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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유산 다시보기(연천·파주편)
작성일
2006-06-0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285

전쟁 유적으로 돌아본 연천과 파주 한반도의 허리에 위치한 연천과 파주는 삼국시대의 고구려 최남단 격전지였고 우리 근대사의 비극인 한국전쟁 당시에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최대의 격전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오늘도 그 위로는 휴전선이 가로놓여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의 슬픈 역사가 진행 중인 곳이기도 하다. 연천호로고루瓠蘆古壘 (사적 제467호) 연천군 장남면 원당3리에 있는 호로고루는 임진강과 임진강 북동쪽에서 흘러들어오는 개울로 인하여 형성된 삼각구릉 위에 세워진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이다. 지정학적 위치나 출토유물로 인해 고구려 관방 유적 중 가장 중요한 곳으로 평가되었다. 401m 정도의 성벽은 ‘한들벌’로 이어지는 동쪽부분만 지상구조물을 쌓아 축조하였고 나머지 두 벽은 구릉의 암벽 윗부분에서 4~5m 정도만 돌아가면서 쌓았다. 원래는 성벽의 정상부에 장대가 있었던 10×5m 정도의 평탄지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포대가 주둔하면서 상당부분 훼손된 상태이다. 지표조사 당시 이곳은 충적세 제4기 층으로 확인되었으며, 주먹도끼 등 구석기 시대의 유물부터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시기에 걸친 유물이 출토되었다. 고구려기와를 비롯한 통일신라의 기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기와가 골고루 발견되었지만 현재까지 조사된 남한지역의 고구려 유적이 가장 많이 출토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각종 토기와 금동불상 한 점, 벼루 등이 발견되었고 한국전쟁 당시의 격전지임을 말해주듯 다양한 총기류의 실탄과 무기 부속품이 발견되고 있다. 연천당포성堂浦城 (사적 제468호)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당개나루터 동쪽의 현무암 수직단애 상에 지어진 당포성(전체 둘레 450m)은 호로고루와 마찬가지로 임진강 본류와 지류에 의해 형성된 단애지역 삼각형 지형의 평지로 연결된 한 변을 성으로 막은 구조다. 축조방식과 출토된 고구려 기와 조각 등으로 미루어 고구려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성의 특징으로는 보축벽이 3~4중이며 높게 쌓았다는 점, 성벽밖에 폭 6m, 깊이 3m의 대형 해자가 있다는 점, 성벽 상단부위에 이른바‘구멍기둥(柱洞 또는 石洞)’들이 확인된다는 점, 성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수직 홈이 파여져 있고 그 끝에 동그랗게 판 확確돌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 등이다. 당포성에 대한 1차 발굴조사는 2002년 10월~2003년 5월까지 이루어졌고 조사결과 호로고루와 마찬가지로 여러 번에 걸쳐 흙을 다져 쌓은 위에 돌로 성벽을 높이 쌓아 올렸으며, 성벽을 보강하는 보축벽도 높게 쌓은 것이 밝혀졌다. 이러한 점들은 고구려의 축성술과 유사하여 앞으로 남한지역에서의 고구려 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다. 쌓은 시기는 이곳에서 수습되는 유물들이나 축성술 등을 고려할 때 고구려가 임진강 남쪽의 백제나 신라를 방어하기 위하여 최초로 쌓은 것으로 보이며 신라가 점령한 후 개축하여 북방세력을 막는데 사용한 전초기지로 보인다. 성은 전체 둘레 450m, 서쪽 끝에서 동쪽 성벽까지의 길이가 200m이며 현재 남아 있는 동쪽 성벽은 높이가 6m로 임진강과 주변을 조망하기에 매우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연천은대리성隱垈里城(사적 제469호)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 582-14번지 일대, 한탄강과 그 지류인 차탄천이 합류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연천의 호로고루성과 당포성이 임진강 유역에 축성된 데 반해, 은대리성隱垈里城은 한탄강 유역에 자리하고 있다. 구조는 두 하천의 지류가 만나는 곳에 형성된 삼각주위에 지어진 것으로 호로고루성과 당포성의 형태와 같은 구조다. 전곡리 선사유적지(사적 제268호) 부근 경기도립 연천의료원 옆, 한탄강 수직단애 위의 유적은 현재 동쪽과 북쪽 성벽의 상당부분이 훼손된 상태지만 성 내부의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지난 2003년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시굴조사가 이루어져 은대리성의 대략적인 성격이 규명되었다. 시굴조사에 의해 밝혀진 성의 평면은 삼각형 형태로 남벽과 일부 북벽은 한탄강과 차탄천이 형성한 자연단애를 이용하고 있으며, 동쪽 평탄지에는 토석 혼축으로 동벽을 축조했다.

