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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 전환을 꿈꾸던 조선의 선비
작성일
2007-04-02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187

옛 위인의 자취 - 다산 정약용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 전환을 꿈꾸던 조선의 선비 | 다산 정약용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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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정조의 재위 시절을 흔히 조선 문예 부흥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부른다.
  이 찬연하고도 번쩍이는 시대에 떠오르는 두 사람이 있으니, 임금 정조와 그의 총애를 받았던 조선판 레오나르도 다빈치, 정약용이다. 시대가 사람을 만드는 것인지 사람이 시대를 만드는 것인지, 어느 것이 확실하다 말할 수 없으나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 놓은 이들의 업적은 시대를 뛰어넘은 사람의 위대한 풍광일 것이다. 혁신가요 정치가, 저술가요 과학자이기도 했던 다산 정약용의 삶과 흔적들을 소개해 본다.                     

드라마틱했던 천재의 연보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합수된 한강은 느리고 유순하게 팔당호로 흘러든다. 이때 또 하나의 지류가 강에 흡수된다. 광주시에서 흘러온 경안천이다. 한강과 경안천이 만나는 팔당호 언저리, 조안면 능내리 마현마을은 다산 정약용의 고향이다. 1762년 6월, 다산은 강과 강이 합쳐져 더 큰 흐름의 전환을 이루는 이 강가에서 나고 유년을 보냈다. 아버지는 진주목사 였던 정재원이며, 어머니 해남 윤씨는 윤선도의 후손이자 유명한 서화가였던 윤두서의 손녀였다. 그는 마을 앞을 흐르던 강을 지극히 사랑하여 한강의 별칭인 열수를 자신의 호로 쓰기도 했고, 노년에는 열초라 하기도 했다. 그의 호로 쓰였던 열초는 ‘한강가에서 나무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네 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던 그는 주위에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일곱 살 되던 해에는 ‘산`’이라는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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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부친이 이 시구를 보고 기특하게 여겨, ‘분수에 밝으니 장차 크면 틀림없이 역법과 산수에 능통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산은 15세에 풍산 홍씨와 결혼을 하였으며, 이때 호조좌랑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상경하게 된다. 16세에 실학의 선구자였던 성호 이익의 저서를 접하고 이가환, 이승훈 등과 교류하면서 실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2세 때인 1783년(정조7년)에는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경의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정조의 눈에 띄게 된다. 그리고 1789년에 마침내 식년문과 갑과에 급제하여 희릉직장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오른다. 이후 10년 동안 정조의 특별한 총애 속에서 예문관 검열, 사간원정원, 사헌부지평, 홍문관수찬, 경기암행어사, 사간원사간, 동부승지, 좌부승지, 곡산부사, 병조참지, 부호군, 형조참의 등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1789년에는 한강에 배다리를 준공시키고, 1793년에는 수원화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때 거중기를 발명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것이었다. 한편 이 시기에 그는 이벽, 이승훈과의 교류를 통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는데, 이는 그의 정치적 진로에 커다란 장애로 작용하게 된다. 당시 천주교 신앙은 성리학적 가치 체계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으로 인식되어 집권층으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고 있었던 데다, 가뜩이나 다산에 대한 임금의 총애를 시기하는 무리들에게 공격의 구실을 만들어준 셈이었다. 1800년, 그의 정치적 보호벽이었던 정조가 승하하면서 다산의 삶은 커다란 굴곡을 만나게 된다. 1801년에 천주교 탄압사건인 신유사옥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다산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과 상처를 남기게 되어, 매부였던 이승훈과 조카 사위 황사영, 사돈인 이가환 등이 참수되고 셋째 형 정약종도 옥사한다. 둘째 형 정약전과 다산은 신지도와 포항으로 각각 유배되는데, 다음해 일어난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정약전은 흑산도, 정약용은 강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강진의 유배지에서 다산은 17년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1808년, 백련사 뒷편 만덕산기슭에 다산초당으로 거쳐를 옮기게 되는데 이곳은 다산학의 산실이 된다. 가계의 치욕과 아픔을 뒤로하고 그는 이곳에서 학문 연구에 매진했고,이를 자신의 실학적 학문을 완성시키는 기회로 활용했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일표이서라 불리는 그의 대표적 저서가 이곳에서 저술되었고, 500여 권에 달하는 경집과 문집이 쓰여졌다. 1818년, 57세 되던 해, 마침내 기나긴 유배 생활을 마감한다. 초당 뒷켠 바위에 해배解配를 기념하는 두 글자 정석(丁石)을 새기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업과 저술 활동을 계속하다가 1836년 75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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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현의 강가에서 다산의 삶을 생각하다

 강과 강의 만남은 유연하다. 서로 먼 길을 흘러온 강들의 만남은 부딪힘의 흔적 없이 그저 고요하고 자연스럽게 합수된다. 강물은 소리도 없이 흔적도 없이 경계도 없이 하나가 되는데, 합수된 강들은 다시 새로운 전환을 이루며 너른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다산의 생애는 이 강과 닮았다. 치열한 역사의 전환점에서, 당쟁의 혼탁한 살기 속에서 다산은 실학을 바탕으로 강처럼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다. 다산은 18세기 조선 사회의 모순을 토지 소유제와 신분제라고 갈파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정의와 합리성은 당시의 조선 현실과는 공존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다산은 임금의 지독한 총애를 받았다. 그는 임금과 자주 독대했고, 임금은 그의 인품과 개혁적 성향을 흠모했으며, 든실한 후원자였다. 정조가 왕위에 있던 세월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낡은 우리나라를 새롭게 하라 (一新我之舊邦)’ 고했던 그의 꿈이 조금 더 나라의 기틀을 다졌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사람의 시간이 강처럼 순리대로만 흐르지는 않는 모양이다. 정조는 마흔 여덟의 창창한 나이에 세상을 떴고, 이때부터 다산은 수없이 오랜 유배의 질곡을 겪으며 초야의 선비가 되었다. 마현마을 둔치에서 바라보는 한강은 너르고 나직하여 질곡이 느껴지지 않았다. 강은 서울을 향해 흘러들었고, 사람도 서울을 향해 흘러갔다.


글 / 사진ㆍ권 연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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