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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여한십가문초를 통해 본 십대 명문장가와 그들의 글쓰기
작성일
2007-09-07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333

 hspace=3 src=창강 김택영은 조선말 철종 시기로부터 구한말까지 활동한 학자이다. 그는 한문학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대가로서 시詩에서의 황현黃玹, 문文에서의 이건창과 함께 한말삼재韓末三才로 이름을 드높였다. 또한 그는 고문가古文家로서 우리나라 고문의 전통과 맥락을 독자적으로 체계화시켰는데, 그 저서가 <여한구가문초>이다.

<여하구가문초>에는 고려시대부터 당대에 이르는 아홉 사람의 명문장가, 즉 김부식, 이제현, 장유, 이식, 김창협, 박지원, 홍석주, 김매순, 이건창 등의 명문 95편이 실려 있다. 그런데 그의 제자였던 왕성순이 여기에 김택영의 문장을 뽑아 넣고 제목을 <여한십가문초>로 바꾸어, 전체 11권 1책으로 구성하였다. 문장가의 지정과 수집은 개인의 기준으로 이루어졌으나, 유명한 문장가들의 명문을 들어 잘된 문장의 전형을 제시하려 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문장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여한십가문초를 통해 우리 고문학의 흐름과 명문장가들의 글쓰기 방법을 알아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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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학이란?

공자의 집 벽에서 발견된 경서, 또는 한나라 무제武帝 때 헌왕獻王이 수집한 고문헌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학문으로 금문학今文學에 대립되는 말이다. 한나라 초기의 경서는  hspace=5 src=당시 유행하던 예서로 씌어져 있었다. 이와는 달리 무제 때 노나라의 공왕恭王이 공자의 옛집 벽 속에서 상서尙書, 예기禮記, 논어論語, 효경孝經을 얻었고, 경제景帝의 아들인 헌왕 유덕도 민간에서 주관周官, 상서尙書, 예기禮記, 맹자孟子, 노자老子를 얻었는데, 이것들은 주대周代의 주문이라는 옛자체로 씌어져 있었다. 이에 전자 계통의 경학經學을 금문학이라 하고, 후자 쪽을 고문학이라 한다. 금문학과 고문학 사이에는 원래 씌어졌던 글씨체가 다를 뿐 아니라 기재되어 있는 제도나 학설도 달라서 고문학은 이미 관학이 되어 있던 금문학파의 반대를 받아, 전한前漢 말에 이르러 유흠劉歆의 주장으로 비로소 국가의 공인을 얻어 세력을 갖게 되었다. 양자의 세력 다툼은 후한後漢까지 계속되었으나, 정현鄭玄이 양쪽 학설을 취사하여 이를 융합시켰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계속 고문학이 지속적으로 우위를 점하였다. 청조淸朝의 훈고학도 정현 등의 훈고를 중시한 고문학 계통에 속하지만, 말기에는 금문학이 성하였다.


여한십가문초를 
통해 본 우리나라 고문학의 흐름

옛날에는 문장의 양식이 없었는데, 청나라의 외교문서에서 시작되어 지어내고 토론하고 꾸미고 매만지는 수고로 문장의 아름다움을 이루게 되었다. 공자의 제자 중 여섯 가지 기예(예,악,사,어,서,수)에 통달한 사람은 70여 명인데, 이들 가운데서도 문학으로는 자유子游와 자하子夏를 꼽는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문장을 하나의 과목으로 삼았다. 이후 문장을 짓는 일이 더욱 넓어졌고, 그 기술과 방법은 더 정교해졌다. 스스로 탁월한 기질을 지녀 온 힘을 쏟아 공부하고, 여섯 가지 경전(시경, 서경, 예기, 악기, 역경, 춘추)을  hspace=3 src=근본으로 삼아 말하며, 문장의 법도와 조화를 두루 갖춘 다음에야 ‘글쓰는 사람’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섯 가지 경전과 문장을 다루는 기술은 풍부하지만 매만져 다듬는 일에 일정한 법도가 없어지면, 규율과 대오를 잃어버린 군대가 전투에서 이리저리 흩어지고 무너져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것처럼 되고 만다. 또 문장의 법도는 제대로 섰지만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말이 모두 평범하여 또렷한 빛을 발하지 못한다. 글을 짓는 어려움은 비단옷을 입힌 나무 인형이 형체는 제대로 갖추었으나 몸을 움직일 수도, 구부리거나 펼 수도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세상에는 붓을 잡고 생활하는 사람은 많아도, 후대까지 전해질만한 문장을 남긴 사람은 적다. 우리는 신라시대 때 이미 글을 익혀서 문장을 지었다.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문장이 더욱 빛을 발해, 문장가들이 계속 배출되었다. 이들 중에서 문장의 수준이 높은 사람은 옛 명문장가의 경지에 들어섰고, 그보다 수준이 낮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문장의 법도에 가까웠다. 예전에는 문장의 가치나 등급을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우열을 다툴 뿐 정해진 의견은 없었다. 이에 문장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 병통을 안타까워 했다.


명문장가들이 남긴 올바른 글쓰기법

여한십가문초를 통해 만나게 된 명문장가들은 글쓰기에 관한 나름의 습작법과 자세들을 문장을 통해 정리 기록하고 있다. 장유는 <계곡만필>에서 문장을 지을때 허술하게 넘어가지 않은 옛사람들의 태도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고 했으며, 논리와 자신의 주장이 담긴 글이어야 한다고 했다. 농암집을 쓴 김창협은 송나라 명문장가 구양수의 <길주학기>를 통해 짧은 글일지라도 고치고 또 고쳐서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박지원은 <연암집>에서 옛것과 새것의 모호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hspace=5 src=“이른바 옛것을 본받는다고 하는 사람의 큰 병폐는 옛것의 흔적에만 얽매이는 것이다. 또 새롭게 창조한다고 하는 사람의 큰 병폐는 지켜야할 내용과 형식을 해치는 것이다.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화에 통달할 수 있고, 새롭게 창조하면서도 내용과 형식을 잘 맞추어 글을 지을 수만 있다면, 그러한 글이야말로 바로 요즘의 글이자 옛글이기도 하다”
이건창은 <명미당집>의 ‘답우인논작문서答友人論作文書’를 통해 자신의 경험으로 얻은 작문의 비결을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담담히, 그러나 꽤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릇 글을 지을 때 먼저 구상을 해야 하며, 뜻을 구상하는 데는 앞과 뒤가 있어야 하며, 문장을 구성하는 데도 넓게 또는 좁게 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앞과 뒤와 구성상의 문제가 대략 생략되고 선택되면 빨리 쓰되 전후 연결과 위미가 상통하게 하고 쉽게 알 수 있게 해야 하며, 조사들은 가능하면 피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른 의미와 하고자 하는 말이 실리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글 : 남정우
사진 : coreein photo
사진 협조 :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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