서는 유일하게 화를 모면한 서원이기도 하다. 칠보 무성서원을 찾아가다 만난 칠보 태산선비문화 사료관의 안성열 관장(47, 서예가)은 태산 선비문화를 꿋꿋하게 이어나가고 있었다. 산외면 출신인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옛 선비들의 자취를 좇아 일일이 비문을 탁본하고 연구하며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고도 상세하게 자랑스러운 선조의 문화를 설명했다. 특히 불우헌 정극인의 ‘상춘곡’을 열정적으로 설명할 때는 조선시대 진정한 선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해졌다. 태인면 태창리에 있는 피향정披香亭(보물 제289호)은 자연을 벗삼아 쉼터로 사용하였던 호남 제일의 정자로 지역의 대표적인 정자건축 중 하나이다. 이 정자는 신라시대 최치원이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나 기록에는 조선 광해군 때 현감 이지광이 다시 짓고, 현종 때 현감 박승고가 건물을 넓혔으며 지금의 크기로는 숙종42년(1716) 현감 유근이 넓혀 세웠다고 한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이며 팔작지붕 집으로 4면이 모두 트여 있고 빙 둘러서 난간이 처져 있다. 건물 안쪽 천장은 지붕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지만 천장 일부를 가리기 위해 건물 좌우 사이를 우물천장으로 꾸민 점이 눈길을 끈다. 또한, 이 누정을 거쳐 간 시인과 선비들의 시가를 기록한 현판이 걸려 있어 건물의 품격을 더하고 있다. 호남 사대부 가옥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김동수씨 가옥金東洙氏家屋(중요민속자료 제26호, 산외면 오공리)은 소박한 구조와 건축가의 독창성, 조선시대 사대부 가옥의 중후한 모습을 대체로 원형대로 잘 유지하고 있다. 김동수의 6대 할아버지인 김명관이 조선 정조 8년(1784)에 세운 집으로 뒤쪽으로 창하산이 있고 앞쪽에는 동진강 상류가 흐르는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 풍수지리 상 명당이라 말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를 이루고 있다. 건물들은 행랑채·사랑채·안행랑채·안채·별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 마당과 바깥 행랑채가 있고 바깥행랑의 동남쪽에는 사랑채와 문간채가 있다. 사랑채 서쪽으로 ㄷ자형의 사랑채를 배치하였는데 그 앞쪽으로 ㄷ자 평면을 가진 안채가 있다. 안채는 좌우 대칭을 이루게 지어 좌우 돌출된 부분에 부엌을 배치하고 있는 특이한 평면을 갖추고 있다. 안채의 서남쪽에 있는 안사랑채는 김명관이 본채를 지을 때 일꾼들이 기거했던 곳이라고 한다.

상춘곡을 해설하는 안성열 관장
<상춘곡을 해설하는 안성열 관장>
동학농민운동문화권 태인면에 접어들면 Y자형의 강줄기와 만난다. 바로 이곳이 동학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만석보萬石洑(전북기념물 제33호)다.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동진강과 정읍천이 만나는 곳에 백성을 동원해 축조하고 과도한 수세를 물어 착취하게 되자 이에 분개한 농민들이 전봉준을 앞세워 폭정에 항거하게 되면서 동학농민운동이 불붙게 된다.

만석보에서 멀지 않은 배들평에는 말목장터(전북기념물 제110호)가 있다. 이곳은 동학농민군이 집결하여 고부관아古阜官衙(전북기념물 제122호)로 진격했던 곳이다. 한편 그 맞은편에는 전봉준 장군이 연설하고 난 후 기대어 쉬었다는 감나무(전북기념물 제110호)가 있었는데 고사하여 지금은 동학농민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말목장터에서 멀지 않은 장내리 조소 마을에는 전봉준이 훈장 생활을 하다 농민 봉기를 일으킬 때까지 살았던 전봉준 고택全琫準故宅(사적 제293호)이 있다. 한편,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은 동학운동을 모의한 곳으로, 사발통문 서명자 후손들이 거사 계획을 기념하기 위해 1969년 건립한 모의탑이 서 있다. 여기엔 사발통문 서명자 20명의 생몰 연대와 그 후손들의 거주지 등이 기록되어 있다. 1893년 11월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현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송두호의 집에서 전봉준 등 20명이 모여 항쟁을 계획하고 그 결의 내용과 아울러 사발을 엎어 놓은 모양으로 서명하여 각 마을의 집강에게 돌렸다 하여 사발통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전·후 부분이 훼실되어 그 전부를 알 수 없으나 동학운동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임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황토현
<황토현>
덕천면 하학리에 펼쳐진 황토현은 농민군이 관군을 크게 이긴 격전지로서, 이로 인해 기세가 높아진 농민군은 정읍, 장성을 비롯한 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게 되었으며, 나아가 전주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은 고부 백산에 집결해 있다가 조선 고종 31년(1894년) 5월 11일(음 4월 7일) 새벽에 인근 고을의 농민군과 함께 이곳에 진을 치고 있던 전주 감영의 관군을 기습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황토현 아래에 조성해 놓은 황토현 전적지黃土峴戰蹟地(사적 제295호)는 동학농민운동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곳이다.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을 비롯해 1987년에 세운 전봉준의 동상과 사당,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등이 있다. 황토현의 너른 들판에 녹두를 심을 예정이라고도 전한다.

말목장터에 있던 감나무
<말목장터에 있던 감나무>
비록 동학은 외세에 의해 무위로 돌아갔으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의 유교적 한계를 극복하고 반봉건, 척양 척왜라는 반침략의 민족논리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민중혁명이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크다 할 것이다. 이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을 향한 저항운동과 4.19 의거, 그리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 한국 민주화 역사의 뿌리이자 모태가 되었음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글 _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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