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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호(號), 그 안에 깃든 정신을 부르다!
작성일
2016-03-03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5179

의지가 깃들다. 호(號), 그 안에 깃든 정신을 부르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서 알 수 있듯, 이름은 하나의 존재를 응축하고 있는 간결한 은유이다. 그렇기에 옛 선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관명 외에도 자신의 철학과 삶의 가치관을 상징할 수 있는 ‘호(號)’를 지어 불렀다. 호의 명명(命名) 행위는 마음속의 안일과 나태를 떨쳐내고, 다시금 수신(修身)하게 만드는 깐깐한 기준이 됐다.

 

신성한 이름, 함부로 부를 수 없어

“세상은 권력과 이익을 좇아 도도히 마음과 힘을 쏟아붓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권력과 이익을 따르지 않고 바다 밖의 초췌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권력과 이익을 따르듯 하는가?”

국보 제180호이자 조선후기 문인화의 최고 걸작이라 불리는 <세한도(歲寒圖)> 발문 내용의 일부이다.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 추사가 제주도 대정(大靜)에서 위리안치(圍籬安置)의 외로운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제자 이상적(李尙迪)은 중국 연경에서 구한 귀중한 책들을 보내 주는 등 따뜻한 정을 아낌없이 베풀었고, 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추사는 <세한도>를 그려 이상적에게 주었다. 새하얀 설원 위에 자리 잡은 토담집 한 채, 그 집을 둘러싼 늙은 소나무와 잣나무 네 그루는 권력보다 의리를 택한 이상적의 변함없는 신의를 기리고 있다.

<세한도>의 오른편 상단에는 그림의 제목과 함께 ‘우선시상완당(藕船是賞阮堂) : 우선(藕船) 보시게나 완당’이라는 글과 관지(款識)가 적혀 있다. 여기에 쓰인 ‘우선(藕船)’은 이상적의 호(號)이다. 그리고 ‘완당(阮堂)’은 ‘추사(秋史)’ 다음으로 널리 쓰인 김정희의 또 다른 호로서, 연경에서 만나 스승으로 모셨던 ‘완원(阮元)’을 흠모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스스로 지어 쓴 것이다. 따라서 <세한도>에는 추운 계절이 되어서야 더욱 푸르른 빛을 발하였던 ‘우선’과 ‘완당’, 두 사람의 아름답고 따뜻한 인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과 ‘완당’, 이는 우리의 선인들이 자신의 본래 이름을 대신하여 쓴 호(號)의 일종이다. 일부 문화예술인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하나의 이름만으로 일생을 살아가는 오늘날과 달리, 우리의 선인들은 초명(初名) 또는 아명(兒名), 자(字)와 호(號), 시호(諡號)에 이르기까지 생애의 모든 단계에서 일종의 통과의례와 관련된 이름들을 다양하게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풍속은 2종 이상의 이름을 가지는 복명속(復名俗) 혹은 이름을 신성한 것으로 여겨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경명 의식(敬名意識)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슷한 듯 다른 ‘자(字)와 호(號)’

선인들이 일생을 통하여 가지고 있었던 다양한 종류의 이름들 가운데 자(字)와 호(號)는 특히 그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하며 살아가도록 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다시 한 번 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字)와 호(號)는 어떠한 차이가 있었을까?

자(字)는 일종의 성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관례(冠禮)를 치르거나 성혼(成婚)을 한 뒤 본명을 대체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자(字)를 지어 명(名)의 뜻을 드러내는 것은 사우(師友)가 할 일이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자(字)는 스승이나 벗들이 짓되, 주로 친구들 사이에 서로 지어 부르는 이름이었으며, 본 이름의 뜻을 부연 설명 또는 보완하거나 같은 뜻을 가진 글자를 씀으로써 본 이름과 짝이 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호(號)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선택에 따라 새롭게 주어진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하며 살아가다 보면 자신이 되고자 하는 무의식의 아상(我相)을 구현할 수 있으리라 본다.

 

호(號)는 부모나 스승·친구 등 남이 지어 부르기도 했지만 자신이 짓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 한 사람이 여러 가지 호(號)를 쓰기도 했다는 점에서 자(字)와 구별된다. 김정희만 하더라도 ‘추사’를 포함하여 무려 500개가 넘는 호(號)를 가지고 있었다 하니, 변화 무쌍한 서체만큼 호(號) 또한 다양하여 그때그때 처한 상황이나 정서, 취향 등을 드러내는 기능을 담당하였다고 할 것이다.

다양한 얼굴을 가진 호(號)

중국의 경우, 호(號)는 당대(唐代)부터 시작하여 송대(宋代)에 이르러 보편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국과 비슷한 시기인 삼국시대부터 호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신라의 승려 원효(元曉)의 호(號)는 ‘소성거사(小性居士)’이고, 낭산(狼山) 아래 살던 음악가의 호(號)는 ‘백결선생(百結先生)’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그 증거이다.

호(號)의 명명에는 일정한 기준이 있었다. 일차적으로는 ‘재(齋), 헌(軒), 암(巖), 계(溪), 곡(谷), 담(潭), 당(堂)’ 등 생활하고 있거나 인연이 있는 처소를 기준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퇴계(退溪)’나 ‘율곡(栗谷)’, ‘화담(花潭)’ 등의 호를 비롯하여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문인인 ‘사임당(師任堂)’이나 ‘난설헌(蘭雪軒)’ 등의 호가 그러한 범주에 속한다.

흔히 당호(堂號)라고도 불리는 이러한 호 외에도 시·문·서·화 등의 작가들이 자신의 품격이나 취향을 드러내는 데 쓰이는 아호(雅號)도 적지 않았다. 우리의 근대문학기만 하더라도 ‘육당(六堂)’과 ‘춘원(春園)’을 비롯하여 ‘소월(素月)’, ‘목월(木月)’, ‘영랑(永郞)’, ‘만해(萬海)’, ‘미당(未堂)’, ‘청마(靑馬)’ 등의 문학인들이 앞 다투어 호(號)를 사용하였으며, 민족적 자각과 자주 의식을 바탕으로 ‘한힌샘’, ‘외솔’, ‘가람’ 등 순수한 우리말을 호(號)로 사용하는 학자들도 상당하다.

본 이름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호(號)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선택에 따라 새롭게 주어진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하며 살아가다 보면 삶 속에서 나아가고자 했던 무의식의 아상(我相)을 구현 할 수 있으리라 본다. 오늘날 그 흔적조차 희미한 호의 문화, 둘 이상의 이름을 갖는 문화를 되살리려는 노력을 해 보는 것은 어떨까.

 

글‧강희숙(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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