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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선왕릉을 지키고 보호한 전문직, 능참봉
작성일
2023-08-3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915

조선왕릉을 지키고 보호한 전문직, 능참봉 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은 총 40기가 거의 훼손 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조선왕조 500년을 넘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에 왕릉을 관리하는 직업인 능참봉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의 효성이 지극할수록 고생하는 벼슬

조선시대에는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고 불렀다. 이 왕릉을 지키고 보호하는 관리가 있었으니 바로 능참봉이다. 능참봉은 종9품으로, 조선시대 관직 가운데 가장 낮은 벼슬이었다. 하지만 왕의 무덤을 관리한다는 상징성이 매우 컸기에 중요한 벼슬자리로 여겨졌다.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사족들이 관직에 진출할 때 이 벼슬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에는 “연소하지 않고 경륜이 있는 자를 시험을 치르지 않고 능참봉으로 임용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임금 조상의 무덤인 만큼 전문성을 가지고 엄격하게 관리해야 하기에, 학문적 소양뿐만 아니라 조경・토목・건축에 대한 지식과 역량도 갖추고 있어야 했다.


능참봉은 두 사람이 보름씩 나누어 왕릉 옆에 있는 재실에서 지내며 교대로 근무했다. 출근 장부인 ‘공좌부’를 작성한 뒤 일과를 시작했다. 날마다 왕릉의 상황을 파악하여 그 결과를 예조에 알렸으며, 예조에서는 그것을 왕에게 보고했다. 능참봉은 왕릉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왕과 왕비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그 무덤을 살피고[봉심(奉審)], 왕릉 주위의 나무를 관리하며, 사람들이 함부로 나무를 베는 ‘투작(偸斫)’을 감시하고, 왕릉의 수리 공사를 할 때 관리·감독하는 일 등을 했다. 바쁠 것 없는 말단 벼슬이었지만, 일 년에 한두 번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할 만큼 긴장된 순간을 보냈다. 왕이 제사를 지내러 능으로 행차할 때 능 주위가 더럽거나 나무를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 큰 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큰 나무 한 그루를 훼손하면 3년 유배형에 처했고, 두 그루를 훼손하면 천 리 밖으로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능참봉은 과거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관직에 나아가는 통로 역할을 하는 데다, 최고 권력인 왕실과 통하는 왕릉을 관리하는 권한 때문에 인기가 높은 벼슬이었다. 지역사회에서는 고을 수령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만큼 권세를 부리는 유지 노릇을 톡톡히 했다. 능참봉은 다달이 쌀 10말, 콩 5말을 받았다. 봉급이 그리 많지 않아서 때로는 빚을 지기도 했다.


능참봉은 왕의 효성이 지극할수록 고생하는 벼슬이라고 한다. 효성이 깊은 왕이 거의 날마다 능 참배를 오니, 능참봉으로서는 잠시도 쉴 틈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이 일흔에 능참봉을 하니 한 달에 거둥이 스물아홉 번’이라는 속담까지 있다. 이 속담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자주 찾아 수원 땅에서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현대에 와서 조선왕릉을 지키는 능참봉의 업무는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에서 담당하고 있으며, 조선왕릉 동부지구관리소, 중부지구관리소, 서부지구관리소에서 왕릉을 관할한다. 조선왕릉은 왕과 왕비가 묻힌 곳이라 해서 ‘신들의 정원’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 정원을 관리하는 전문직 능참봉이 있었기에, 조선왕릉의 세계유산적 가치를 오늘날까지 보존할 수 있었다.


00.『이재난고』조선 후기 학자인 이재 황윤석이 53년간 쓴 일기인 『이재난고』를 보면 능참봉이 왕릉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그가 38세에 강원도 영월 장릉을 관리하는 종9품 능참봉으로 부임했기 때문이다. 황윤석은 1766년 수해로 왕릉의 핵심 건물인 정자각에 누수가 일어나자 이를 수리하고 고유제를 지냈으며, 산불 방지를 위해 해자(垓字) 밖 잡초를 제거했다. 그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종8품 봉사로 승진할 수 있었다. ©문화재청


글. 신현배(역사 칼럼니스트, 아동문학가) 일러스트. 박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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