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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옛길 위, 말을 걸어오는 이정표
작성일
2016-04-0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355

길목에 새기다. 옛길 위, 말을 걸어오는 이정표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 ‘엽전 열 닷 냥’의 노랫말은 우리 옛길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대장군 잘 있거라 / 다시보마 고향산천 / 과거보러 한양천리 / 떠나가는 나그네에 내 낭군 알성급제 / 천번만번 빌고 빌며 / 청노새 안장 위에 실어주던 / 아- 엽전 열 닷 냥 청운의 꿈을 가득 안고 장도에 오르는 선비의 아내는 낭군의 뒤를 따른다. 어젯밤 살뜰하게 챙겼던 괴나리봇짐에 혹시 빠진 것은 없을까 걱정이 앞선다. 좁쌀 책(袖珍本), 작은 벼루(行硯), 가는 붓, 먹물 통, 나침반, 작은 지도책, 표주박, 호패, 옷가지 몇 벌, 그리고 미숫가루와 과거일 아침에 먹을 우황청심환까지 다 넣었다. 마지막으로 노새의 안장 위에 알뜰히 모은 엽전 열 닷 냥을 실어주었다. 마을 어귀에는 천하대장군이 우뚝 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장승의 하단부에는 ‘한양천리(漢陽千里)’라는 이정표(里程標)가 새겨져 있었을 지도 모른다.

문경 돌고개마을 성황당 ©서헌강

자연의 것에서 빌려온 옛길 이정표

옛길에도 이정표가 있었다. 길손들의 안전과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곳곳에 알림판 역할을 하는 표지(標識)들이 그것이다. 옛길의 표지로서 대표적인 것을 꼽아보면 장승, 돌무더기(積石), 비석, 정자나무 등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등을 살펴보면, 도로의 관리와 표지에 대해 조정의 정책이 자주 시행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먼저 태종 14년 10월조에는 “…고제(古制)에 의하여 척(尺)으로써 10리를 재어서 소후(小堠)를 설치하고, 30리에 대후(大堠)를 설치하여 1식(一息)으로 삼으소서”라는 기록이 있다. 또 태종 15년 12월에는 “…매 10리마다 소표(小標)를 두고, 30리마다 대표(大標)를 두되, 혹은 돌로도 쌓고 흙으로도 쌓아 그 편의에 따라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는 기록도 있다. 세종 23년 8월에는 “…새로 만든 보수척(步數尺)으로 이를 측량하여 매 30리마다 하나의 푯말을 세우되, 혹은 토석(土石)으로 모아 놓던가, 혹은 수목을 심어서 표지하게 하소서”라는 기록도 보인다.

조선 도로거리표의 노선도 ©옛길박물관

오늘날에도 일정한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고갯마루나 옛길 주변에서 돌무더기, 장승, 정자나무와 같은 도로 표지를 발견할 수 있다. 영남대로 중 가장 험난한 구간 중 하나였던 문경 토끼 비리의 돌고개 성황당은 당집과 함께 동신목, 돌무더기가 자리 잡고 있는 복합적인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1797년에 작성된 이곳 성황당의 상량문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도로거리표의 노선도 ©옛길박물관

이 상량문에서 여행자들을 위한 이정표로서 10리마다 설치한 ‘장정(長亭)’이 주목된다. 그 절반인 5리마다 단정(短亭) 혹은 단후(短堠)를 설치하였다. 지금도 여러 지역의 지명에 남아있는 ‘오리목’, ‘오리터’ 등은 옛길의 표지가 있었던 곳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소후(小堠)와 대후(大堠), 소표(小標)와 대표(大標)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옛길의 이정표와 관련해서는 무엇보다도 장승을 빼놓을 수 없다. 장승은 흔히 민속신앙의 대상으로 마을의 수호신 기능을 하거나, 풍수지리에 있어서 비보(裨補) 역할을 담당해 왔다. 이와 더불어 장승은 이정표로서의 기능이 있었다. 장승에 ‘읍십리(邑十里)’, ‘한양백리(漢陽百里)’ 등을 기록하여 여행길의 노정(路程)을 가늠케 했다.

조선의 내비게이션 ‘도리표’

오늘날 우리의 여행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행 가방에는 지도가 딸린 가이드북이 필수고, 승용차 안에는 내비게이션이 장착되었다. 좀 더 빠르고 편안한 길을 찾기 위해 인터넷의 길찾기 사이트를 검색하고 스마트폰의 앱을 실행한다. 옛사람들의 여행에도 길을 안내해 주는 책이 있었다. 어떠한 경로로 이동하고 그곳까지의 거리는 얼마인가를 알려주는 이 책을 흔히 『도리표(道里表)』라 하였다. 조선 후기 신경준에 의해 정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조는 『홍재전서』에서 도리총고(道里摠攷)의 서문을 여는 말로서 ‘하늘에 길이 있는데 경위(經緯)가 그것이고, 땅에도 길이 있는데 강리(疆理)가 그것이며, 사람에게 있는 길은 인의(仁義)가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어 ‘우리나라는 사방 6천 리에 산과 바다가 있는데 수레를 타고 심양으로 갈 수 있고, 뱃길로 중국이나 왜국으로 갈 수 있지만, 솔개처럼 물길도 잘 모르고 말처럼 육로도 익숙하지 않아 거울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여러 책들을 참고하여 각 군의 경계를 표시하고, 연해의 이정표를 만들며 봉수와 역참의 위치를 기록한다고 하였다.

도리표는 ‘정리표(程里表)’, ‘기리표(記里表)’, ‘거리표(距里表)’, ‘노정기(路程記)’ 등으로도 불린다. 주로 ‘거경정리표(距京程里表)’라 하여 한양에 이르는 각각의 노선을 체계화한 것과 ‘도군상거표(道郡相距表)’라 하여 각 도별로 읍치(邑治) 간의 거리를 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을 합본하여 만들어 놓았다. 마치 오늘날의 내비게이션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산줄기를 체계화한 산경표(山徑表)가 자연지리적 인식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라면, 도리표는 국토에 대한 인문지리적 인식이 적용된 사례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글‧안태현(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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