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국가유산사랑

제목
서민들의 급전 마련 창구 전당포典當鋪
작성일
2013-05-13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5778



일제시대 토지수탈의 수단이 됐던 질옥質屋

전당포典當鋪. 간단히 풀어 보자면 법적으로 물건을 저당잡고 돈을 빌려주는 가게 쯤이다. 더 유식하게 사전적 의미로 설명하자면 ‘전당’이란 ‘채권의 담보로 채무자가 유가물을 채권자에게 유치시키는 것’이다. 전당포의 유래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다 가깝게는 한국근현대사, 특히 일제 수탈의 상처와 맥이 닿아 있다. 일제가 식민지 수탈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이른바 ‘조선토지조사사업’이 전당업 발달의 기반이 됐기 때문이다. 1910년부터 1932년까지 이뤄진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일제는 토지의 자유로운 처분과 부동산의 동산화를 제도적으로 정립했다. 물론 목적은 토지 수탈이었고 여기에 활용된 방법이 바로 전당업과 같은 의미의 ‘질옥質屋’이라는 것이었다. 토지나 가옥을 담보로 고리의 돈을 빌려준 뒤 이를 갚지 못하면 저당잡힌 토지를 취득해 조선에서 부를 축적한 것이다. 전당 기간이 3~4개월에 불과한데다 이자가 높게는 월 1할이었으니 요즘 웬만한 고리의 사채와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신분도, 재산도 따지지 않고 돈을 빌려주던 그곳

해방 후 현재에 이르는 전당업의 법적 근거는 1961년에 도입한 ‘전당포 영업법’이다. 법적 규정에서도 나타나듯 전당포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전당물로 변제에 충당한다'는 점이다.
1960~1970년대에 전당포가 전성기를 맞았던 것은 어려웠던 삶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돈을 빌리기 위해 맡길 이렇다 할 담보물도 없던 셋방살이 서민들이 그나마‘모르는 사람’에게서 돈을 융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 패물이든 뭐든 돈이 되는 물건은 모두 전당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직접 패물을 팔아 돈을 마련할수도 있겠지만 전당포는 최소한 일정 기간까지 물건의 소유권을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잠시 유치해 놓고 돈을 융통할 수 있으니 절박한 이들에게는 그나마 작은 위안이었다. 더욱이 은행처럼 돈을 빌리는 사람의 신분을 일일이 따지지도 않았으니 고마운 일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렇다고 전당포가 구세주는 아니었다. 결국은 사채 수준의 높은 이자 때문에 맡겨놓은 물건은 다시 찾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찾는 애증의 대상이었을까.
전당포에 대한 인식은 서구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시드니루메 감독의 1965년 작 영화‘The Pawnbroker(전당포)’에서도 전당포 주인은 세상과 단절해 돈과 자신밖에 모르는 유대인으로 그리고 있으니 말이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생활 속에 자리매김하다

비록 우리가 기억 속에서, 그리고 영화에서 본 전당포는 사라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아예 전당포가 자취를 감춰버리진 않을 것 같다. 세상의 변화에 맞춰 전당포 역시 과거와는 또 다른 현대적인 모습으로 변신을 시도하며 여전히 성업중이기 때문이다. 궁금하다면 인터넷 포털에 접속해 ‘전당포’라는 단어를 한번 입력해 볼 것.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전당포가 다양한 모습으로 여전히 일상 속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맡기는 물건만 바뀌었을 뿐 전당포는 그대로 현대인의 삶 속에서 꿋꿋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노트북컴퓨터가 전당포에서 꽤 인기 있는 품목이 될줄 예전에는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심지어 최근에는 명품 바람을 타고 이 같은 물건만 취급하는‘명품 전당포’가 청담동 등 강남 요지에서 성업중이라고 한다.
이 같은 변화를 바라보면서 필자는 생각해 본다. 앞으로 20~30년 후 전당포 창고에는 어떤 물건들이 보관돼 있을까. 상상하지 말자. 미래는 우리의 상상보다 때로는 더 빨리 변화할 수 있으니까. 다만 그때에도 전당포는 지금과 또 다른 모습으로 여전히 우리 삶의 한켠에서 조용히 자리매김하고 있을 것은 확실해 보인다.

글. 정두환 (서울경제신문 건설부동산부 부장) 사진. 이미지투데이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