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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적한 山寺의 ‘ 체험교육’, 원주 고판화 박물관
작성일
2013-12-03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5491

한적한山寺의‘체험교육’,원주 고판화 박물관 박물관은 숙제만 하는곳이 아니라 아이디어 원천인‘창의력발전소’

01. 능화판을 인출하는 한선학 관장. 
02. 고판화박물관이 소장한 조선 초기의 판화 옥추보경(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54호).

중앙고속도로 신림IC에서 빠져나와 주천 방향으로 6㎞를 더 가면 작은 표지판이 나온다.‘치악산雉嶽山명주사明珠寺고판화박물관古版畵博物館’이라 적혔다. 예전 처음 길을 지나칠 때만 해도‘이런 한적한 곳에웬박물관이 있나’고 생각했다. 버스 한 대 간신히 통과할 만한 시골길로 산비탈을 올라가면, 뜻밖에도 산중에 넓은 벌판이 나온다.

“해발 600m인데 평지 넓이가 6000평입니다. 감악산紺岳山이사람 얼굴처럼 보이는 곳은 여기밖에 없어요….”목소리 크고 피부색 좋은 은발의 사내는‘장소’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태고종 사찰인 명주사 주지이자 박물관 관장인 한선학韓禪學이다. 절도, 그 옆에 있는 박물관도 특이하게 생겼다. 소나무와 황토와 너와지붕으로 만든 집들이다. 절이 아니라 전원주택아니냐고했더니‘한국최초의전원사찰’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이 박물관은 한국, 중국, 일본, 몽골, 티베트의 목판과 판화, 서책 400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불정심다라니경’처럼 중국 국보급이라는 말을 듣는 희귀본이 3점이고, 50여점은 중국에서 국가 보조금을 받고 발행하는‘중국 고판화 도록’에 실렸다. 아시아 판화계(界)에서 그는 이미 알아주는 유명인사라고 한다. 2007년에는 국내 유물 7점이 강원도 지정문화재에 올랐다.‘북악 36경’같은 일본 우키요에(浮世繪)의 컬렉션도 독보적이다.

그의 사연은 유별나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하숙집 주인공은 미술사학자 최순우였고, 동국대 미술학과에선 황수영 교수로부터 배웠다. 21사단에서 군종장교로 복무하다 1996년 신도들과 함께 중국 절을 찾았다. ‘곡차를 끊게 해 달라’는 간절한 철야 기도를 부처님이 들어 주셨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귀로에 만난 곳이 항저우(杭州)의 골동품 시장이었다. 운명은 누구에게나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한번 파면 무수히 인쇄가 가능한 대중예술의 꽃이 저를 사로잡은 거지요. 바로 판화였습니다.” 금세 물감이 뚝뚝 떨어질 듯 화려한 무늬가 민화와 불경, 책표지, 편지지, 삽화를 수놓고 있었다. 이때부터 홀린 듯 온갖 동양 판화와 그 원판을 모으기 시작했다. 경기 군포 아파트를 팔아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황 둔리의‘그 땅’을 사들이고 절을 지었다.

그 무렵 서울 인사동 골동품상 사이에서“웬 이상한 원주 중이 중국 목판을 모은다더라”“그거 사서 뭐 하려고 그러지?”라는 말들이 오갔다. 아직은 다들 그런 걸 대수롭게 여기지 않던 시절이었다. 수집 과정에서 잊지 못할 일들도 많았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조선시대 <오륜행실五倫行實圖>의 목판 원판과 마주친 순간 기겁을 했다. 목판이 일본식 4각 화로인‘이로리’를 감싸는 장식 용구로 둔갑해 있었기 때문이다.‘비록 상품성은 없어도, 그 자체가 우리 문화재가 얼마나 일제 강점기에 능욕을 당했는지 보여 주는 교육 자료가될것’이라는 생각에 구입했다.

‘판화의 굴욕’은 거기서 그치는 게아니었다.“일제 강점기 전주 한옥에선 비 온 뒤에 진흙 위 디딤돌로 목판을 썼습니다. 중국에선 목판으로 닭장을 만들었다는 얘기도 나왔어요.”한 관장은 그렇게 훼멸의 위기에서 살아남은 목판들을 하나하나 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2004년 고판화박물관의 문을 열었다.

개관 당시에는‘망하려고 작정했느냐’며 혀를 차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를 괄목상대刮目相對한다. 정부에서 템플스테이 사찰로 뽑은 한적한 산사옆 박물관에 연간 1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찾는다. 무한 복제가 가능한 판화의 생명력이‘체험’으로 이어진다. 지역학교와 연계한‘숲속 판화학교’는 어린이 문화체험의 명소가 됐고, 시민과 노인, 장병, 다문화 가정, 수형자를 위한 판화학교도 열었다. 이것을 다시 자연스럽게 템플스테이와 연결시킨다.『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대한민국 대표 여행지 1000』같은 여행서에도 명소로 선정됐다. 유물 자체의 진가도 서서히 빛을 발해, 십 수 년 전 사들인 중국 목판들이 이제 가격이 수십 배 뛰었다고 한다. 물론 팔 일은 없을 테지만, 사람들이 보는 눈이 달라졌다.

“판화는 그 나라의 인쇄문화와 궤를 같이 한다고 하지요. 한번 파 놓으면 수없이 인쇄할수있는 대중예술의꽃아니겠습니까?”그런 그도‘사립박물관의 고충’앞에서는 한숨을 쉰다. 어른 4000원, 어린이 3000원인 관람료가 아깝다며“체험만 하고 갈 테니 좀 깎아 달라”“서울 국립중앙박물관 같은 큰 박물관도 돈을 안 받는데 여기는 왜 유료냐”고 말하는 관람객도 여전히 있다는 것이다.“그곳 관람료는 이미 여러분이 세금으로 내신 것 아닙니까”라고 설명해도 좀처럼 통하지 않는다.“모든 창조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만드는 모방을 통해 시작됩니다. 그렇게 보면 박물관은 창의력의 발전소이자 아이디어의 보물 창고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체험 숙제’만 하는 곳이 아니라니까요.”

글. 유석재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사진. 고판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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