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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측우기, 밥그릇, 상평통보에 담긴 조선의 도량형
작성일
2016-11-04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6799

측우기, 밥그릇, 상평통보에 담긴 조선의 도량형 조선왕조는 고려의 도량형을 이어받아 사용하다가 세종에 이르러 예악(禮樂)을 정비하면서 도량형을 새롭게 제정하였다 이. 때 박연이 예악 정비를 맡아 수행하면서 기본 음률을 맞추기 위해 만든 황종관(黃鍾管)의 길이를 황종척 1척(黃鍾尺)으로 삼았다. 황종관 1척은 당시 황해도 해주에서 구해온 거서(秬黍, 검고 커다란 기장) 낟알 100알의 길이를 기준으로 삼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황종척 1척은 34.2㎝ 정도이다. 본래 기장의 낟알 크기는 1.4~1.6mm 정도로 매우 작은데, 당시 해주에서 나온 기장은 일반 기장보다 2배 정도 큰 특수한 품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종척을 제정한 연후에 이를 기준으로주 척(周尺) 등을 제작하여 길이<도(度)>의 기준으로 삼았다. 또한, 황종관에 기장 낟알 1,200개를 담아서 이를 부피<양(量)>의 최소 단위인 1작(勺)의 크기로 정했으며, 황종관에 물을 채워 그 무게를 88분(分)으로 정하여 무게<형(衡)>의 기준도 만들었다. 이렇게 정비된 도량형은 15세기 말에 편찬된 『경국대전』 공전(工典) 도량형 항목에 잘 정리되어 있다.

측우기로 보는 도량형의 길이

세종대에 도량형이 정비되면서 황종척의 길이는 34.2㎝, 주척의 길이는 20.7㎝로 정해졌다. 이에 따라 베와 비단의 길이를 잴 때 사용하는 포백척(46.5㎝), 가옥이나 성벽 등을 만들 때 사용하는 영조척(31㎝) 등도 제정되었다. 나아가 전답(田畓)의 길이와 넓이를 계산할 때 활용한 양전척도 정해졌다. 양전척은 토지의 크기를 재는 데 활용하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장 길었는데, 양전척 1척의 길이는 주척으로 4.775척과 같았다. 이에 따르면 양전척 1척은 98.8㎝ 정도였다.

주척이 활용된 대표적인 문화재는 세종대에 제작된 측우기라고 할 수 있다. 구리로 만든 원통형의 측우기는 길이가 1척 5촌이고 지름이 7촌이다. 비의 양을 재기 위해 제작한 측우기를 팔도 각 군현에 설치해 조정에서도 전국의 강우량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조는 1770년에 측우기의 모양과 제작 방식을 전국 군현에 내려 보내 각지에서 새롭게 자체 제작하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정조는 1780년에 측우기로 강우량을 계측하는 세칙을 정했는데, 그에 따르면 하루에 측우기 강우량을 3회에 걸쳐 측량했다고 한다. 측정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정오부터 인정(人定 : 밤 10시)까지, 인정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로 나누어졌다. 이는 온종일 비가 내릴 경우이고, 몇 시간 정도 내린 비의 양을 보고할 때에는 언제부터 언제까지라고 시간을 한정했다. 또한, 하루 이상 지속된 강우의 경우에도 비가 내리기 시작한 시각과 그친 시각을 특정하여 기록했다.

측우기로 보는 도량형의 길이

조선 성인 남자 하루 식사량으로 본 부피

조선의 도량형에서 부피의 가장 작은 단위는 작(勺)이고, 10작을 1합(合, 홉), 10홉을 1승(升, 되), 10되를 1두(斗, 말)의 순서로 단위를 사용하였다. 그 다음이 석(石)인데, 15말이 들어가는 평석(平石)과 20말이 들어가는 전석(全石)으로 나눠졌다. 각 용기의 크기는 영조척 단위로 길이, 높이, 너비가 규정되어 있었는데, 이에 따라 영조척의 길이 31㎝로 계산하면 각 단위의 용량이 계산된다. 계산해보면 1홉이 59.64㎤, 1되가 596.4㎤, 1말이 5,964㎤이다.

부피를 재는 단위인 홉이나 되, 말 등은 실제 용기로도 만들어져 세금을 거두거나 시장에서 상품을 거래할때 활용되었다. 대개 나무로 만들어 졌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을 보면 사용자의 이름, 용기의 크기 등의 정보가 음각으로 새겨진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되나 말로 곡물 등의 양을 잴 때에는 용기에 들어가는 분량을 일정하게 만들기 위해 둥근 막대 모양의 도구를 사용하였다. 이를 평미레, 또는 평목(平木), 개자(槪子)라 하였다.

무엇보다 실생활에서 많이 사용하였던 부피와 관련된 것은 주발(周鉢), 즉 밥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성인 남자가 하루에 먹는 식사량은 쌀로 따졌을 때 2되 약 1,200㎤였다. 1541년에 편찬된 『충주구황절요』라는 책에 실린 내용 가운데 “건장한 남자 한 사람이 하루에 먹는 쌀이 2되이다”라는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대식가로 알려져 있는데 주발도 지금의 밥공기보다 훨씬 크다. 하지만 흉년이 들게 되면 식사량을 줄이지 않을 수 없었고, 국가에서 굶주린 사람에게 내려주는 분급량을 살펴보면 하루에 1되에 불과하였다. 아주 극심한 기근이 닥치면 하루에 3~4홉으로 견뎌야 할 때도 있었다.

조선 성인 남자 하루 식사량으로 본 부피

상평통보 1푼으로 알아보는 무게

세종 당시에 정비한 무게<형(衡)> 단위를 보면 1리(釐)가 가장 작은 것이었다. 그다음으로 10리를 1분(分), 10분을 1전(錢), 10전을 1량(兩), 16량을 1근(斤)으로 삼았다. 당시의 무게 단위를 현재 단위로 환산하면 1분은 0.4012g, 1전은 4.012g, 1량은 40.12g, 1근은 641.946g 정도에 해당한다.

무게 단위와 관련된 중요한 문화재로는 동전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초기에도 동전을 주조하고 유통시키려 했지만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였다. 1678년(숙종 4)에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서울과 서북(현재 평양북도) 일대에 유통시킨 이후 본격적으로 동전이 화폐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물론 동전 유통 전후 시기에 면포, 미곡이 계속해서 중요한 물품화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상평통보에 관한 내용을 영조 대에 편찬된 『속대전』에서 찾아보면 “무게가 2전(錢) 5분(分)이고, 백문(百文)을 1양(兩)으로 하고 10양(兩)을 1관(貫)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상평통보 1개, 즉 1푼은 무게로 보았을 때 2전 5분, 10.03g이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사용하는 100원짜리 동전의 무게가 5.42g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조선의 상평통보는 2배 정도의 무게였다.

상평통보가 널리 유통되면서 본래 쌀로 거둬들였던 전세(田稅), 대동세(大同稅) 등을 동전으로 거두기도 하였다. 이를 위해 쌀과 면포, 동전 사이의 교환비율을 국가에서 지정했다. 교환비율은 전국적으로 통일시킨 것이 아니라 지역에 따라 다르게 했다. 이는 전세를 거둘 때 서울과 떨어진 거리에 따라 부가적으로 들어가는 수송 비용 등에서 차이가 나는 점 등을 감안한 것이었다. 대체로 쌀 1석이 동전 7냥, 면포 3.5필로 교환되었다.

상평통보 1푼으로 알아보는 무게

 

글‧염정섭(한림대 사학과 교수) 일러스트‧이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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