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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국민과 함게하는 문화유산 e-야기
작성일
2006-07-10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494

의릉懿陵 개방 10年을 맞이하며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 천장산 아래에 위치한 의릉懿陵(사적 제204호)은 조선 제20대 경종景宗(재위 1721~1724)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魚氏의 능이다. 경종은 숙종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 장張씨(장희빈張禧嬪)이다. 경종은 성격이 온유하였으며, 자녀가 없고 병이 많아 이복동생 연잉군(뒤의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였다. 4년 동안의 경종 재위 기간 중에 집권세력이었던 소론少論이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추진하던 노론老論 세력을 숙청한 신축옥사辛丑獄事(1720)와 임인옥사壬寅獄事(1722)가 있었다. 의릉의 특징 의릉은 조선시대의 왕릉 중 드물게 봉분을 좌우배치가 아닌 상하로 조성한 동원이봉릉同原異封陵이다. 이러한 전후능설제도前後陵設制度는 경기 여주에 있는 조선 제17대 효종의 영릉寧陵(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에서 처음 나타난 형식인데, 풍수지리적으로 생기가 왕성한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두 개의 봉분을 앞뒤로 놓아 능을 조성한 것이다. 왕릉과 왕비릉은 각각 단릉單陵의 상설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왕릉 뒤에만 한 개의 곡장曲墻이 둘러져 있어 쌍릉雙陵형식으로도 볼 수 있다. 봉분은 병풍석이 없이 난간석欄干石만 둘러져 있고, 난간석주에 방위 표시를 위한 십이지문자가 조각되어 있다. 석물石物은 혼유석魂遊石·장명등長明燈·망주석望柱石·문인석文人石·문무석文武石과 능을 지키는 수호신인 석마·석양·석호가 쌍으로 배치되어 있다. 비에는 "조선국朝鮮國 경종대왕의릉景宗大王懿陵 선의왕후宣懿王后 부"라는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통제시기부터 국민반환까지 의릉은 1970년 5월 26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204호로 지정되었으나, 1962년 국가정보원(구 중앙정보부)이 들어서면서 일반인들의 접근이 철저히 통제되고 왕릉의 원형은 심하게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왕릉의 우측 능선을 깎아서 넓은 축구장을 조성하고 콘크리트 청사 건물을 세우는가 하면, 좌측 능선 역시 청사를 짓기 위해 산허리를 잘라내었다. 그뿐만 아니라 1972년경에 정자각 앞과 홍살문 사이 사초지의 땅을 파서 인공으로 연못을 만들어 관상어를 기르고, 외래수종을 식재하고 전통에 어울리지 않은 조경시설물들을 설치하였다. 기록을 보면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추존: 익종翼宗)의 능도 순조 31년(1831) 8월 4일에 이곳 의릉 좌강左岡(좌측언덕)에 자리 잡아 … 철종 6년(1855)에 동구릉으로 이장하였다.”라고 하는데 그 능 터마저 묘연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국정원이 1995년 9월에 내곡동으로 새로운 청사를 짓고 이전하게 되어 1995년 11월에 능역 부지에 대한 1차 반환이 이루어졌다. 그동안 베일 속에 가려있던 의릉이 34년 만인 1996년 5월 1일 일반시민들에게 첫 선을 보였다. 그 후 1997년부터 2006년까지 토지 5필지 25,812㎡(7,808평)를 5차에 걸쳐 반환받았고, 현재는 국가정보원연구소(15,851㎡)를 제외한 대부분의 능역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1996년부터 반환 토지 39%와 건물 대부분은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사용을 하고 있어 완전한 반환은 2006년 12월쯤 가야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의릉복원정비지역 발굴조사와 의릉 복원 우리 청은 원형에 맞는 능제陵制복원정비를 위해 국가정보원으로부터 반환받은 의릉 능역 일부에 대하여 2003년 7월부터 동년 10월까지 명지대학교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와 함께 문헌조사와 현장 시굴조사를 시행하였다. 발굴 조사 결과 정자각 월대에서 금천교까지 이르는 건물지 및 시설물에 대한 관련 매장유구를 확인하였는데, 상당부분의 유구는 이미 유실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당시 현존한 고건축물로는 정자각과 비각, 홍살문뿐이었으며, 수복방, 수라간, 재실은 사라지고 없었다. 조선왕릉지를 보면 홍살문 북쪽 264보步에 재실 13칸, 전사청 8칸, 제기고 3칸이 위치하고, 273보에 안향청安香廳 6칸이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재실 남쪽으로 100보에는 길이 140척, 너비 89척의 약 150평 규모의 연지蓮池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러나 의릉의 재실은 1973년에 영원英園재실로 옮겨졌다고 하니 정확히 말하면 없어졌다기보다 이건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2003년의 발굴조사는 본래의 능역을 모두 복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자각부터 금천교에 이르기까지 그 주변의 일부 건축물과 시설에 대한 배치와 형태를 확인하고, 복원정비를 위한 기초 자료로 활용하고자 했던 목적이었다. 발굴 조사 결과를 토대로 2003년 12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2년간에 걸친 기초적인 의릉 능제복원정비공사가 진행되었다. 지금 의릉은 왕릉 바로 우측에 조성되어 있던 넓은 축구장이 전통 소나무 420여 그루가 심어진 송림으로 변하여 울창함을 자랑하고, 오염된 물로 악취가 풍기던 인공연못은 성토되어 사초지로 복원돼 풀 향기로 가득하며, 또한 사라진 어구를 복원하고 금천교가 놓여져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아쉽긴 하지만 멸실된 건축물들은 이번 복원정비사업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의릉 개방 10年을 맞아 고요히(?) 34년간 닫혀 있던 조선의 왕릉 “의릉”. 1995년 5월 1일 국민 앞에 모습을 보인 이후 「사적 제 204호 의릉」은 공개관람 10년을 맞이하였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되찾기 위한 노력과 정성의 결과, 의릉은 이제 국민들에게 역사교육장으로, 휴식공간으로 개방 활용되고 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들 한다. 능역 전체 규모로 볼 때 의릉 능제복원정비공사가 미약해 보일 수 있지만 조선 왕릉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자 하는 그 시작의 의미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역사의 진정성眞正性 회복을 위한 좋은 선례가 되었다고 본다. 이를 계기로 훼손된 모든 조선 왕릉을 최선의 방법으로 복원하여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유산을 후손들에게 온전하게 계승 발전하기를 진정으로 기대한다. 김흥년 _ 의릉지구관리소장 [국민과 함께 하는 문화유산 e-야기]는 문화재청 홈페이지(www.cha.go.kr)에 수록된 것으로서, 문화유산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문화재에 얽힌 재미있는 숨은 이야기, 문화재 이해의 체크포인트, 문화재 지정 보수 수리 등 행정프로세스 상의 노하우가 담긴 살아있는 이야기들을 국민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고자 만든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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