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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진으로 본 30여 년의 영조 일생
작성일
2016-06-02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7638

어진으로 본 30여 년의 영조 일생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아주 잘 생기고 근엄한 조선의 왕을 자주 접한다. 그리고 ‘실물의 왕은 어떤 모습일까’ 하고 궁금해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쉽게 접하는 만 원권의 주인공 세종대왕은 실제의 모습이 아니라 후대에 상상을 해서그린 모습이다. 그러면 조선의 왕 27명 중에서 원래의 모습 그대로 초상이 남아있는 인물은 몇 명일까? 정답은 태조, 영조, 철종, 고종, 순종 5명이다. 왕의 초상을 어진(御眞)이라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최고의 화원이 어진을 제작하고 이것을 선원전(璿源殿) 등 특별한 장소에 보관을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어진은 훼손되고 이 다섯 왕의 어진만 남아있다. 특히 영조의 경우 왕이 되기 전 왕세제로 있을 때의 초상화와 왕이 된 후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함께 남 아있어서 큰관심을 끌고 있다. 왕세제 시절의 젊은 영조와 왕이 된 후 30년이 지난 영조 초상화를 통해 그의 일생을 따라가본다. <연잉군 초상> ©국립고궁박물관

연잉군, 불안했던 왕세제 시절

먼저 젊은 영조(英祖:1694~1776, 재위 1724~1776)의 초상화를 보자. 영조가 연잉군 시절인 1714년(숙종 40), 즉 영조가 21세 때 그린 초상화로 화원 진재해(秦再奚)가 주관화사(主管畵師)였다.

1745년(영조 21) 경희궁 태령전(太寧殿)에 봉안되었다가 1778년(정조 2) 선원전으로 옮겨졌다. 왼편 위쪽에 ‘초봉연잉군(初封延仍君) 고호양성헌(古號養性軒)’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처음 연잉군으로 봉작되었는데 옛 호는 양성헌이다’는 뜻이다. 초상화에는 날카로운 눈빛이 예사롭지 않으며 마른 체형인 영조가 익선관을 쓰고 초록빛의 곤룡포를 입은 모습이 담겨져 있다.

영조는 1694년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숙종은 정비인 인경왕후나 계비인 인현왕후와 인원왕후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을 두지 못했지만, 후궁인 장희빈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경종이 되고, 또 영조가 왕이 되었으니 후궁 소생의 두 아들이 왕이 된 것이다.

영조가 왕이 되는 과정은 험난했다. 1688년 장희빈이 아들을 낳자 원자(후의 경종)로 책봉하고 3세 때인 1690년 왕세자로 삼아 후계 구도를 확정하였다. 경종은 장희빈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소론의 지원 속에 1720년 왕위에 올랐다. 경종은 두 명의 왕비를 두었지만 후사가 없었고, 결국 이복동생 영조가 1721년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동생으로서 후계자가 되었기 때문에 ‘왕세제’라 한다. 영조가 왕세제로 책봉된 데는 소론과 대립했던 노론의 지원이 컸다.

왕세제 시절 영조는 늘 조심스러운 처신을 했다.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조금이라도 잘못을 범하면 왕세제의 자리가 위태했기 때문이다. 특히 경종이 즉위한 후인 1721년과 1722년 신임옥사(辛壬獄事)가 일어나 노론 4대신이 희생되면서 영조에게 정치적으로 큰 위기가 왔다. 한순간만 방심하면 차기 후계자에서 ‘역모의 중심’으로 목숨까지 날아갈 수 있는 상황에 몰리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왕세제 시절 초상화에는 뭔가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운 것 같은 모습이 남아 있다. 이 초상화 는 비단에 채색이 되었으며 크기는 150.1×77.7cm이다. 보물 제 1491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경륜과 완숙미가 돋보이는 왕, 영조

경종의 급서로 1724년 영조가 왕으로 즉위하였다. 영조는 즉위 과정에서 당쟁의 참상을 뼈저리게 인식했고, 왕위에 오른 후 취임 일성으로 탕평(蕩平)을 강조했다. 국정의 기본방향을 모든 당파가 고르게 정치에 참여하는 탕평책으로 잡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에서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던 영조의 모습은 51세가 되던 1744년에 제작된 초상화에 잘 남아 있다. 초상화가 그려진 1744년(영조 20)이 영조가 51세가 되던 해임을 고려하면 영조가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국가 정책을 추진하던 시기이다.

