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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마른 지푸라기에서 대동의 용틀임을 만들다
작성일
2010-02-1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419




조성국 선생과의 만남

한줌 지푸라기일 뿐이었던 볏짚이 스멀스멀 일어선다. 꼬리에 꼬리를 곱치자 한팔 간격에 불과했던 마른 지푸라기는 10미터가 되고, 50미터가 된다. 그 길이가 100미터에 이르자 스스로 넘실거리기 시작한다. 바짝 말라 지난해의 마른 숨을 몰아쉬었던 다른 지푸라기도 하나가, 두 개가, 한 줌이, 한 아름이 더해지자 또 다른 생의 시작을 알린다.

마른 지푸라기에 대동의 숨결을 불어 넣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6호 영산줄다리기 명예보유자 김종곤(73)씨에게 ‘줄’은 숙명이었는지 모른다. 거부할 수 없었던 질기고 긴, 줄과의 인연은 ‘영산줄’ 그것 그대로를 닮아 있다. 그의 몸 곳곳, 손과 얼굴에 아로새겨진 세월의 흔적은 영산줄을 넘어 우리의 줄이 남긴 자취였다.

김종곤씨가 영산줄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70년이다. 가난 때문에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던 그는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부산, 진해, 서울 등지로 옮겨 다니며 일을 했다. 오랜 객지생활 후, 고향에 돌아와 마주한 것은 예순이 넘어서까지 지게를 짊어지고 농사일을 하는 아버지였다. 그 모습이 싫어, 농사를 짓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청년 김종곤은 고향 영산에서 양파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줄과의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되었다. 일봉 조성국 선생(초대 보유자)을 만나게 된 것이다.

“조성국 선생은 채소와 작물을 가르치는 교사였어요. 양파 종자를 구하기 위해 선생을 만나러 갔습니다. 객지를 떠돌다 고향에 돌아온 저를 보더니 ‘고향에 묻혀 살 것 같으면 뜻있는 일을 하자.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키는 것은 뜻 깊은 일이다’라고 말씀 하셨어요. 그리고 영산줄 만드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그는 조성국 선생의 전수 장학생으로 1983년부터 ‘대학의 줄’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군사독재의 서슬이 시퍼렇게 국민을 겨누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살아있는 지성’이 꿈틀대던 시절이었다. 불의에 대한 항거, 그가 대학에서 본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1983년부터 2008년까지 대학에서 젊은 학생들과 함께 숨 쉴 수 있었던 근원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시시때때로 날아오는 최루탄 앞에 줄을 손에 쥔 그는 ‘이 시점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불의를 두려워하며 피할 것인가, 맞설 것인가. 맞선다면, 줄로써 그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 말이다.

“1983년 5월이었습니다. 이화여대에서 학생들에게 줄 꼬는 것을 가르치면서 함께 만들었지요. 그런데,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학생들을 해산시키려 했습니다. 줄에 대고 최루탄을 쏘니 눈이 얼마나 매웠겠어요. 학생들이 흩어졌다 다시 모여 줄을 당기는데, 대동의 장 한 가운데에서 가슴 먹먹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가 대학의 줄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것은 영산줄이 행해진 이후 ‘메이퀸’, ‘쌍쌍파티’ 등과 같은 외래문화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후 대동제, 민속제 등의 이름으로, 줄다리기는 대학축제의 핵심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근 급격히 진행된 대학 공동체의 해체와 사회·경제적인 요인으로 대학의 줄은 더 이상 연행演行할 수 없게 되었다.



줄, 공동체의 안녕을 위한 숙명

대학 공동체의 해체와 농촌의 위기는 이미 오래된 이야기가 되었지만, 그의 눈에는 영산줄다리기가 대동놀이의 하나로 공동체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행해지던 그때가 선하게 떠오른다. ‘줄꾼’의 기억 속에서 줄이 제일 컸던 때였다. 영산줄이 정월대보름에서 3·1민속문화제 기간으로 옮겨 행해지던 때였다. 1978년이었다. 거대한 머릿줄은 트럭에 싣고, 몸줄은 소달구지에 넣어 보리가 파릇파릇 돋은 앞벌로 옮겼다. 비가 왔다. 억수 같은 비였다.

