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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우리 민족의 삶과 정서에 담긴 은근과 여유
작성일
2013-04-18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4856



농업사회와 자연주기

오늘날 제조업, 서비스업, IT산업 등 많은 산업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고 직업도 10,000가지가 넘을 정도로 다양하다. 그러나 산업화가 일어나기 전에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즉‘농사가 세상의 커다란 근본이다’라고 했다.
농사는 제조업과 달리 기본적으로 자연적 요소에 의해 좌우되기 쉽다. 농부가제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제때 비가 오지 않는다면 농사를 망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여름에 폭우가 쏟아지고 장마가 오래가면 농작물은 자랄 수가 없다.
농사는 자연적 요소 못지않게 사람의 노력이 중요하다. 다른 조건이다 좋아도 사람이 때를 놓치게 되면 농사가 잘 될 수가 없다. 이와 관련해서 절기節氣, 계절季節, 시령時令, 월령月令의 말을 살펴볼 만하다. 절기는 자연의 날씨가 일정한 시간이 되면 바뀌는 매듭이 있다는 것이다. 계절은 그러한 절기의 매듭을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로 구분하는 것이다. 시령과 월령의 령令은 글자 그대로 명령이라는 뜻이다. 자연이 사람에게 시절마다 달마다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명령하는 것이다.

시령과 월령의 핵심은 생장수장生長收藏, 즉 태어나고 자라고 거두어서 보관하는 것이다. 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을 잘 가꿔서 가을에 수확하고 겨울에 창고에 보관한다는 말이다. 이를 열두 달의 일로 나눈것이 조선 헌종 때 정학유丁學游가 지은『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이다. 예컨대 3월령에서는 절기와 논농사 및 밭농사의 씨뿌리기, 과일나무 접붙이기, 장 담그기 등을 노래하고 있다. 4월령에서는 절기, 이른 모내기, 간작間作·천렵川獵등을 노래하고 있다. 사람이 욕심을 낸다고 더 많은 것을 거둘 수가 없었다. 사람이 철저하게 자연의 흐름에 맞추어살아야 자연이 주는 혜택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고려말기에 요동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했다. 그때 이성계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웠는데, 그 중 두 가지가 요동정벌이 월령과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즉, 여름에 군사를 일으킬 수 없고夏月發兵二不可, 출병 당시 덥고 비가 내리는 철이라 활을 붙인 풀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모두 병에 걸릴 것時方署雨弩弓解膠大軍疾疫四不可이라고 하여, 때에 맞지 않게 일을 벌이게 되면 개인이나 국가가 불행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월령은 고려와 조선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작용을 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산업화 이전에 자연의 주기와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그것에 맞춰서 살아왔다. 그 속에서 우리 민족은 성급하게 욕망을 앞세우지 않고 자연과 호흡을 맞추면서 느긋하게 살았다. 이러한 특징은 우리 민족의 삶의 다른 영역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조선후기의 풍속화와 민화를 보면 인물이 틀에 박히지 않고 개성적으로 등장한다. 가옥구조도 자연을 닮은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람의 욕망을 우선시하여 재료와 공간을 인위적으로 구획하지 않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창덕궁은 왕의 공간이지만 언덕과 구릉 그리고 지형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편안하고 느긋한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속도 경쟁의 시대

우리는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국체國體를 바꾸면서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때 근대화가 서구에 비해 늦었기 때문에 우리는 처음부터 서구를 따라잡기 위한 속도 경쟁에 들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령 전쟁을 하려면 남들보다 더 좋은 무기를 조금이라도 빨리 만들어야 했다. 또 수출해서 돈을 벌려고 해도 상품을 경쟁 국가보다 더 빨리 만들어야 더 많은 수익을 얻을수있다. 이처럼 우리는 근대화에 늦었기 때문에 빨리 움직여야 했고 근대에 들어서도 생존과 발전을 위해서 더 빨리 움직여야 했다.

빠름과 느림은 각각 상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회가 전반적으로 빠른 속도를 우선시하게 되자 느림은 빠름에 상대적인 가치조차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상황에 따라 느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느리면 상황을 망치게 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빠른 것은 좋은 것이고 느린 것은 나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는 이해할 만한 측면도 있다. 자연자원과 에너지가 부족한 상황에서 우리는 원재료를 수입해서 그것을 가공해서 수출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빠름은 느림에 비해 상대적인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것으로 여겨질 수가 있다.



여유로운 삶

제철에 나는 음식을 먹으면 건강에 좋다. 요즘도 제철 음식이란 말이 쓰이지만 과거만큼 그렇게 무겁게 들리지 않는다. 대표적인 여름 과일인 수박을 겨울에 먹을 수 있다. 비닐하우스를 통해 겨울에도 부족한 일조량을 보충할수있기 때문이다. 제철 음식이 아니라 사철 음식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자연의 조건이 농작물을 자라게 하느냐 보다도 사람의 욕망이 원하느냐가 더 중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밑바탕에는 근대 사회를 낳은 산업화, 도시화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

서둘러 먹은 밥이 체하듯이 빠른 것이 결코 절대선이 아니다. 느리게 할것은느리게,빨리할것은빠르게하는것이정석이다. 요즘들어서 더욱더 느림의 주문이 많아지고 있다. 그만큼 우리가 빠르고 성급하게 서두는 것에 대해 피곤해하고 버거워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민족이 자연의 주기와 흐름에 맞춰서 살아온 은근과 끈기, 여유와 느긋함의 미덕을 되돌아보게 된 것이다.

달리는 말에서 산을 보는 것을 주마간산走馬看山이라고 한다. 오늘날 바꾸면 말을 자동차로 바꿔서 주차간산走車看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의 상황에 있을 때 자동차에서 내려서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주차간산을 하면 그곳을 다녀왔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세세하게 속속들이 안다고는할수있다. 이제는우리는 빠른 추격자에서 선도자First mover로 자신의 위상을 바꿔 나가야 할 때이다. 이때는 주차간산이 아니라 마부작침磨斧作針의 자세가 더 필요하다.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것은 이전에 놓치거나 눈여겨보지 못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러한 자세는 결과와 욕망의 속도에서 조급하게 구는 것보다는 자연과 세계의 전체적 흐름과 틀에서 느긋하게 움직이는 생활에서 생겨난다. 이것은 작은 기준에서 보면 느려 보이지만 큰 틀에서 보면 느리지만 빠른 걸음일 수 있다.

글. 신정근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 교수)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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