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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곁에 머무는 이, 고수 김청만
작성일
2018-08-0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270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고법 예능보유자

지금 같았으면 국악소년으로 유명세를 탔을 것이다. 악극단은 어린 고수 김청만을 내세워 공연을 다녔고, 호남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13세 때부터 악극단에 합류해 유랑하며 예인의 길을 걸었던, ‘천재소년 설장고’. 이것은 어린 시절 김청만의 또 다른 이름이자, 그의 뿌리이기도 하다. 01.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예능보유자 김청만은 전남 목포시 북교동 출신의 판소리 명고이다.

장구 하나로 전국을 누비다

한 소년이 장구를 메고 앞장섰다. 악극단의 공연을 선전하는 행진이었다. 뒤에는 꽹과리, 북, 징을 맨 단원들이 줄을 이었다. ‘천재소년 설장고’. 장구 잘 치는 천재소년의 공연에 낮 동안 생업에 바빴던 사람들도 밤이 되면 그를 보러 왔다. 천막 안은 사람들로 들어찼고, 시뻘건 횃불 아래 그의 장구 소리는 고조되어 갔다. 흥이 오르면 사람들의 마음도 타올랐다. 횃불처럼 뜨거운 밤이었다. 한바탕 공연을 마치면 코 밑은 새카매져있었다. 횃불의 그을음 때문이었다. 그 연기를 다 마셨지만 즐거웠다.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 주인공이 된다는 것. 부모님 곁에서 평범한 삶을 살았다면 느끼지 못할 희열이었다. 그래서 13세의 어린 나이에 그는 과감히 유랑하는 삶을 선택했다. “어디를 가든지 인기몰이였어요. 오나가나 사랑받고. 악극단에 있으면서 많이 배웠어요. 장구, 아쟁, 꽹과 리, 뭐든지 배웠죠. 하나만 해서는 누가 찾나요, 안 찾지. 연극도 해가며 그때 우리나라 장단을 많이 익혔어요.” 조랑말 날뛰듯 뛰어다녔다던 김청만은 지금도 그때를 기억하면 즐겁다. 서툰 솜씨로 혼자 미제 우유깡통을 두드리던 것이 시작이었다. 예인 많기로 유명한 목포에서 태어났고, 동네에서는 늘 농악소리가 들렸다. 호기심에 깡통을 두드리다가 악극단에 합류했고, 여러 선생님들을 모신 것이 지금의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김청만을 만들었다. 큰 스승을 만난 것, 아니 목포에서 태어난 것부터 큰 복이라 그는 여긴다.


설장구에서 북재비로

어린 시절, 어디를 가도 주목받던 그가 당대 최고였던 임춘앵 여성국극단에 발탁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나이 19세에 정식 장구반주자가 됐고, 이후 군에 가기 전까지 그는 계속 장구를 쳤다. 하지만 지금은 북반주자로 더욱 유명하다. 어째서일까. “설장구서부터 북도 치고 다 했었으니까요. 공연에 판소리 없인 안 되니까 악극단 때도 북도 잠깐씩 쳐주고 했었죠. 그러다가 81년도에 국립창극단에 시험 쳐서 들어간 거예요.”

그의 스승 김동준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군에 다녀온 후 악극단 생활을 청산했고 줄곧 서울에 살면서 스승 한일섭으로부터 북과 아쟁을 배웠다. 판소리 북 반주는 그의 또 다른 스승 김동준에게서 사사했다. 7년간 김동준을 스승으로 모시며 운전도 하고, 심부름도 했다. “그런 선생님을 만났으니까 성공했죠. 당신이 무대에서 활동하는 걸 조금이라도 안 보면 난리가 났으니까. ‘너 사람 될라 그러냐, 안 될라 그러냐!’ 하시면서 야단 치셨죠.” 그의 스승은 늘 당신 것을 훔쳐가라 했다. 그림자처럼 곁에 머물며 스승의 기교를 제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교재도, 악보도 없던 시절, 그가 택한 것은 녹음이었다. 청계천에서 쓸 만한 카세트를 사다가 어깨에 메고 다니며 스승의 공연을 녹음했다. 자신의 연주도 물론 녹음했다. 녹음한 자료를 듣고, 듣고 또 들으며 밤낮 북만 쳤다. 그렇게 그의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비로소 명창들이 찾는 진정한 고수가 됐다.

