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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문화유산 다시보기(제주편)2
작성일
2006-04-03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545



삼다의 제주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역사 유적은 무엇일까? 답은 의외로 명백하다. 너무 단정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제주에서 항파두리 만큼 제주도의 역사성을 더 잘 상징할 유적이 없기 때문이다. 제주, ‘평화의 섬’? 제주를 흔히 ‘평화의 섬’이라고 한다. 그 ‘평화’의 단어에서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로수가 남국의 바닷바람에 나부끼는 조금은 나른한 풍정, 혹은 해변에서 부서지는 하얀 포말의 낭만적 풍광을 연상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주를 ‘평화의 섬’이라 하는 것은 다분히 역설적이고, 기원적 표현이라는 감이 있다. 아직 마르지 않은 4·3항쟁의 혈흔이 그렇고, 송악산 기슭의 알뜨르 비행장, 해안포대의 존재가 이 점을 암시한다. 그 역설적 ‘평화’의 중심에 항파두리가 있다. 항파두리성은 13세기, 1271년부터 1273년까지 3년간 삼별초의 항몽 거점이었다. 초원으로부터 역사의 ‘지진’을 일으킨 징기스칸의 몽고는 쿠빌라이에 이르러 지금의 북경에 새 도읍을 정하고, 유라시아에 걸치는 미증유未曾有의 대제국을 건설한 것이 13세기의 세계사이다. 이 전쟁의 와중에서 고려는 40년 세월을 몽고의 군사적 압력에 대항하고 있었다. 저항의 거점도 국경으로부터 강화도로, 그리고 진도를 거쳐 이제 반도에서 남으로 바다 멀리 떨어진 제주도로 옮겨 있었다. 제주의 군사적 거점이었던 항파두리성은 1273년 여·몽연합군의 대공세로 파괴되었다. 본래 탐라국이었던 제주는 중세에 이르기까지 독립적 문화와 정치조직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토착의 ‘성주’ 혹은 ‘왕자’가 정치적 지도자로서 여전히 기능하였던 것이 고려시대였다. 그 탐라의 역사가 육지의 역사에 귀속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든 것이 바로 1271년 삼별초의 제주 이동이었다. 삼별초가 무너진 1273년부터 항파두리에는 삼별초를 대신하여 몽고의 군사가 주둔하였고, 이후 백 년 동안 이 섬은 몽고의 영향력 아래 두어졌다. 고려, 일본 혹은 남중국 등을 견제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써 잠재성이 착안된 때문이다. 제주도에 몽고의 풍습과 흔적이 육지보다 더 강하게 남게 된 것은 이런 연유인 것이다. 항파두리, 제주역사의 분수령

삼별초에 의하여 육지의 문명이 대량으로 유입되고 이후 대륙의 문물이 유입되는 것과 궤를 같이하여 이 섬은 급격히 독립성을 상실하고 육지에 부속된 섬으로서 구조가 바뀌어간 것이다. 이 점에서 항파두리성은 독자성에서 부속성으로, 제주의 역사를 양분하는 분수령의 지점이었던 셈이다. 삼별초군에 의하여 구축된 둘레 6km의 항파두리성은 아직 많은 수수께끼를 간직하고 있다. 돌 많은 제주에서 왜 흙으로 성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토축의 방식은 육지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 또 성안 시설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어떠하였으며 성안의 건축에 쓰인 기와들은 진도 혹은 강화의 그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삼별초와 제주사람들은 어떤 관계로 삶이 영위되었으며 삼별초 이후 항파두리성은 어떻게 이용되었나 하는 등의 많은 의문이 그것이다. 이 성에 대한 정밀한 조사는 이와 같은 의문에 대하여 상당부분 의문을 해소해줄 것이다. 아울러 당시 여몽군의 각종 무기류, 생활 용품 등의 구체적인 증거물들을 이 성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항파두리성의 역사적 가치가 주목된 것은 1960년대 이후, 군사정권에 의한 것이었다. 이른바 ‘호국’의 사적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된 것이다. ‘항몽순의비’의 조성은 바로 이 시기 우리의 역사 의식을 반영하는 또 다른 ‘기념물’이다. 항파두리성의 중심부, 즉 내성의 유적을 파괴하고 시설한 것이 바로 이 항몽순의비였다. 당시에 복원된 일부 토성도 원래의 축조 내용과 방법과 무관하게 시공한 ‘토목공사’였다. 이 항파두리성이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것이 1999년, 그리고 2002년에 이르러서야 초보단계의 지표조사가 시행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1970년대 초에 이루어진 실패한 역사복원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과거의 ‘만행’이 항파두리성에서 다시 재현될 수 있다는 불안이 여전히 상존하고 있다. 항파두리성에서 우리의 역사 인식이 ‘관념’으로부터 ‘과학’으로, 보다 분명히 나가야 한다는 것을 절감한다. 우리시대의 항파두리 제주에 있어서 13세기 반몽항전의 유적은 항파두리만은 아니다. 항파두리를 중심으로 많은 군사시설들이 조직화되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제주도의 연안을 돌로 빙 둘러쌓았다는 ‘환해장성環海長城’의 존재이다. 왜구 등에 대한 필요 때문에 후대의 보축이 끊임없이 진행된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 장성의 일부는 아직도 해안 곳곳에 남은 채 훼손이 진행 중에 있다. 그러나 이들 유적에 대한 체계적 조사와 정리·보존을 위한 정책은 아직도 요원한 것처럼 보인다. 1273년 제주도를 함락시킨 여·몽연합군은 이듬해 1274년 일본의 서쪽 관문인 하카다(후쿠오카)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1281년 이들 연합군이 재차 하카다에 육박하였을 때, 그 사이 일본은 하카다 해안 일대에 장장 20km에 이르는 완벽한 석축의 방어벽을 구축해버렸다. 이로써 연합군의 재상륙은 불가능하였는데, 이른바 이 ‘원구 방루’ 구축의 아이디어가 제주도의 환해장성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더 남쪽, 오키나와의 왕성王城에서는 ‘계묘년’에 ‘고려’ 기술자가 만든 기와가 다량으로 확인되었다. 이 ‘계묘년’이 제주의 삼별초가 궤멸된 1273년이라는 주장이 있고 보면, 항파두리성 함락 이후 패잔한 삼별초군의 행방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상상력이 자극되고 있다. 유적도 그 가치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진정한 가치를 명확히 인정받지 못하는 것들이 아직 많다. 그 중의 하나가, ‘평화의 섬’, 제주에 있는 항파두리 유적인 것이다.

글 / 윤용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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