“그해가 1978년이었는데, 3월 초에 비가 그렇게 내리니 줄을 당길 수가 있어야죠. 날짜를 옮겨 3월 17일에 하기로 했는데, 그날도 많은 비가 왔어요. 사람들이 보리밭에 모여서 ‘영차영차’하고 당기는 시늉만 했지요.”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줄을 만들었으면 당겨야 했다. 그래야 땅이 울지 않고, 산이 울지 않는다. 한해 농사를 물 걱정 하지 않고 지을 수가 있었다. 속신이라 해도,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전통이었고, 시대의 삶이었다.

 



영산 줄과 일본 줄 연구가 남은 과제

동과 서로 나누어 각각 100여 미터에 달하는 줄을 만든다. 동쪽에서 만든 줄은 숫줄이 되고, 서쪽에서 만든 줄은 암줄이 된다. 동그랗게 말린 암줄의 머릿줄에 숫줄의 머릿줄을 넣고 비녀목을 꽃아 고정시킨다. 진잡이, 이싸움이 시작되며 분위기는 고조된다. 마른 먼지가 뿌옇게 올라오고 줄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숫줄이 조금씩 암줄 쪽으로 다가서기 시작한다. 뒤로 물러서는 암줄은 조금씩 승리의 기쁨을 맞본다. 올해도, 풍년이다.

“암줄이 이겨야 풍년 된다고 숫줄이 부러 져주는 일은 없습니다. 숫줄이 이기기 위해 줄을 만들고 밤새 지키기도 했어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젊은 아낙이 숫줄을 넘으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했는데, 숫줄은 끊어지기 때문에 줄을 넘지 못하도록 지키는 거예요.”

언젠가 남장을 한 아낙 셋이 숫줄을 넘어 도망가다 돈을 흩뿌리고 간 사건을 이야기하며 김종곤씨는 환히 웃는다. 줄과 함께 한 세월의 고됨은 찾아볼 수 없었다. 행복해서다. 그는 줄을 만드는 일생을 살아서 행복하다고 했다. 그러나 줄의 신비성이 사라진 것은 큰 아픔이다. 더 이상 줄을 만들 젊은이들이 없다는 사실도 무딘 아픔이 되었다. 줄을 지키기 어려워진 현실이지만, 지역에서 그와 함께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어 힘이 난다.

기록물 ‘영산줄의 발자취’, ‘화보로 보는 영산줄과 대학줄’의 발행은 영산줄다리기를 보존하고 지켜나가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일궈낸 성과다. 지난 2005년, 일본 히로시마 수도대학과 대구 계명대학교가 한일국교정상화 4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한일 청소년 축제 2005’에서 영산줄은 또 다른 가능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동안 영산줄의 30년사 기록 작업을 마무리 했습니다. 우리의 ‘줄’과 세계의 줄을 기록으로 남기는 과제가 아직도 남아있지요. 일본 오키나와에만 유독 우리와 같이 쌍줄을 연결해 당기는 전통이 있습니다. 백제, 가야시대의 줄이 전파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와 관련된 연구를 해 볼 계획입니다.”

100미터짜리 골목줄을 만들고, 그 골목줄이 40~50개가 되면, 나란히 펼쳐두고 새끼줄을 이용해 1미터 간격으로 엮는다. 엮은 줄은 덕석말이를 해 길고 두꺼운, 하나의 줄로 만든다. 몸줄에 40여 개의 젓줄을 엮는다. 다시, 줄이 나간다. 거대한 용틀임이 일어난다. 대동의 장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가 웃는다.   


글·이수정  
사진·최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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