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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유산의 숨결을 찾아
작성일
2006-05-0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467





전북 익산·충남 부여의 석탑을 찾아서 4월 중순의 부여. 구드래 나루터는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금강이 낳은 시인 신동엽선생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낙화암에서 들려오는 단조의 대금소리는 1400여 년 전 부여의 밤, 그 신비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답사 일행은 이른 아침 마치 순례자들의 무리처럼 부소산성의 영일루에서 옛 백제의 서광을 실감하고 있었다. ‘옛 백제 땅의 석탑을 찾아서’라는 주제의 첫 답사지는 익산 왕궁리 5층석탑이다. 아침에 만나는 답사풍경은 밤새 쌓였던 토론의 여독을 밀어내고 색다른 빛깔과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예로부터 왕궁평王宮坪으로 불리던 넓은 공터의 입구에는 예전에 없던 생뚱맞은 전시관이 세워져 있었지만, 아름다운 벚나무 군락만큼은 예전 모습 그대로다. 문화유산 해설자님 曰, “이 벚꽃은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보는 거예요.” 발굴 작업으로 이 지역 벚나무 군락이 베어질 거라는 약간의 푸념이 배어있는 말투다. 왕궁리 5층석탑은 언뜻 보기에도 커다란 덩치에 나이도 정확히 알 수 없으면서 많은 속설을 지니고 있다. 탑의 비밀스런 속내에 간직한 사리함과 금강사경, 외모에서 보이는 형식과 구조에 있어 백제계 석탑이니 신라탑의 양식이 어우러진 고려전기의 석탑이니 하는 미술사적 분류만으로는 채워지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탑의 근원은 부처의 죽음을 계기로, 남겨진 사리에 대한 봉안이 불상이 없던 시대의 탑파신앙으로 이어진 것이다. 원圓에서 각角으로 서西에서 동東으로 탑의 형태적 변화와 이동의 시간만큼 탑은 점차 창조적 영조물이 되어갔다. 건축과 조각이 같은 기원에서 출발한 것만큼 죽음에 대한 경외심으로 신앙의 대상물을 만든 것은 같은 이치다. 여기에 구조적인 면과 조형예술적인 측면이 탑의 양식을 설명하는 기술일 뿐이다. 설명과 감상은 제작자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능숙한 망치질과 예술적 신앙심을 상상케 하는 이 왕궁리석탑은 탑 자체만의 독립된 언어로 보는 이를 감흥에 빠지게 하는 매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다음 답사지인 인근의 미륵사지에서는 석탑의 해체가 1층 옥신까지 진행되었다. 석고 조각처럼 외관이 깔끔하게 단장된 동탑과 비견되는, 그야말로 세월의 흔적이 덕지덕지 스며있는 국보 11호 미륵사지의 서탑은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 세키노타다시(關野貞)가 현지조사를 한 이후 1915년 일인日人들이 콘크리트로 응급 보수를 하였다. 세월이 흐른 지금 콘크리트의 보강부분이 더 이상 탑의 구조적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기에 현재 보수정비가 진행 중이란다. 미륵사지 전시관 주변에는 해체된 탑의 파편과 구조물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삼원 금당식의 거대한 가람을 이곳에 조성한 이유는 왕의 권위와 신앙심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탑이라기보다는 강력한 왕권과 신앙심이 한 덩어리로 표현된 상징물이 아닐까. 백제인의 신앙심과 예술적 상상력은 목탑에 만족하지 않고 작지만 구조적인 안정성을 꾀할 수 있는 정림사지석탑에서 새로운 조각의 지평을 열어가게 된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백제계 석탑의 모티브를 제공한 탑이지만 세월의 풍화 때문인지 오늘은 왠지 소슬한 느낌마저 준다. 이에 비해 다음 답사지에서의 장하리 탑에는 정갈한 모습의 받침돌과 삼층 옥신의 몸돌이 반半만 새겨져 있다. 에스파냐의 화가 엘 그레코는 그의 신앙심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을 그림에 넣었듯이 제작자의 의도는 일반인의 고정관념을 간단히 깨뜨려 버린다. 장하리에서 김밥을 먹으면서 탑에 대한 사랑싸움이 벌어졌다. 왕궁리, 미륵사지, 장하리, 정림사지 5층석탑 중 마음에 드는 석탑 하나를 고르는 일이다. ‘서울문화’라는 대화명을 가진 회원은, “정림사지 탑은 절세의 미인이지만 당나라의 침략에 목숨을 버린 왕비 같았고, 장하리 탑은 탑신에 스카프를 날리는 아기 무녀 같았으며, 무량사 탑은 쓸쓸한 불가의 여인 같지만, 왕궁리 탑은 몰락한 귀족의 여인 같았어요. 이에 비해 성주사지 탑은 소박한 민가의 따님들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라며 긴 관람평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 사람들은 관람객이 아니라 답사의 주인공이 되어가고 있었다. 탑을 통해 ‘해석’이라는 내면화의 영역에 도달한 것이다. 아무튼, 일행 중 대다수의 회원이 장하리 삼층석탑에 표를 던졌다. 그다지 웅장하지도 예쁘지도 않은 그야말로 천진스러운 매력에 모두 넋이 나가 버린 것이다.

부여에서 40번 국도를 따라 서쪽방면을 가면 보령과의 경계에 무량사가 있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을 들어서면 여유 있는 대지위에 오랜 수령의 느티나무 두 그루와 5층석탑, 그 북쪽에 극락전이 개방적인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되어 인조 때 중건된 극락전은 육중한 스케일에도 경쾌한 중층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 전면의 5층석탑은 안정된 비례감에 정림사석탑을 꼭 빼 닮아 고려 초기에 조성된 백제계석탑으로 불리고 앙증맞은 석등과 더불어 옛 절집의 분위기를 잘 자아낸다. 내려오는 길에 풀섶에 있는 매월당 김시습의 시비를 만난다. 半輪新月上林梢 새로 돋은 반달이 나뭇가지 위에 뜨니, 山寺昏鐘第一鼓 산사의 저녁종이 울리기 시작하네. 淸影漸移風露下 달 그림자 아른아른 찬이슬에 젖는데, 一庭凉氣透窓凹 뜰에 찬 서늘한 기운 창 틈으로 스미네. 마지막 생을 이곳에서 보낸 매월당의 행운유수行雲流水한 담담한 시에서 한 지식인의 불우한 처지가 초연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몰이 질 즈음 답사의 마지막 길은 항상 폐사지로 향하게 된다. 저녁 어스름, 그림자가 길게 드리울 무렵, 낮은 바람소리와 고요함이 눈에 익은 풍경과 어울려 답사의 진풍경을 자아낸다. 한 때 보령의 성주사지는 구산선문의 천년대찰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이르러서야 비로소 답사객은 확 트인 넓은 대지위에 마음의 짐을 풀게 된다. 오늘 하루 물처럼, 별처럼, 옛 백제 땅의 탑을 돌아본 까닭은 천오백 년 전의 하늘에 매달린 풍경 하나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탑의 석재에 서린 세월의 부식, 그 짙은 향을 맡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차문성 / 우리얼 www.uriu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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