<영조의 어진> ©국립고궁박물관

왕세제 시절의 초상화와 비교를 해도 30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체형의 변화가 거의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누구보다 영조가 채식을 즐기고 건강관리에 세심한 신경을 썼기 때문이었다. 영조는 건강을 바탕으로 조선의 왕 중 최장수(83세)했으며, 최장 기간 재위(52년)했다.

영조는 익선관과 곤룡포 차림이며, 전체적으로 은은한 채색과 더불어 곤룡포의 붉은 색과 금색이 더해져 화려함과 위엄이 잘 드러나 있다. 어진 제작은 궐내에서 간소하게 진행되었는데, 주관 화사에는 장경주, 동참화사로 김두량, 조창희였음이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초상화를 본 대신 송인명은 “장경주의 초상화에는 정신이 있다”고 표현하였다. 어진은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를 모신 사당인 육상궁의 냉천정에 보관했다. 현재 전해지는 어진은 바로 이 1744년 어진을 모본으로 하여, 1900년(광무4) 최고의 화원인 조석진, 채용신 등이 이모(移模:옮겨서 그림)한 것이다.

오른쪽 상단에 붙인 첨지에는 광무 4년에 이모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어진은 비단에 채색이 되었으며 크기는 110.5×61.8cm이다. 보물 제932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744년 무렵 영조는 1735년 42세에 얻은 늦둥이 아들 사도세자를 후계자로 키우면서 의욕적인 삶을 살았다. 1744년 1월에는 혜경궁 홍씨를 며느리로 간택하여 후계 구도를 탄탄히 했다. 한 해 전인 1743년 윤 4월에는 왕과 신하가 활쏘기 시합을 벌이는 대사례(大射禮)를 실시하면서 군신 간의 화합을 도모하였다. 이 초상화에는 비록 눈매는 날카롭지만 오래도록 국가를 경륜한 왕의 경험과 완숙미가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왕세제 시절의 초상화와 비교를 해도 30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체형의 변화가 거의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누구보다 영조가 채식을 즐기고 건강관리에 세심한 신경을 썼기 때문이었다. 영조는 건강을 바탕으로 조선의 왕 중 최장수(83세) 했으며, 최장 기간 재위(52년)했다. 영조는 스스로도 자신이 건강한 까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영조실록』 1750년(영조 26) 2월 10일의 기록은 이러한 면모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내가 일생토록 얇은 옷과 거친 음식을 먹기 때문에 자전(慈殿:왕의 어머니)께서는 늘 염려를 하셨고, 영빈(寧嬪:숙종의 후궁, 영조를 친아들처럼 길렀다)도 매양 경계하기를, ‘스스로 먹는 것이 너무 박하니 늙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이라’고 하였지만, 나는 지금도 병이 없으니 옷과 먹는 것이 후하지 않았던 보람이다. 모든 사람의 근력은 순전히 잘 입고 잘 먹는 데서 소모되는 것이다. 듣자니, 사대부 집에서는 초피(貂皮)의 이불과 이름도 모를 반찬이 많다고 한다. 사치가 어찌 이토록 심하게 되었는가?”

영조는 사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자신이 병이 없는 것은 일생 동안 거친 음식을 먹고 얇은 옷으로 생활했기 때문이라 하였다. 검소한 식단과 옷차림이 건강에 중요 요인임을 밝힌 것이다. 조선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이 47세 정도임을 감안하면 83세까지 산 영조의 장수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영조는 건강 진단도 철저히 했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영조는 재위 52년 동안 7,284회나 내의원(內醫院)에서 진찰을 받았음이 나타난다. 승정원의 업무 지침을 정리한 책인 『은대조례(銀臺條例)』의 ‘문안진후(問安診候)’ 항목에는 승지들이 닷새마다 한번씩 내의원 의원과 함께 입시하여 왕의 건강상태를 살펴보았음이 나타나는데, 영조의 경우에는 월평균 11.7회나 입진을 받을 정도로 건강관리에 만전을 기하였다.

철저한 건강관리 덕분이었을까? 초상화에 나타난 영조도 건강하고 의욕에 찬 모습이다. 재위 30년의 완숙기에 접어든 영조는 이후에도 탕평책을 비롯하여 균역법, 청계천 공사, 『속대전』과 『속오례의』, 『여지도서』의 편찬 등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의 주요 정책들을 진두지휘하였다. 어진에는 조선의 정치, 문화 중흥의 기반을 조성했던 왕 영조의 자신감까지 짙게 배어 있다.

글‧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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