02, 03. 2015 국립무형유산원 토요 상설공연 4월 ‘春 이로다 판소리’ 공연. ⓒ국립무형유산원 디지털아카이브 04. 고수의 역할과 임무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하는 김청만. 그는 고수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섭섭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05. 북을 잡고 있을 때 그의 손에는 흥이 절로 춤춘다.

늘 곁에 머무는 그림자 같은 삶

북을 칠 때, 김청만은 오로지 창자만 바라본다. 언제 호흡하는지, 어떤 감정인지, 세심히 살피고 연주한다. 관객의 눈을 사로잡던 어린 시절이었지만, 이제는 무대 위에서 드러나지 않았을 때가 가장 좋다. “고수는 받쳐주는 역할이거든요. 적벽대전에서 불을 지르면 북통에도 불이 나야 하고, 심청이 인당수에 뛰어 들면 슬퍼야 하고. 그때그때 추임새와 장단으로 받쳐줘야 하죠. 그게 고수의 임무고.” 판소리의 고수가 장단을 딱딱 맞추지 못하면 그야말로 판이 깨진다. 판소리 각 대목에 맞는 장단을 아는 것은 기본이고, 소리꾼의 기교적 특징도 머릿속에 꿰고 있어야 한다. 흥을 돋움과 동시에 추임새로 창자의 말에 호응하기까지, 그야말로 신경 쓸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고수는 결코 제 역할을 과시하지 않는다. 창자의 비위를 잘 맞춰 그날 공연을 잘 했으면 그만이다. “주목받지 못해도 섭섭하지는 않아요. 원래 고수는 항상 뒷전인 걸. 우리한테 신경을 쓰지 말라고 해요. 그래야 창자가 편치요.”

고법 鼓法 판소리의 북 치는 법. 고법의 기본은 자세가 반듯해야 하고, 소리의 생사맥(生死脈)에 따라
북의 가락을 맺고 끊어야 한다. 판소리명창들이 고도의 기교로 묘한 가락을 엮어 나갈 때, 고수는 장단의 원박(原拍) 외에 복잡하고 다양한 변주가락을 구사하면서 소리를 반주한다.

북재비로 사람 되는 일

김청만이 아쉬운 건 따로 있다. 어른이 되고 보니 곁에서 야단쳐줄 스승이 없어진 것. 줄곧 스승의 흉내만 내다가 이제야 사람이 된 것 같은데 가르쳐준 스승은 떠나고 없다. “참 아쉽죠. 꾸지람 덕분에 사람 된 건데, 평생 신세만 지고….” 김청만의 방에는 두 스승의 사진이 액자에 걸려있다. 사진을 바라보면 스승들의 장단소리, ‘어이 김군! 올라와봐.’ 하며 꾸짖던 소리가 불현듯 떠오르곤 한다. 이제 지적해줄 스승들은 떠나고 없지만, 들어야 할 자료들은 아직도 많다. 스승들의 살아생전 소리, 자신이 공연했던 소리, 제자들의 소리까지 되짚어볼 자료만도 몇 년 치다. “아직도 모르는 게 많아요. 공연한 걸 다시 보면 이땐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후회도 되고요. 예술이란 게 100퍼센트는 없으니까.” 국가무형문화재가 된 지금도 공부할 것이 많다는 김청만은 이제 누구에게 답을 구해야 할까. 전통가락이 사라지는 게 아까워 기록으로 남기고 연구하기를 수십년. 하지만 아직도 한계에 부딪힐 때면 스승의 곁이 그립다. 묻고 혼나고 가르침을 얻었던 스승의 곁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음을 그분들은 아실까. 그러한 아쉬움을 담아 김청만은 스승의 사진 두 장을 아직도 곁에 두고 있다.


글. 이혜민 사진. 이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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