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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특별기획 문화유산 다시보기(안동편) 2
작성일
2006-02-04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186

언제인가 서울에서 안동문화를 이야기할 때 어떤 분이 “안동에는 양반문화만 있고 민중들의 문화는 없지 않은가?”라는 의견을 냈다. 필자 역시 대학교 때 문화운동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걸고 열심히 풍물을 칠 때는 그렇게 느꼈다. 그러나 안동지역을 답사하면서 또 다른 감동을 체험한 필자는 “양반문화 못지않게 민중문화도 강성한 지역이 안동이며, 그 증거로 하회탈춤, 놋다리밟기, 차전놀이 등의 무형문화재가 왕성하게 전승되는 곳이 안동이지 않는가!” 라고 조심스러운 의견을 개진한 기억이 난다. 또 하나 안동은 유교만이 흥성한 고장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물론 유교적 고장이긴 하지만 불교문화 또한 그에 못지않은 깊이를 새겼고 유산을 남겼다. 신세동 7층전탑과 봉정사 등의 불교문화유산은 그 양적인 면에서나 내용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손색이 없다. 또한 안동은 기독교가 일찍부터 전파되어 활발하게 활동한 지역이기도 하다. 근대 문화유산을 논의할 때 안동지역 기독교 문화유산 역시 중요하게 언급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렇듯 안동은 민중적인 민속문화, 불교문화, 유교문화, 기독교 문화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거치면서 다양한 외형과 깊이를 퇴적시키며 흘러왔다. 그러한 가운데 많은 유산을 남겨 안동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문화유산을 가진 지역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양적•질적으로 우수한 안동문화를 성립시킨 동인은 무엇이며, 그 저간에 흐르는 문화적 맥락은 어떤 것인가? 그리 오랜 기간은 아니지만 비교적 성실하게 안동지역 문화를 답사하면서 느낀 몇 가지 점은, 안동문화의 유형적 결정체인 문화재 속에는 안동문화를 만들어 온 사람들의 고민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 고민의 첫 번째는 바로 ‘자연과 세계관의 합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사찰 옥산사 그러한 사례의 가까운 증거는 바로 안동시 북후면에 있는 옥산사 마애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옥산사 마애불은 천등산 중턱 바위벽에 양각으로 새겨진 불상이다. 약사여래불로 좌우에 협시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흔적만 있고 현재는 보이지 않는다. 얼굴형이 아주 복스럽게(?) 생겨서 매우 친근감이 가는 불상으로 통일신라 이후에 조성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이 불상이 있는 곳은 사방이 트인 곳이어서 멀리로는 안동시내가 보인다. 이 불상에서 한 골짜기를 건너면 전탑지가 있다. 안동에 전해오는 향토지인 영가지永嘉誌에 의거하면 ‘월천전탑’이라고 불리는 탑이라고 짐작된다. 필자는 이 불상과 탑을 보고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고, 이후부터 옥산사가 한국에서 가장 큰 사찰이라고 호언장담을 하고 다닌다. 그 까닭은 사찰의 구조를 보면 금당, 즉 불상이 있는 대웅전과 탑은 서로 마주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찰의 배치구조를 산 능선에 그대로 적용하였기 때문이다. 즉 옥산사에 한쪽 능선은 대웅전이며 맞은편 능선은 탑을 배치하여 인근의 산들을 회랑으로 천등산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사찰마당으로 만들어 이곳에서 바라보고 있는 곳 모두가 사찰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영주의 가흥리 불상, 안동 이천동 석불상 등 안동지역에만 마애불과 석불상이 수십기 현존한다. 전탑의 구조, 부석사, 봉정사 등의 사찰구도 등 안동지역의 불교문화재를 잔잔하게 들여다보면 그 속에서는 바로 옥산사 마애불에서 보이는 안동사람만의 불교적 세계관과 자연에 대한 애정이 숨어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의 이치를 생활의 이치로 - 정자 불교의 세계관을 자연에 합일시키려는 옥산사의 사례는 조선조 안동지역에 흥성한 유교적 맥락에서도 여전히 보인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정자이다. 정자는 자연 속에 있고 싶어하는 풍류로운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잘 드러내는 건축물이다. 은거隱居와 치국治國을 양자에 두고 늘 고민했던 옛날 선비들은 정자라는 건축물에 그러한 고민의 결과를 담았다. 출세의 가도를 달린 한명회는 한강에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를 지어서 그의 위세를 드러냈고, 은거를 지향한 안동의 선비 김계행은 은거의 표시로 만휴정晩休亭을 지어 은둔하며 만년을 보냈다. 정자가 전통사회 선비들의 정신 한가운데 있음을 반증하는 것들이다. 자연에 있고 싶어했던 의지의 산물인 정자는 그래서 경치가 뛰어나고 자연의 흥취가 살아나는 곳에 위치한다. 그런데 안동지역의 정자를 보면 다른 지역의 정자들과 조금 다름을 알 수 있다. 위치부터가 다른데 집안이나 마을 한가운데 정자가 많이 있고, 생활공간과 떨어져 있는 경우 묵을 방을 만들어 숙식이 가능하도록 하였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왜 안동지역의 정자들은 마을 가운데나 집안에 위치하고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유학적 가치를 지향한 선비들의 정신을 대표하는 건축물인 정자를 일상생활 공간 가운데에 둠으로써 일상적 삶 속에서 유학적 가치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이었다고 판단한다. 독립운동가로 이름이 높은 석주 이상룡 선생이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팔았던 대저택 임청각臨淸閣 가운데 자리 잡은 정자가 바로 군자정君子亭이며, 눈 먼 어머니가 먼 길을 떠나는 아들 서성에게 정성스럽게 싸 주었다는 약밥의 전설을 간직한 소호헌蘇湖軒 역시 집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퇴계가 좋아한 청량산의 오산당과 고산정, 서애 류성룡의 정자인 원지정사와 옥연정, 학봉 김성일의 석문정 등 현재 안동지역에 현존하는 정자는 250여 개를 헤아린다. 다른 지역에 비해 몇 배는 많은 수치이다. 안동문화권이라고 할 수 있는 봉화, 영주 등지의 정자를 합치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수치가 중요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많은 정자는 결국 일상적 삶 속에서 자연성을 간직한 정자의 가치지향적 의지를 실천하고자 하는 증거물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마을 한가운데 단아하게 서 있는 정자마다 이름 없는 선비들의 문화적 정취와 삶의 실천적 자세가 배여 있다고 판단한다면 안동지역에 왜 유교문화가 꽃피었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왜 안동지역의 선비들이 가장 먼저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의병을 일으켰고, 일제강점기 가장 많은 독립군을 배출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문화적 세계관의 입구, 문화유산 그 문을 통해 들여다 본 안동은 지역의 자연과 그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합일시키고자 하는 의지의 강줄기가 강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종교를 떠나, 시대를 떠나, 잔잔하지만 깊이가 있었으며 격랑치지 않고 고요하게 흐르고 있었다. 때로 강변의 모래와 자갈의 색깔과 형태가 다르게 보이기도 했지만, 다양한 가치의 샛강들이 물줄기를 더해 물길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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