연천당포성 유적발굴터
<연천당포성 유적발굴터>
은대리성은 외성과 내성의 이중구조이다. 외성의 전체 규모는 동서 400m, 남북 130m에 둘레가 총 1,005m이고 면적은 26,479㎡이다. 내성의 둘레는 총 230m로 내부면적은 2,770㎡이다. 내성이 있다는 것은 당포성과 흡사하지만 내성에서 유물이 수습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성과 외성의 선후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 성 내부 시설물로는 문지門址 3개소, 대형건물지 1개소, 치성 3개소가 확인되었다. 문지가 개설된 지역은 지형이 비교적 낮은 지역이다. 북벽에서 확인된 2개의 문지는 배수구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성벽의 기저부를 조성하기 위해 구지표층 위에 점토와 모래를 섞어서 사용했으며 동벽의 내벽 부분에서는 성벽 축조 시 기둥을 설치했던 흔적이 발견되었고 2회 이상 성을 고쳐 쌓은 흔적도 확인되었다. 한편, 동벽 내부에서는 토성의 내면에 고이는 빗물을 처리하기 위한 시설인 구溝가 확인되었다. 구의 규모는 동서 폭 2m 정도이며, 깊이는 약 30cm 정도이다. 이 시설은 동벽을 축조하면서 같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은 토기편이고 삼국시대 성에서 흔히 출토되는 기와는 단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다는 특이성을 보인다. 토기 조각은 크게 백제 토기와 고구려 토기로 대별되는데, 이 중 95% 이상이 고구려 토기이다. 토기의 대부분은 파편으로 출토되어 기형器形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표면에 새끼줄 문양인 승문이 시문된 것으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로 추정되는 것들이다. 이 토기들이 초축과 관련된다면 은대리성의 축조시기는 4세기 후반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연천호로고루 원경 (사적 제467호), 연천호로고루 성벽 일부
<연천호로고루 원경 (사적 제467호), 연천호로고루 성벽 일부>
연천역 급수탑(등록문화재 제45호)

연천역 급수탑 (등록문화재 제45호)/급수탑 벽면의 전쟁 상흔
<연천역 급수탑 (등록문화재 제45호)/급수탑 벽면의 전쟁 상흔>
연천역 급수탑은 1919년 인천~원산 간 중간지점에 세워진 철도 급수탑으로 증기 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시설이다. 증기 기관차와 급수탑은 1899년 9월 서울~인천 간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처음 등장하여 교통수단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였으나, 1950년대 디젤기관차가 등장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세워졌던 연천역사의 시설물들은 한국전쟁 시에 폭격에 의해 모두 사라졌으나, 급수탑만은 원형대로 잘 남아 있다. 건립 당시에는 기관차 뒤에 달린 탄수차炭水車에 물을 공급하는 동안 물물교환 등 상거래가 활발하여 시장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북한의 최남단 지역이었고 경원선을 통한 북한의 군사물자가 대량으로 하역되었다. 이 때문에 하얀색의 이 급수탑을 좌표로 삼아 미군의 폭격이 극심하였고 아직도 건물에 탄흔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연천역 급수탑은 강원도 도계역 급수탑, 추풍령역 급수탑, 충남 연산역 급수탑, 경북 안동역 급수탑, 영천역 급수탑, 경남 삼랑진역 급수탑과 함께 철도 역사의 이해와 근대 교통사 연구를 위한 주요 유산으로 인정받아 2003년 1월 등록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칠중성七重城 (사적 제437호)

칠중성 원경 (사적 제437호)
<칠중성 원경 (사적 제437호)>
칠중성은 적성면 구읍리 중성산의 8~9부 능선에 위치한 테뫼식 산성이다. 정상에 서면 오른쪽으로는 서울로 통하는 지방도로, 뒤로는 문산 쪽으로 연결되는 국도가 확연히 내려다보여 이곳이 왜 삼국 간의 영토분쟁이 치열했던 지역이며, 현재에도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 되는가를 알 수 있다. 특히 칠중성 후방 6Km 지점에는 파주에서 가장 높은 감악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전략적으로 최후의 마지노선이라 할 수 있다. 삼국시대 이래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되고 있는 칠중성 정상에는 여러 군사시설물이 성안 이곳저곳에 자리 잡고 있다. 한국전 당시에는 영국군 1개 연대가 이곳에서 북한군을 방어하다가 전세에 밀려 모두 전멸했던 영국군 전적지이기도 하다. 현재 산성의 규모나 형태는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다. 파주 자유의 다리(경기도기념물 제162호) 임진각에서 가장 유명한 ‘자유의 다리’는 나무로 얼기설기 대서 만든 교각 위에 철 난간이 있고 나무로 바닥을 깔아놓은 83m의 허름한 다리지만 1953년 건설될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본래는 독개다리라고 불렀던 다리인데, 휴전협정 이후 북한에 잡혀 있던 12,773명의 포로가 이 다리를 건너오면서 ‘자유의 다리’라 부르게 되었다. 판문점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와 함께 한국전쟁의 비극을 상징하는 이 다리는 7·4공동성명 이후 남북회담 대표들이 지나다닌 길목이기도 하다. 자유의 다리 끝에는 더는 갈 수 없도록 철조망이 쳐져 있는데, 철조망 빼곡히 색색의 천 조각이 걸려 있다. 망향의 한을 달래기 위해 이곳을 찾은 이들이 북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천조각들인 것이다.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자유의 다리’가 한민족 ‘희망의 다리’로 불리기를 염원해 본다. 연천과 파주는 삼국시대에는 한반도 내 고구려의 통일전쟁의 중요한 교두보였고 근대사의 비극인 한국전쟁 당시에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한편으로는 무구한 세월 속에 동족 간에 살육을 벌였던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 같아 착잡해지는 심정을 금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우리 민족의 평화와 화해의 땅으로 다시 태어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취재 _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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